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일 사순제1주일 : 마르 1,12-15
12 그 뒤에 성령께서는 곧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
13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또한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14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15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예수님은 성령의 감도로 사십일이라는 긴 기간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받으셨다. 사탄은 이때부터 예수님의 구원활동을 방해하는 적대세력으로 등장한다.(마르 1,12-13) 예수님은 성령에 힘입어 사탄의 유혹을 이겨 야수들과 함께 지내셨다. 이는 메시아가 와서 야수와 우호관계를 회복할 것이라는 예언(이사 11,6-9; 호세 2,18)을 예수님이 실현하셨음을 암시한다. 또 예수님은 사탄의 유혹을 받으시는 동안 천사들의 시중, 즉 하느님의 보호를 받으셨다. 이처럼 하느님은 광야에서 예수님과 야수들의 평화로운 공존과 당신의 보호로 구원을 베풀기 시작하셨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불행하게 하는 사탄을 이긴 다음 당신의 시대가 왔다고 여기고 하느님 왕국의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셨다.(마르 1,14-15) 하느님의 왕국은 하느님이 임금으로서 모든 사람을 다스려 이기심과 온갖 불행과 영원한 죽음에서 구원하신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가르침과 병자치유와 악마추방을 통해 하느님의 왕권이 실현되고 있다고 증명하셨다. 성령에 힘입어 자기중심주의와 현세생활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하느님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왕국에 들어간다. 성령은 인간적인 안락과 쾌락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삶의 지표로 삼으라고 우리 마음에 호소하는 그분의 힘찬 목소리이다. 이 목소리에 순응하면 현세의 삶에 집착하는 근성과 인간적인 힘에 의지하려는 유혹을 이길 수 있다.
우리는 무엇엔가, 어디엔가, 누구에겐가에 매여 산다. 자기의 기준에 따라 살면 그 기준에 매여 노예가 되고 만다. 우리를 사로잡거나 묶는 힘을 사탄이나 악마라 한다. 사탄은 날마다 우리를 유혹하고 있다. 온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온갖 선입견과 강박관념에 마음을 빼앗기기 때문에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살기 어렵다고 느낀다. 많은 사람들은 한 사람에게 매여 사는 것이 지긋지긋하다고 한다. 일상의 단조로움과 외로움에 치를 떨기도 한다. 부지불식간에 말실수나 잘못된 처신을 하여 불목과 증오심을 일으키기도 한다. 남이 잘되는 것을 보면 자기가 너무나 초라해 보이고 배가 아프고 살맛을 잃어버린다. 이 모든 현상의 원인은 우리가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 이기주의나 물질만능주의에 빠지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 마음속에, 우리 가정과 공동체와 나라에 어떠한 악마들이 활개를 치고 있는가? 물질만능주의와 이기심 때문에 하느님과 이웃을 저버리지는 않는가? “새는 가는 실에 묶여도 날지 못한다.”(십자가의 성 요한) 우리는 우리를 얽매는 모든 속박을 떨쳐버리고 자유롭게 되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려고 사탄을 이기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 평일미사에 자주 참여하고 날마다 성경을 읽으면 악마의 유혹을 이길 수 있다.
3월 8일 사순제2주일 : 마르 9,2-10
2 엿새 뒤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3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4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5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6 사실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제자들이 모두 겁에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
7 그때에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더니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8 그 순간 그들이 둘러보자 더 이상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예수님만 그들 곁에 계셨다.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10 그들은 이 말씀을 지켰다. 그러나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저희끼리 서로 물어보았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승천하여 아버지 오른쪽에 앉아 누리시는 영광을 제자들에게 미리 잠깐 보여주신 것이다. 영광스러운 변모를 통해 우리의 신앙생활이 하느님의 영광으로 장식된다고 가르치고 끝까지 믿음을 보존하라고 우리를 격려하신다. 영광은 하느님의 빛나는 현존 속에 사는 자격을 뜻한다. 천국에서 살았던 한순간은 죽음으로써 보상해도 비싼 것이 아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참여해야 예수님처럼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하게 된다. 그분의 죽음에 참여하는 방법은 자기중심주의를 버리고 하느님과 이웃을 삶의 중심으로 삼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고난을 받으면 예수님처럼 영광스럽게 변모하여 하느님의 현존 속에서 행복의 극치를 누릴 것이다. “속에 빛이 있으면 밖은 스스로 빛나는 법이다.”(A. 슈바이처) 빛이신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모시고 사는 사람의 외모는 빛나기 마련이다.
