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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독서에 따른 주일복음 묵상
거룩한 독서에 따른 주일복음 묵상


심탁 신부

부활 제4주일, 성소주일(5월 3일)  
요한 10,11-16

11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12 삯꾼은 목자가 아니고 양도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 그러면 이리는 양들을 물어 가고 양 떼를 흩어 버린다.  13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14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15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  16 그러나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것이다.


1. 태도 : 착한 목자는 양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 놓는다.
착한 목자는 자기 목숨을 대가로 내놓는다. 양들이 위기에 처하면, 자기 목숨도 아끼지 않고, 양들을 살리기 위해 헌신하고 투신한다는 말씀이다. 첫째, 여기서 우리는 착한 목자의 한없는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어떤 위기에 처한 양들을 위해 목자가 목숨을 건 투쟁으로 그들을 살렸다면, 양들은 그 목자를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예수님은 착한 목자의 사랑을 우리에게 고백하신다. 둘째, 나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거는 존재가 있다면, 반대로 나는 그를 위해 목숨을 걸 수 있다. 나는 그의 사랑에 감동할 것이고 그의 사랑에 응답할 것이며, 그가 하는 모든 말을 믿을 것이다. 나는 그의 비전과 열정 등을 전폭적으로 따를 것이며, 심지어 그가 나에게  채찍을 들어도 나를 살리기 위한 사랑의 매로 받아들일 것이다.
우리가 받는 사랑이 이러한 줄을 깨닫지 못하고, 체험하지 못하는 신앙의 현실이 가슴 아프다. 일방적인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면, 더 이상 사랑의 메아리가 울려 퍼지지 않는다. 목숨 거는 사랑이 아니면, 속속들이 병든 이 세상에서 휘둘리는 우리 인생을 구제할 방법이 도무지 없다. 하물며 하느님의 아드님이 신적인 당신의 존재 가치를 투자하신다면, 그 무엇을 구원할 수 있으랴. 세상 사람들은 ‘돈’ 때문에 힘들어하며, ‘경제’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말한다. 그리고 서로 경쟁관계로 살아, 인간미는 너무 많이 상실되어 있다. 바로 이와 같은 세상에 ‘착한 목자의 목숨 거는 사랑’이 있다면, 세상은 이미 살 만한 곳이다. 나 비록 가진 것 없어도, 누군가가 나를 위해 목숨을 걸고 사랑하며 지키고자 한다면, 그 인생은 얼마나 살 맛 날까? 그가 하는 일은 얼마나 즐거울까? 그 인생은 얼마나 행복할까?
만약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삯꾼들과 사기꾼들이 많은 세상이라면1), 그럴수록 더욱 이런 착한 목자의 사랑이 필요하다. 나에게 바로 그런 사랑이 필요하다. 동시에 내 주위의 모든 사람에게…. 이웃들은 사랑의 결핍 속에서, 나와 함께 이웃하며 산다. 나는 누구에게 이웃이 되어 줄 수 있을까? 착한 목자의 목숨 거는 사랑으로…?  

2. 관계 - 소속과 정체성 : 양들은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한 목자 아래 양떼가 된다.
양들은 목자로 인하여, 먹고 마시며 생존하고, 안정된 틀 안에서 자고 깨어난다. 양들은 목자의 보호로 위기로부터 구제된다. 이런 생활 속의 경험들을 통하여 양들은 목자를 알아가며, 그의 존재와 그의 삶의 지침과 생활 방식을 배우고 익힌다. 삯꾼들은 자신의 이익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지만(요한10,12-13), 그와는 달리 나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는 착한 목자에게서는 사랑을 느끼고 존경심이 우러난다. 그를 보면 마냥 좋고, 어디든 그를 뒤따른다. 혹시 길을 잃을지라도 착한 목자의 음성이나 부르는 소리가 들리면, 즉시 그곳을 향하게 된다. 착한 목자는 내 이름을 지어 불러주고, 항상 나의 이름을 불러 서로 소통하며 함께 살아간다. 이것이 양들과 목자 간에 ‘서로 아는 사이’라는 증거다. 양들은 목자가 아닌 낯선 사람이 혹시 자신의 이름을 불러도, 그를 뒤따르지 않는다. 일단 목숨을 걸고 자신을 지켜주고 사랑하며 돌봐주던 그 목자(牧者)라면 몰라도, 양들은 오히려 경계하거나 무시한다. ‘목자가 양들을 아는 것’과 ‘양들이 목자를 아는 것’이 같은 차원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목자와 양의 아는 사이’와 ‘아버지와 아드님이 서로 아시는 사이’에 서로 일치하는 점이 있음을 말씀하신다.
위의 두 가지 차원의 ‘아는 사이’에 몇 가지 주목할 점들이 있다. 첫째, ‘상호 간에 소통’이 살아있다. 목자와 양들이 서로를 알아보고 의사소통이 된다.

