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미국 대통령 취임식이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취임식 현장에 참석한 참석자 수만 해도 약 200만 명이나 되었고, 1억 3천만 명이 넘는 미국 사람들이 텔레비전을 통해 생중계 되는 취임식을 시청하였다고 한다.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취임식에 관심을 보인 것이다.
취임식에 참석하거나 텔레비전을 시청한 그 많은 사람들은 세상이 변화되기를 열망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하였을 것이다.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흑인이 대통령이 된 것은 차치하고라도, 세계 경제의 심장부라고 자부하던 미국의 경제가 추락을 거듭하면서 국민들에게 안겨준 위기감을 생각하면 그런 열망은 당연하였을 것이다. 어쩌면 새로운 대통령에게 이대로는 못 살겠다는 아우성을 친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 사람이나 온 세상 사람 할 것 없이 외쳐대는 새로운 세상이란 도대체 어떤 세상일까? 세상이 변화되어야 한다는데 어떻게 변화되어 어떤 세상이 되어야 그들이 바라는 새로운 세상이 되는 것일까? 돈 없는 사람은 돈 걱정 없는 세상을 외칠 것이고, 사회적 ‘빽(배경)’이나 힘 없는 사람은 자신도 큰 소리 치며 살 수 있는 세상을 외칠 것이다. 소위 말해 춥고 배고픈 사람들은 사회가 완전히 전복되어 자신들도 기득권을 행사하며 권력과 금력을 남부럽지 않게 누리는 대접받는 세상이 새로운 세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과연 그렇게 되면 그런 세상이 새로운 세상일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어 외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예수님의 모든 말씀의 중심에는 언제나 “하느님 나라”가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복음서를 아무리 뒤적여도 하느님 나라가 무엇인지에 대해선 한 마디도 없다. 이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당시의 청중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하느님 나라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느님 나라와 전혀 다른 하느님 나라를 꿈꾸는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다.
우리에게로 시선을 돌려보자. 우리도 자주 이놈의 세상 확 뒤집혀야 한다고 외치거나, 그렇게 외치는 말을 듣곤 한다. 이놈의 세상이 자신의 구미에 맞게 변화되기를 바라고, 그런 세상이 자신이 바라는 새로운 세상이고, 그런 세상이 궁극적으로 자신 안에 꿈틀거리는 하느님 나라가 아니겠는가? 새로이 대통령에 취임한 오바마 대통령에게 물어보거나, 예수님께 물어보면 과연 어떤 대답이 나올까? 자신의 편에 서서 자신의 구미를 채워주지 않으니까 사상 초유의 지지율을 보이던 대통령도 취임식이 끝나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인기도가 뚝뚝 떨어지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사형까지 당하지 않았던가.
자기 구미에 맞게 세상이 뒤집히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던져줄 말은 결국 케네디 대통령의 취임 연설 한 구절인가 보다. “조국이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지 묻지 말고, 여러분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자문해 보십시오.”
결국 새로운 세상이 도래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부터 변화되어야 한다는 대답이야말로 최상의 대답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바라는 사람은 회개하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자신이 변화되지 않으면 아무리 새로운 세상이 도래해도 변화된 새로운 세상을 올바르게 바라볼 수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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