영광스럽게 변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뵙는 이들은 황홀한 체험을 하고 행복에 겨워한다. 이러한 체험을 무엇에 비유할 수 있을까? 처음 아이를 가져 진통과 산고 끝에 해산한 어머니가 아이를 키우기 위해 온갖 정성과 사랑을 다 쏟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다. 얼마 전까지도 처녀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몸속에서 새 생명이 약동하는 것을 느꼈을 때를 기억하는가? 진통과 산고를 가져다 준 아이가 엄청난 보람과 행복을 줄 것이라고 상상이라도 했는가? 아이를 낳아 처음 젖을 물렸을 때의 마음, 아이를 키우면서 맛본 기쁨을 기억하는가? 처음으로 ‘아빠’라는 말을 들었을 때 느낀 황홀한 기분을 기억하는가?
하느님과 영원히 함께 사는 것도 이와 유사할 것이다. 신앙생활의 혜택은 하느님의 왕국에서 영광스러운 하느님과 예수님과 얼굴을 맞대고 살며 그분의 사랑과 위용에 도취되어 황홀지경에서 행복의 극치를 누리는 것이다. 이처럼 엄청난 복을 누릴 희망을 가진 사람은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고난과 죽음을 겪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복이라고 여긴다.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것만큼 행복한 일은 없다.”(F.M. 도스토예프스키)
3월 16일 사순제3주일 : 요한 2,13-25
13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14 그리고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
16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하고 이르셨다.
17 그러자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라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생각났다.
18 그때에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 하고 말하였다.
19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20 유다인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
21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22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23 파스카 축제 때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는 동안, 많은 사람이 그분께서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고 그분의 이름을 믿었다.
24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신뢰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다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25 그분께는 사람에 관하여 누가 증언해 드릴 필요가 없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사람 속에 들어 있는 것까지 알고 계셨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신 첫째 동기는 당신 아버지의 집을 시장터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요한 2,16) 그분은 성전 바깥마당인 ‘이방인들의 마당’에서 소와 양을 파는 상인들을 짐승들과 함께, 환전상들을 돈과 함께 내쫓으셨다. 거룩한 예루살렘 성전 경내에 소와 양이 있었다는 것은 돈벌이에 혈안이 되어 하느님을 욕되게 하는 짓이다. 또한 환전상들은 순례자들이 성전세 반 세켈(이틀 동안의 노임)을 낼 수 있도록 로마제국의 데나리온이나 그리스의 드라크마를 합법적인 티로의 동전으로 바꿔주었는데, 환율차이로 작은 이익을 챙겼다. 예수님은 메시아로서 장사꾼들을 성전에서 쫓아냄으로써 사람들이 더럽힌 성전을 하느님이 정화하실 것이라는 예언을 실현하셨다.(예레 7,11; 즈카 14,21)
예수님은 돈벌이를 위한 수단으로 더럽혀진 성전을 정화하고 당대 사제들을 비판하셨다. 하느님과 재물을 한꺼번에 섬길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재물에 대한 집착에서 자유로워야 하느님을 섬길 수 있다. 하느님은 재물에 집착하지 않고 이기적 타산을 모르는 깨끗한 마음속에 임하시며(2티모 2,22), 이러한 마음속에 사랑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교회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면서 그분의 현존을 증명하는 탁월한 방법이다. 성체성사를 포함한 모든 예배는, 우리가 하느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사랑을 실천하여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그분의 뜻에 부합하는 참된 예배가 된다.”(마태 9,13=호세 6,6 / 박영식, ≪성경과 주요교리≫, 가톨릭신문사, 235쪽) 나무가 가장 소중한 것을 버릴 줄 알기 때문에 새 잎을 내듯, 탐욕과 이기심을 버려야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하느님의 생명을 누릴 수 있다.