1) 수직적 소통이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소통이 된다는 의미이다. 그런가 하면 그 ‘소통과 앎’은 하느님 아버지와 아드님 사이의 것과 상통한다.

2) 단순히 일방적인 주종의 관계가 아니라 상호간에 주고받는 인격적 관계의 소통이다. 무엇보다도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온 ‘눈높이 소통’이거나, 아래로부터 시작하는 ‘봉사적 소통’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둘째, 양들이 목자와 ‘서로 아는 사이’라는 점은, 하느님 부자관계의 ‘대내적 소통’에 비교될 정도로 격이 높다. ‘하느님의 부자 관계 및 소통’이 예수님과 양들의 ‘관계와 소통’의 원형(原型)이다. ‘부자간의 사랑’의 내용은 ‘양들을 목숨을 바쳐 사랑하시는 그런 사랑’으로 표현된다. 셋째, 목자가 양들을 위해 목숨을 거는 만큼, 양들도 목자를 목숨을 걸고 따른다. 목숨을 걸고 자신을 돌보는 목자를, 양들은 심지어 죽음의 위험을 만나더라도 그 목자를 믿고 그를 뒤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목자의 곁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3. 사명 : “나는 양들을 위하여 내 목숨을 내놓습니다. 우리 안에 있지 않은 다른 양들도 데려와야 합니다. 그들 역시 내 목소리를 들을 것이고 한 목자에 한 양떼가 될 것입니다.”

1) 우리 밖에 있는 양들도 목자의 양들이다. 예수님의 비전은 우리 밖의 양들을 향하여서도 열려 있다. 착한 목자는 우리 밖의 양들을 위해서도 목숨을 바치신다. 인간의 이기적인 마음은 나 혼자만의 사랑을 원한다. 그러나 우리 목자 예수님은 ‘우리(We)’라는 ‘울타리’를 넘어서까지 당신의 사랑으로 목숨을 바치신다. 이방인들을 포함하여 미래지향적인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예수님의 비전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사명이며 목적이다.

2) 예수님께는 당신의 목숨을 내 놓을 수 있는 ‘자유와 권한’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명령으로서 ‘예수님의 사명’이다. 이것은 더 나아가서 영원한 생명을 지향한다. 예수님께서 ‘목숨을 다시 얻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요한 10,17) 예수님께서 당신의 생명을 내어놓고 다시 얻는 방법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몸소 보여 주시는 것이다.


각주
1) 캐빈 리먼 & 윌리엄 팬택. ≪양치기 리더십≫ 김영사(2005년 1쇄, 2008년 14쇄), 67-82 (양치기의 원칙 4 : 목장을 안전한 곳으로 만들어라.)

 

 

