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아이가 “신부님, 안구 쓰나미가 뭔 줄 알아요?”라고 묻고는, ‘신부님은 절대 모르실 걸!’하는 눈치였다. 그리고선 중학생들이 즐겨 사용하는 ‘언어(은어)들’을 줄줄 엮어낸다. ‘지못미’에다가 ‘바나나 먹으면 바나(반하)나요?’ 등등. 아이와 목욕탕 같이 갈 때까지만 말이 통한다는 어른들의 넋두리가 실감난다.
보좌신부 시절 종교선생을 하였던 기억이 새롭다. 종교에 별 관심도 없던 학생들이 신부가 복도에 들어서면 짓궂게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기도합시다!”라며 신부를 놀리기도 하였다. 그 학생들과 친해지기 위해 ‘공주’, ‘백설 공주’ 등을 일삼아 외우곤 하던 그 시절이 새롭다.
교구설정 100주년을 맞아 제2차 교구 시노드를 준비하며 시노드 주제를 무엇으로 하면 좋겠느냐는 물음에 각계각층에서 “젊은이 사목”을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로 꼽았다. 젊은이들을 위한 사목이 교회의 미래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젊은이 문제가 중요한 문제라고 말하는 이 주제야말로 진부할 대로 진부한 주제에 속할 것이다. 툭하면 내뱉는 주제이니까.
그렇게도 관심을 기울이는 이 분야가 왜 이렇게도 꼬이기만 하는 것일까? 아이러니 하게도 우리나라 청소년 문제의 발단은 거의 대부분이 부모의 지나친 자녀사랑에서 기인하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과한 것은 모자람보다 못하다는 말처럼, 사실 자녀교육엔 사랑과 지혜가 겸비되어야 한다. 자녀교육에 있어서 만큼은 사랑이 관심이라고 한다면, 지혜는 과욕을 부리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한 어머니의 고백이다. 자신은 남편을 여의고 오로지 외아들 교육에만 매달렸고, 아이는 중학생 때 전교 10등 안에 들어갈 만큼 공부를 잘하였다고 한다. 그러자 욕심이 생겨 수성구로 이사를 하게 되었고, 아들은 수성구에 있는 명문(?) 고등학교에 입학을 하였는데, 그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고뭉치가 되었다며, 결국엔 자신의 욕심이 아들을 망쳐놓았다고…. 그땐 그것이 아이를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면 그것은 아들을 너무도 몰랐던 한낱 빗나간 엄마의 욕심이었다고….
과연 어떤 못난 한 어머니의 체험담에 불과할까? 미군부대 안에 있는 학교에 자식을 입학시키기 위해 엄청난 돈을 주고 가짜 입양까지 시킨다는 뉴스는 그 사람들만의 이야기일까? 부모의 욕심이야 자녀가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일 뿐인데, 자녀가 잘 된다는 그 기준이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부모의 생각대로, 부모의 욕심대로 자녀를 형성시키겠다는 것은 아닌지?
정신 좀 차리고 제발 하느님의 마음을 배우면 참 좋겠는데…. 그분이 지향한 교육학은 눈높이 교육학이다. 눈높이 교육이란 ‘나’ 중심에서가 아니라, ‘너’ 중심에서 먼저 생각하는 것이다. 이 눈높이 교육을 엉망으로 망쳐놓는 것은 그렇게도 자녀를 사랑하고 위하는 부모들의 지나친 욕심 때문이라고 말하면 과한 말일까? 청소년들이 견디다 못해 대형 사고를 치는 것은 오로지 사회적 환경 탓이기만 할까?
젊은이 사목이라는 말만 들어도 머리가 아프다. 하지만 너무나 어리석은 제안 하나 하고 싶다. 청소년 사목의 중심에는 청소년이 자리하고 있도록 해야 한다고! 그러기 위해 청소년이 아닌 사람들은 가장 먼저 청소년과 눈높이부터 제발 맞추어 달라고 간청하고 싶다. 요즘 “니나 잘하세요!”라는 말이 유행한다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