예수님이 성전을 정화하신 둘째 동기는 아버지의 집인 성전을 향한 열정이 예수님을 집어삼켜버릴 것이라고 적혀 있다.(요한 2,17; 시편 69,10) 예수님은 이 열정 때문에 십자가에 돌아가셨다. 성당을 향한 열정이 내 마음속에 있는가? 성당을 자기 가정만큼 중요하게 아끼고 가꾸는가? 교회와 믿음의 형제자매들을 향한 나의 애정과 무관심은 곧 그리스도께 대한 것임을 명심해야 하겠다. 본당을 이끌고 나가는 사람들이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자기 본당이 마음이 들지 않아도 사랑과 정성과 관심을 아끼지 말자. 예수님도 인간적인 결함이 많은 우리 본당을 안타까워 하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겠다.
3월 22일 사순제4주일 : 요한 3,14-21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15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18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19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20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21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예수님은 니코데모에게 인간의 힘으로는 하느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고 성령의 힘으로 새로 태어나야 가능하다고 말씀하셨다.(요한 3,1-11)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을 베풀려고 당신을 낮추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기까지 하셨다. 예수님은 성령을 보내주어 우리 마음을 하느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사랑으로 불타게 하고 우리를 근본적으로 새로 지어내어 하느님의 생명으로 살게 해주셨다. 이처럼 우리가 새로 태어난 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성령선물에서 비롯된 복이다. 성령의 열매인 사랑과 기쁨과 열정은 하느님의 생명을 이루는 요소이다.
바다와 강은 제일 아래에 있기 때문에 모든 산골짜기의 물을 다 받는다. 높은 사람이 되기 위해 제일 낮은 자리와 뒷자리에 앉아라. 이는 노자가 <도덕경>에서 “최상의 선은 물과 같다.”라고 가르친 것이다. 사람은 자꾸 높은 데로 올라가려고 애쓰지만 결국에는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노자는 큰 힘이 있으면서도 높은 자리를 탐내지 않고 끊임없이 낮은 데로 흘러가는 물을 보고 스스로 겸손해지라고 가르쳤다. 이처럼 물은 낮은 데로 내려갈수록 시내와 강과 바다를 이루어 점점 더 커진다. 사람도 물처럼 낮은 데로 내려가 바다가 되는 지혜를 배워야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다. 예수님은 물처럼 가장 낮은 데까지 내려가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 주님이 되셨다.
하느님과 이웃 앞에서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십자가와 부활의 신비에 스며들어 죄와 영원한 죽음에서 구원되고 하느님의 생명을 누린다. 채워야 할 자리가 비천하다 하여 모든 사람이 물러서더라도 자기만은 기꺼이 내려가서 온 몸과 마음으로 그곳을 채워주는 사람이 되자. 십자가에 비하와 영광이 공존한다는 신비를 아는 사람은 세상이 춥다고 해서 누워 있지 않고, 세상이 어둡다고 해서 외면하지 않고, 가난하다고 해서 웅크리지 않으며, 지금 사랑하기가 어렵다고 해서 포기하지 않는다. 인생의 짐이 아무리 무거워도 꿋꿋하게 걸어가는 사람은 사랑과 희망의 빛을 비추며 절망 속에 희망을, 갈등 속에 화해를, 불행 속에 행운을, 슬픔 가운데 기쁨을, 증오 속에 사랑을 찾아낸다.
3월 29일 사순제5주일 : 요한 12,20-33
20 축제 때에 예배를 드리러 올라온 이들 가운데 그리스 사람도 몇 명 있었다.
