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5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 마르 15,1-39
1 아침이 되자 수석 사제들은 곧바로 원로들과 율법 학자들, 곧 온 최고 의회와 의논한 끝에, 예수님을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겼다.
2 빌라도가 예수님께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 하고 묻자, 그분께서 “네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하고 대답하셨다.
3 그러자 수석 사제들이 여러 가지로 예수님을 고소하였다.
4 빌라도가 다시 예수님께, “당신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소? 보시오, 저들이 당신을 갖가지로 고소하고 있지 않소?” 하고 물었으나,
5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빌라도는 이상하게 여겼다.
6 빌라도는 축제 때마다 사람들이 요구하는 죄수 하나를 풀어 주곤 하였다.
7 마침 바라빠라고 하는 사람이 반란 때에 살인을 저지른 반란군들과 함께 감옥에 있었다.
8 그래서 군중은 올라가 자기들에게 해 오던 대로 해 달라고 요청하기 시작하였다.
9 빌라도가 그들에게 “유다인들의 임금을 풀어 주기를 바라는 것이오?” 하고 물었다.
10 그는 수석 사제들이 예수님을 시기하여 자기에게 넘겼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11 그러나 수석 사제들은 군중을 부추겨 그분이 아니라 바라빠를 풀어 달라고 청하게 하였다.
12 빌라도가 다시 그들에게, “그러면 여러분이 유다인들의 임금이라고 부르는 이 사람은 어떻게 하기를 바라는 것이오?” 하고 물었다.
13 그러자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하고 거듭 소리 질렀다.
14 빌라도가 그들에게 “도대체 그가 무슨 나쁜 짓을 하였다는 말이오?” 하자, 그들은 더욱 큰 소리로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하고 외쳤다.
15 그리하여 빌라도는 군중을 만족시키려고, 바라빠를 풀어 주고 예수님을 채찍질하게 한 다음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넘겨주었다.
16 군사들은 예수님을 뜰 안으로 끌고 갔다. 그곳은 총독 관저였다. 그들은 온 부대를 집합시킨 다음,
17 그분께 자주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머리에 씌우고서는,
18 “유다인들의 임금님, 만세!” 하며 인사하기 시작하였다.
19 또 갈대로 그분의 머리를 때리고 침을 뱉고서는, 무릎을 꿇고 엎드려 예수님께 절하였다.
20 그렇게 예수님을 조롱하고 나서 자주색 옷을 벗기고 그분의 겉옷을 입혔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러 끌고 나갔다.
21 그들은 지나가는 어떤 사람에게 강제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게 하였다. 그는 키레네 사람 시몬으로서 알렉산드로스와 루포스의 아버지였는데, 시골에서 올라오는 길이었다.
22 그들은 예수님을 골고타라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이는 번역하면 ‘해골 터’라는 뜻이다.
23 그들이 몰약을 탄 포도주를 예수님께 건넸지만 그분께서는 받지 않으셨다.
24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러고 나서 그분의 겉옷을 나누어 가졌는데 누가 무엇을 차지할지 제비를 뽑아 결정하였다.
25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때는 아침 아홉 시였다.
26 그분의 죄명 패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라고 쓰여 있었다.
27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강도 둘을 십자가에 못 박았는데, 하나는 오른쪽에 다른 하나는 왼쪽에 못 박았다.
28 그리하여 ‘그는 죄인들 가운데 하나로 헤아려졌다.’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다.
29 지나가는 자들이 머리를 흔들며 그분을 이렇게 모독하였다. “저런! 성전을 허물고 사흘 안에 다시 짓겠다더니.
30 십자가에서 내려와 너 자신이나 구해 보아라.”
31 수석 사제들도 이런 식으로 율법 학자들과 함께 조롱하며 서로 말하였다. “다른 이들은 구원하였으면서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군.
32 우리가 보고 믿게, 이스라엘의 임금 메시아는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그분께 비아냥거렸다.
33 낮 열두 시가 되자 어둠이 온 땅에 덮여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
34 오후 세 시에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하고 부르짖으셨다. 이는 번역하면,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뜻이다.
35 곁에 서 있던 자들 가운데 몇이 이 말씀을 듣고, “저것 봐! 엘리야를 부르네.” 하고 말하였다.
