몇 십 년 전 어느 겨울 졸병 생활을 할 때의 일이다. 당시만 해도 신참병이 매 주일 성당을 다닌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매주일은 고참병에게 호되게 당하는 날이 되어 버렸었다. 주일 미사를 다녀오면 어김없이 몇몇 고참병이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가슴에 멍이 들도록 두들겨 팼다. 어떤 개보다도 더 많이 얻어 터졌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악랄했던 고참병 한 명이 성당 다녀오는 나를 내무반 옥상으로 불러 올렸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고참병이 존댓말을 하면서 “하 일병님, 나도 하 일병님이 다니는 성당에 같이 가면 안 될까요?”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동안 일요일에 사역하지 않고 성당 간다고 그렇게 괴롭혔는데, 아무리 두들겨 패도 성당에 안 가겠다는 말을 절대하지 않는 모습이 존경스러웠다고 하였다. 그렇게 하여 그 고참병은 세례를 받았다.
사도 바오로 탄생 2000년을 맞아 2008년 6월 말부터 한 해 동안 ‘바오로의 해’를 선포하고 그 어느 때보다 더 열심히 선교하자고 우리 교회는 다짐을 하였다. 사목자들은 선교에 총력을 기울이자고 외친다. 하지만 돈 이야기가 아니라서 그런지 별로 신통찮은 것 같다. 요즘은 돈 이야기 정도는 되어야 사람들이 귀를 조금이라도 기울여주니 말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선교에 대한 실감을 조금이라도 가지게 할까 해서 케케묵은 몇 십 년 전의 어느 겨울 이야기를 끄집어내 본 것이다. 그렇게 맞으면서도 성당을 갔던 것은 나에게 있어서 성당 가는 것이 그 어떤 것보다도 더 중요하였기 때문이다. 아주 어려서부터 신앙을 그 어떤 것과도 바꾸거나 흥정해서는 안 된다고 은연 중에 배웠던 모양이다. 나에게 누군가가 거창하게 신학적으로 ‘선교’를 논하라 하면 졸병 시절의 어느 겨울날에 있었던 저 케케묵은 이야기를 하고 싶다. 왜냐하면 선교의 중요한 요소가 그 안에 다 들어있기 때문이다.
제대를 하고 그 이듬해, 서울에 갈 일이 있어 육본 ‘중앙성당’을 찾았다. 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무반 졸병(후임병)들 거의 모두가 성당에 다니고 있었다. 졸병들 기압주지 않는다고 고참들한테 당하면서도 자신들에게 웃으며 대해주었던 그 사랑의 마음에 감동을 받아 성당에 다니게 되었다고 하였다. 지금도 신앙과 사랑 때문에 나를 두들겨 팬다면 나는 기꺼이 맞겠다. 맞아 죽어도 좋다. 왜냐하면 신앙과 사랑 때문에 나를 두들겨 패는 사람은 나를 패면 팰수록 성당 문을 두드리고 사랑이 무엇인지를 배워가게 되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이 세상 기준으로 우리를 두들겨 패는데, 그 사람들에게 세상 기준을 내밀면 우리도 그 사람들과 똑같아지고 만다. 신앙인인 우리는 우리의 기준이 있고, 그 기준을 끝까지 고수하여야 세상 사람들은 우리들이 자기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고, 우리의 생활 기준이 무엇인가를 서서히 깨닫게 된다.
선교라는 것은 주님 때문에 사람을 얻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런 값을 지불하지 않으면서 과연 다른 사람을 얻을 수 있겠는가? 세상에 그런 상거래는 없는 법이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을 지불할 때 다른 사람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선교는 증거이고 증거는 순교라고 말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