21 그들은 갈릴래아의 벳사이다 출신 필립보에게 다가가, “선생님, 예수님을 뵙고 싶습니다.” 하고 청하였다.
22 필립보가 안드레아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아와 필립보가 예수님께 가서 말씀드리자,
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25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26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27 “이제 제 마음이 산란합니다.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합니까? ‘아버지, 이때를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 하고 말할까요? 그러나 저는 바로 이때를 위하여 온 것입니다.
28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 그러자 하늘에서 “나는 이미 그것을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겠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29 그곳에 서 있다가 이 소리를 들은 군중은 천둥이 울렸다고 하였다. 그러나 “천사가 저분에게 말하였다.” 하는 이들도 있었다.
30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그 소리는 내가 아니라 너희를 위하여 내린 것이다.
31 이제 이 세상은 심판을 받는다. 이제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밖으로 쫓겨날 것이다.
32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
33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으로, 당신께서 어떻게 죽임을 당하실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다.
예수님은 과월절이 가까이 오자 예루살렘으로 와서 성전 경내 ‘이방인들의 마당’에 서 계셨다. 그때 과월절을 지내러 온 이들 중 몇몇 그리스인들이 안드레아와 필립보에게 예수님을 뵙기를 원한다고 말했다.(요한 12,20-21) 그러자 예수님은 당신이 이 십자가에 들어 올려져 영광스럽게 되고 모든 사람을 당신 주위로 모아 하느님의 생명을 베푸실 때, 그리스인들처럼 당신의 우리에 속하지 않은 양들을 위해서도 목숨을 바치실 때가 왔다고 여기셨다. 예수님이 영광스럽게 되실 때, 즉 하느님의 현존 속에 계실 때는 밀알처럼 목숨을 바쳐 많은 열매를 맺으시는 때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때이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이 비유의 핵심은 예수님이 이방인들의 ‘회개’라는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 반드시 목숨을 바치셔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법칙이다. 제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어버리고, 예수님을 사랑하기 위해 제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다. 하느님은 예수님의 죽음, 부활과 승천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심으로써 밀알처럼 당신을 희생하신 예수님을 부활시키고 영원한 생명의 열매를 맺게 하셨다. 그분의 부활은 십자가상 죽음이 하느님께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길임을 증명한다.
초원에 불을 지르면 폐허 위에 이전보다 더 강한 생명이 솟아오르듯, 죽음은 더 강인한 생명을 얻기 위한 방법이다. 밀알 하나가 썩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자연법칙은 창조주의 권능을 드러낸다. 이러한 자연법칙처럼 사람도 자기를 버려야 살 수 있다. 고통의 지불 없이는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고 또 아무것도 끝나지 않는다. 우리는 어머니의 진통과 산고, 다른 이의 고통 속에서 태어났고 우리 자신의 고통 속에서 살다 죽기 때문이다. 이처럼 생명은 고통과 죽음에서 태어난다. 이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서 드러난 신비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 시련과 죽음의 위험에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자신을 하느님께 맡긴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은 시련을 없애주고 평탄한 삶을 살게 하는 데 있지 않고 시련을 이겨낼 힘을 주시는 데서 드러난다. 그러므로 나에게 시련을 가져다주시는 하느님이나 이웃은 나를 강하게 만들고 행복하게 해주는 은인이기도 하다. 사랑의 길이 꽃길이 아니라 고행의 길임은 우리가 체험하는 사랑의 본질이다. 사랑의 고통은 다른 모든 쾌락보다 훨씬 감미로울 수 있다. “여러분이 타인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한, 삶은 헛되지 않습니다.”(헬렌 켈러)
* 박영식(야고보) 신부는 1976년 사제서품 후, 1978년 로마 유학, 1982년 로마 교황청직속 성서대학(Pontifical Biblical Institute)에서 석사학위(S.S.L.)를 취득, 1990년 같은 대학에서 성서학 박사학위(S.S.D.)를 받으셨습니다. 현재 복현성당 주임신부로 사목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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