36 그러자 어떤 사람이 달려가서 해면을 신 포도주에 적신 다음, 갈대에 꽂아 예수님께 마시라고 갖다 대며, “자,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 주나 봅시다.” 하고 말하였다.
37 예수님께서는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을 거두셨다.
38 그때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졌다.
39 그리고 예수님을 마주 보고 서 있던 백인대장이 그분께서 그렇게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하고 말하였다.
모든 이야기는 흐름이 있습니다. 누가 무엇을 원하는 것으로, 혹은 해야만 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원하는 일이, 혹은 해야만 하는 일이 주어진 후, 우리는 이야기 속에서 그 일들이 어떻게 이루어질까 따져보아야 합니다. 충분한 능력과 지식을 겸비한 등장인물을 찾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등장인물이 만들어 내는 일의 완성을 살펴볼 것입니다. 그런 다음 우리는 이야기의 끝을 평가합니다. 이야기가 기쁜 것이었는지, 슬픈 것이었는지, 그 이야기의 바람이 옳은 것이었는지를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누가 그 죽음을 원했습니까, 누가 그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이루어져야만 하는 것으로 만들었습니까? 15장 1절에서 5절에 그 답이 있습니다. 원로들과 율법학자들을 등에 업은 수석사제들은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깁니다.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의도가 실행으로 옮겨집니다. ‘왜?’라는 질문에는 그 어떠한 대답도 없습니다. 다만 죽이고자 하는 의도만이 가득합니다. 11절에는 군중들까지 부추기는 수석 사제들을 봅니다. 어떻게든 죽음의 올가미를 예수님께 씌우려 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봅니다. 수석사제들은 예수님을 죽일 능력도, 어떻게 죽일 계획도 없습니다. 단지 예수님의 죽음을 바랄 뿐입니다. 왜, 무엇을 위해, 어떻게….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무능함만을 보이고 있음에도 예수님의 죽음의 행보는 수석사제들에 의해 자꾸만 자꾸만 계속됩니다.
15장 34절을 봅시다. 예수님의 첫 번째 반응입니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놀라운 부르짖음 입니다. 그렇게 당신을 죽이려든 수석사제들에게는 그 어떤 말씀도 없으시더니, 하느님께 당신의 고통을 부르짖습니다. 하느님의 버리심이 예수님에게는 당신의 죽음의 이유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위해 예수님은 당신의 목숨을 바치십니다. 바로 하느님 그분 때문에 예수님은 당신을 온전히 바치십니다.
수석사제들이 만들어 낸 죽음의 이야기는 예수님에게 있어 아무런 흥미를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수석사제들의 이야기는 죽음을 만들어 내어서 예수님이 사라져 버리기만을 바랍니다. 반면 예수님의 이야기는 하느님을 향해 있습니다. 하느님에게 왜 나를 버리시냐고 울부짖습니다. 한쪽은 관계를 죽음으로 단절하려 하고, 또 한쪽은 죽음을 통해 하느님을 찾고 있습니다.
수석사제들의 의도대로 예수님은 죽으셨습니다. 무덤에 갇히셨습니다. 그들의 이야기, 곧 죽음의 이야기는 완성되었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이야기, 예수님의 이야기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분은 죽으셨지만, 그분을 보면서 터져 나온 말 한마디가 있습니다. 39절을 봅시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예수님의 이야기는 당신을 죽음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하느님을 생각하게 하고, 그 하느님의 아들이 예수님임을 고백하는 이야기로 연결됩니다.
지금 우리 역시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을 만나고, 고백하고 신앙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그분의 죽음으로, 그분의 죽음 너머, 그리고 그분의 죽음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되뇌입니다. 바로 하느님께 나아가기 위해서 말입니다….
4월 12일 예수 부활 대축일 : 요한 20,1-9
1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2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3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4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5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6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7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8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9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의 사건을 직접 목격한 이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부활하셨음을 외칩니다. “부활 축하합니다, 부활 축하합니다….”
