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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관구 대신학원 신학생들의 ‘거룩한 독서’ 영성수련기 2
한 달간의 영성수련을 마치고


박남일(바오로)|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연구과 1

2008년 12월 27일부터 2009년 1월 23일까지 동기 신학생들과 함께 했던 한티에서의 거룩한 독서 영성수련. 이 한 달의 영성수련은 실로 하느님의 은총의 비가 나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쏟아지는 시기였다.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느님이 내려주시는 그 은총의 비를 맞기 위하여 그저 두 팔을 벌리고 서있는 것뿐이었다. 실로 하느님은 그 은총의 비로, 또 당신의 사랑으로 당신을 체험하게 해주셨고, 그 말씀은 살아 움직여 나에게 다가와 말을 걸어왔으며, 나의 내면 심원한 곳까지 뚫고 들어와 나를 움직이게 하였다.

한티에 올라갈 때는 본당에서 성탄을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인지 다소 들뜬 마음으로 올라간 기억이 난다. 그리고 피정에 들어갈 때는 어떤 영성수련 과정이 계획되어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였다. 아니 일부러 알려고 하지 않았었다. 사실 경험상 어떤 피정이든 피정은 내용을 모르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영성수련. 이는 내가 잘 알지 못했던 하느님의 깊은 사랑의 심연 속으로 나를 초대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바로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내 안으로 들어오시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복음을 읽고 묵상하고 그 뜻을 이해하고 기도하는 과정에 시간을 많이 투자하였다. 한 복음말씀에 온 정신을 집중시키고 나면 한 시간을 훌쩍 넘기기 일쑤였다. 그런데 2~3일 정도 지나니 예전에 했던 것들도 생각이 나고, 말씀 속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한다는 재미도 있어서 나름대로 활기차게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차츰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거룩한 독서 방법이 세밀하지 못함을 알게 되었고, 내가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지식이나 기억에 기초한 경우가 많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복음말씀에 좀 더 깊이 들어가고자 세밀한 독서에 집중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 과정은 쉽지 않았다. 처음 일주일간은 세밀한 독서법을 익히느라 조금 힘이 들었다. 틈틈이 등산도 하면서 체력관리에도 신경을 썼다. 일주일 정도 지나니 나름대로 자신감도 붙고, 복음묵상도 잘 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첫 번째 조별 나누기 후에 나에게 변화가 찾아왔다. 조별 나누기를 하면서 느꼈던 자신감이 나를 조금씩 교만하게 하였던 것 같다. 이 정도 되었으면 좀 더 깊게 묵상할 수 있고, 복음의 깊은 뜻을 조금씩 더 알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 자리에 계속 맴도는 기분이었다. 첫 열흘 안에는 영적 위로와 체험들이 조금씩 있었는데, 그런 것마저도 없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예수님의 생애를 따라 묵상하는 영성수련 과정이 사순시기의 복음말씀 속으로 들어가자 이런 느낌들이 본격적으로 나에게 다가오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영성수련 처음부터 대침묵의 고요 속에서 보였던 사소한 나의 단점들이 내안에서 점점 커져 나를 힘들게 하였다.
자신에 대한 불만, 동기 신학생들에 대한 불만, 신부님과의 면담 속에서 이전보다 잘 못해 나가는 자신의 모습, 그리고 잡념 속에서 떠오르던 미움들이 갑자기 아무런 방어막 없이 내 안에서 커져나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급기야는 거룩한 독서를 해도 도저히 더 이상 묵상한 것을 쓸 것이 없는 상황들이 나에게 닥쳤다. 복음말씀을 읽고, 또 읽었다. 그러나 말씀은 나에게 침묵하셨다. 참으로 답답하였다. 면담 신부님은 묵상이 잘 되지 않아도 개인 일정을 바꾸거나 변경하지 말고 그대로 밀어붙이라고 충고해 주셨다.

말씀이 사순의 정점으로 다가갈수록 더욱 힘들어졌다. 말씀 속에서 위안을 얻고자 했지만, 말씀 속의 예수님은 침묵하고 계셨다. 거룩한 독서는 더 이상 진전이 없고 무언가가 내 발목을 족쇄처럼 붙잡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런 중에 말씀은 수난의 절정인 성삼일의 복음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성 금요일 수난복음을 읽던 중 작은 체험을 하게 되었다. 묵상을 하는 도중 불현듯 나의 발목을 잡고 있던 그 족쇄를 볼 수 있었다. 분명 그것은 하느님께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바로 ‘나’였다.
그 ‘나’는 나의 질투요, 교만이요, 시기요, 미움이었다. 그 ‘나’는 수난복음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는 또 다른 군중이었다. 나는 그저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모든 죄를 없애주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 받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 순간 말씀은 2000년 전 지나가버린 기억이 아니라 바로 내 앞에 살아있는 것으로 다가왔다. 그날 저녁이 되자 알 수 없는 평화가 내 마음에 가득 찼다. 그리고 자리에 누울 때는 설렘으로 가득 찼다. 내일 복음말씀 속에서 부활을 체험하게 되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 기대는 기쁨을 앞둔 자의 설렘이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이기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기쁨을 주는 부활! 이 부활은 그냥 성경 안에서가 아니라 바로 내 눈앞에서 벌어지는 사건이었다. 살면서 이토록 부활이 오기 전날 설렘과 기다림으로 잠든 적은 없었다. 다음날 창문을 젖히자 어둠속에서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새벽을 깨고 나에게 다가오는 말씀은 실로 ‘기쁜 소식’ 그 자체였다. 정말 모든 근심이 사라지고 기쁨이 충만함을 느낄 수 있었다. 부활 복음묵상 이후에 마치 처음 영성수련에 올라온 기분으로 말씀을 대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부활 복음 이후 승천과 성령 강림 복음묵상 때까지 큰 부담 없이 거룩한 독서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남은 기간들은 이러한 것들을 정리하면서 보내면 되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인간의 계획은 하느님 앞에서는 어리석은 것이었다. 내가 하느님을 체험하고 이제 이러한 마음을 차분히 정리하면 되겠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그것은 나의 생각이요 계획이었다. 참으로 하느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당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하시고야 마는 분이셨다. 내가 체험한 하느님이 바로 나만의 것이 아님을, 그것은 바로 세상에 나가 내가 전해야 하는 살아있는 말씀임을 영성수련 마지막 순간까지 나에게 말씀해 주셨다.

한티에서 내려오는 날 아침 눈이 내렸다. 새벽에 일어나 창문을 여니 세상이 눈으로 하얗게 덮여 있었다. 내리는 눈을 맞으며 하느님께 감사드렸다. 영성수련 기간 동안 내가 한 것은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준비하시는 분도 하느님이셨고 행하시는 분도 하느님이셨다. 버스를 타고 한티에서 내려오자 한 달 동안 잊고 있었던 세상이 다시 우리 눈앞에 펼쳐졌다. 그곳은 바로 우리가 살아가야 할 세상이며, 살아있는 말씀께서 함께하실 세상이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이 세상 끝까지 당신의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부족하고 보잘 것 없는 나이지만 하느님께서 함께 하실 것을 믿기에 나는 세상 속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뛰어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