무덤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신기하게도 예수님의 부활은 무덤 이야기로부터 출발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본 것은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곤 제자들에게 달려갑니다. 주님을 누가 다른 데에 모셨다고 말합니다. 돌이 치워져 있었다는 사실이 주님이 다른 데에 옮겨졌다는 것을 증명해 줄 수는 없습니다. 가정일 수 있고, 추측일 수 있고, 더 좋은 말로 표현해서 신앙일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한 제자는 달려갑니다. 주님을 보러 가겠다는 마음일지, 무덤이 온전치 못하니 돌을 다시 제자리로 옮겨놓을 속셈인지 아무도 모를 일입니다. 무덤에 다다른 후 그들이 한 것은 아마포가 놓여져 있고 예수님의 얼굴을 감쌌던 수건을 본 것 외에는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8절을 아주 유심히 봅시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이 짧은 말마디 안에서 우리는 이야기의 ‘흐름’을 읽어냅니다. 보는 것에서 믿는 것으로 하나의 이야기가 이 짧은 말마디 안에 놓여져 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치워져 있던 돌을 보고 주님이 어디 계실 것인가에 대한 물음을 던졌습니다. 베드로를 포함한 두 제자는 아마포와 얼굴 수건을 보고 주님의 부활을 믿었습니다.
수없이 우리는 많은 것을 보고 살아갑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오늘, 우리들 눈에는 기쁜 일도 보일 수 있겠지만, 어렵고 힘든 일이 더 많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경제가 힘들고, 정치가 엉망이고, 인심이 사나워지는 세상사 안에 힘든 일을 더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외칩니다.
“부활 축하합니다, 부활 축하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2000년 가까운 옛날 우리네 세상에서 이루어진 하나의 사건입니다. 그러나 부활 사건을 직접 본 이는 마리아 막달레나도, 베드로도 그 어떤 제자도 아닙니다. 그들이 본 것은 빈 무덤일 뿐입니다. 부활의 기쁨을 외칠 수 있는 것은 보여지는 사건 때문에가 아니라 보여지는 것 너머에 있는 우리네의 신앙 고백으로부터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안에서 부활의 사건은 어제의 일이 아닌 바로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 던져지는 하나의 신앙의 선포입니다. 그 어떤 것을 보던 간에, 그 어떤 어려움을 보던 간에 굳건한 신앙으로 부활을 살아가도록 합시다. … 힘을 냅시다. 주님이 부활하셨습니다.
4월 19일 부활 제2주일 , 하느님의 자비 주일 : 요한 20,19-31
19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2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24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25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28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29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30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31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무서워 방 안에 웅크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곳은 부활의 기쁨이 가득한 방이 아니라 두려움으로 점철된 스산한 방입니다. 먼저 제자들이 기뻐야 할 텐데, 제자들이 부활한 예수님을 만나서 흥겨워야 할 텐데…. 그들이 힘없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으니 보기에 딱한 노릇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쁨을 줍니다.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제자들에게 보여주고, 평화의 인사를 건네십니다. 그것을 본 제자들은 주님을 만난 기쁨에 어쩔 줄 모릅니다. 평화와 기쁨, 바로 부활한 예수님을 만나는 제자들에게 건네어진 하나의 선물입니다.
더 이상 두려움을 느끼는 제자는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을 다시 뵈었기에 신이 난 제자들을 우리는 발견합니다. 마음이 흥겨우니 그냥 있을 수는 없겠지요. 이 기쁨을 어떻게든 나누어야 할 텐데, 바로 이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세상으로 나가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 사람서리에, 사람들과 똑같이 오신 것처럼 제자들도 우리네 세상 안에 온전히 하나 되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용서’라는 말마디에 주목합시다. 서로 보듬어주고, 서로 아껴주고, 서로의 잘잘못을 하느님의 자비로 보듬어 주자는 말입니다.
24절 이후에 토마스의 불신앙에 대해서 우리는 보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다시금 똑같은 모습으로 토마스에게 나타나 똑같은 인사로 토마스를 만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주님의 말씀이 저의 마음을 후벼 파는 듯합니다. 사실 관계를 따져보고, 합리적이다, 과학적이다 외치면서 어떻게든 옳고 그름을 자로 잰듯 따지려는 완고한 저의 마음을 탓하시는 것 같아서 가슴이 뜨끔함을 느낍니다.
세상에 나가서 용서하라 말씀하신 주님이십니다. 세상에 나가서 정의의 칼만 휘둘러 사람들의 못난 점을 시시콜콜 따지기 이전에 보다 큰마음, 보다 넓은 마음을 가지고 따뜻이 이 세상을 느껴보라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실상 요한의 복음서가 우리에게 전해진 이유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려야 할 신앙인입니다. 세상을 탓하고, 세상을 원망하며 나 혼자 의인인척 방구석에 처박혀 살 사람들이 아닙니다. 아프고, 못나고, 그래서 보잘 것 없는 세상이라도 그 세상을 살려내어 건강하고 예쁘고 살기 좋은 세상으로 만들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4월 26일 부활 제3주일 : 루카 24,35-48
35 그들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36 그들이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에 서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37 그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
3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39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
4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그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 주셨다.
41 그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42 그들이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리자,
43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받아 그들 앞에서 잡수셨다.
44 그리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
45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
46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47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48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지난 주에 이어 또다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이야기를 루카의 시선으로 만나게 됩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라는 예수님의 인사말에 제자들은 오히려 무서움을 느끼고, 유령을 만난 줄로 여깁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제자들이 기쁨의 반응을 처음으로 보였지만, 루카에서는 첫 반응이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의 원인은 의혹입니다. 살과 뼈를 가지고 지금 내 눈앞에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의혹, 내 눈이 보는 것에 대한 의혹입니다. 내 눈에 대한 크나큰 신뢰는 내 마음에 대한 끝없는 불신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기쁨 가운데에서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합니다. 그들 앞에서 물고기 한 토막을 잡수시는 예수님, 그 생생한 장면을 보게 되어도 어쩌면 제자들의 반응은 의혹 반, 놀라움 반, 그래서 그들의 신앙에의 길은 멀고도 먼 것입니다. 루카 복음서에서는 ‘그들이 믿었다.’라는 표현이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불행히도….
루카는 이쯤에서 이야기의 흐름을 바꾸어봅니다. 부활한 예수님을 만난 것으로 끝을 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성경의 말씀을 통해 제자들을 깨닫게 하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루카는 전하고 있습니다. 어떤 성경들입니까?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 그리고 시편, 구약성경의 대부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성경들입니다. 그 성경의 말씀들이 모두 당신의 부활사건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말씀의 완성이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고 또한 말씀하십니다.
답답한 것은 예수님의 이러한 가르침의 증인이 바로 의혹 가득하고 믿음 약한 제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증인은 어떠한 사건, 사실을 곧이곧대로 옮겨놓는 이들이 아닙니다. 그 사건, 사실을 자신의 확신과 믿음으로 재해석하고 재탄생시켜야 할 사람입니다. 확신과 믿음 없이는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도무지 증인으로서 부족함 투성인 듯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또 다른 대책을 마련하십니다. 제자들의 부족함을 하느님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 곧 성령을 통해 채워줄 것임을 약속하십니다.
루카복음으로 본 예수님의 나타남, 단순히 부활을 증명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우리네 인간들이 확신을 갖고, 믿음을 갖고 세상에 나아가 선포되기를 지향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선포해야 할 제자들부터 성경의 내용으로 가르치고, 성령의 오심으로 더욱 무장시키는 것입니다. 말씀을 깨닫고 성령을 등에 업었으니, 못할 이유가 없지요. 선포를 하지 않은 채 안주할 이유가 도무지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 너머에, 루카복음은 믿음의 증인을 만들어 냅니다.
부활시기를 살아가는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의 부활 사건에만 머물러 진짜일까, 가짜일까를 따지며 의혹에 사로잡혀 있습니까? 아니면 그 부활의 기쁨을 세상과 나누기 위해 세상에 다가가 세상의 회개를 위해 살아가고 있습니까? 부활의 사건은 세상을 만나는 출발점이지, 우리 신앙의 종착점이 아님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각자가 세상에서 믿음 가득한 신앙인으로 다시 태어날 그 탄생의 첫 순간임을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인사, ‘평화가 너희와 함께!’… 이 말을 서로서로 건네면서 서로의 아픔을 용서로, 생명으로 승화시키는 우리네 삶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 박병규(요한 보스코) 신부는 5대리구 청년담당 사목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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