부활 제5주일(5월 10일)
요한 15,1-5

1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2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3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4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1. 열매를 맺는 법을 배우라.
첫째 방법 : 예수님에게 붙어 있어라. 그러면 열매(το καρπου, 카르폰)를 맺는다.(15,2) 나무에는 뿌리가 있다. 비록 땅 아래 있어 보이지는 않지만, 뿌리에 붙어 있지 않은 줄기나 가지는 살아 있을 수가 없다. 당연히 그 어떤 열매도 나무의 뿌리와 근본적-존재론적 연관성을 띤다. 그리스도인의 열매는 예수 그리스도께 붙어 있음으로써 맺을 수 있다. 자칫 자신의 노력만으로 맺는 성과를 추구하거나 자신의 열매가 본래 자신의 것인 양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열매 맺는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근본을 지향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모든 분야-신앙, 건강, 운동, 학문, 예술 등등-에서 기초가 중요하듯, 성공적이고 성취하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기본, 근본 혹은 뿌리 되는 것에 집중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는 신앙인의 근본이며 전부이다.
둘째 방법 : 하느님의 손길에 자신을 맡겨라. 그러면 더 많은 열매를 맺는다. 성경에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15,2 : “하느님께서는…열매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 일차적으로 예수님께 붙어있으면서 열매를 맺으면, 이차적으로 하느님께서 손질해 주셔서 그는 깨끗해져서, 더 많은 열매를 맺는다. 즉 열매를 맺되, 풍성하게 열매 맺는 방법이 제시된다.
인생을 풍요롭게 살고 싶다. 나 자신을 위해서도 이웃을 위해서도 그러하다. 물질적 풍요만이 아니라, 영적이고 내적인 풍요로움 역시 마찬가지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열매 맺자. 그러면 아버지께서는 더욱 풍요롭게 열매를 맺어주신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며 계약이다.(창세 12장 ; 15장 ; 17장 참조)
셋째 방법 : 예수님의 말씀으로 깨끗하게 되라. 그러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 15,3 : 내가 너희에게 (말)한 (그) 말을 통하여 δια τον λογον(로고스)2) 너희는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 (하느님의 손질로 깨끗해진 가지처럼) 예수님의 말씀 역시 포도나무 가지를 깨끗하게 다듬어 주신다. 그리되면, 그 나무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위의 세 가지(예수님께 붙어 있기, 하느님의 손질을 받기,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를 종합하자. 첫째 예수님 안에 머물며, 둘째 그분의 말씀을 듣고 열매를 맺으며, 셋째 하느님의 손길에 자신을 맡기면, 가장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

2. 성취하는 삶을 살아라.(요한 15,7)
15,7 :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들 τα ρηματα(레마타)3)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예수님 안에 머무르기’와 ‘예수님 말씀을 듣고 간직하기’의 조건을 채우면, 그 사람이 청하는 모든 소원은 성취될 수 있다. 이와 같은 소원성취는 정당한 하느님의 축복이다. 이는 기복신앙과 구별된다. 현대인들은 기복적인 신앙생활을 반성하되, <주님 (현존) 안에 머무르기>와 <주님의 말씀을 의미와 행동으로 체화하기>를 기준으로 가져야 할 것이다. 이것은 또한 기복신앙의 위험을 극복하는 성취적 축복 생활의 지름길이다. ‘말씀들(레마타)’은 하느님의 일방적인 말씀선포와 가르침 외에도, 말씀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신앙고백적 총체적 응답까지를 포함한다. 신앙체험과 봉헌과 헌신 등이 포함된 말씀들(레마타)을 간직하는 것이야말로 신명나는 참 신앙으로 발전하는 핵심원리이며, 자연스럽게  기복신앙을 극복하는 비결이다.

3. 아버지께 영광을 드려라. (직역 = 이것으로 나의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셨다. : 15,8)
위의 과정을 단계별로 이루면, 그것은 궁극적으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한 것이다. 제1단계 : 주님 안에 머물러라.4) 제2단계 : 말씀을 간직하고 말씀대로 살아라. 제3단계 : 소원을 빌어 성취하라. → 그것이 이미 하느님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한 것이다.

4. 아버지께 되돌려진 영광은 사람들에게 되돌아온다!
아버지께서 받으신 영광은 다시 사람들에게 되돌려져 그 혜택을 본다. 그 영광을 입은 사람들은 주 예수님 안에 열매 맺고, 주님의 제자가 된다. 그리스어 성경의 원문에 따르면, 아버지께서 영광되심은 다시금 사람들이 예수님 안에서 열매 맺고, 제자가 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15,8 εν τουτω εδοξασθη ο πατηρ μου ιυα καρπου πολιυ φερητε καιγευηθε εμοι μαθηται. (이것으로 나의 아버지께서는 영광을 받으셨다. 그것은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한 너희가 나에게 제자들이 되게 하기 위한 것이다.)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자, 그 영광을 자신이 입으리라!

각주
2) ο λογοζ (로고스) 1. 말하기, (문맥에 따라서 다양하게 쓰이는) 표현, 결정적인 내용 진술 혹은 선언, 문제되는 주제나 사건, 글이나 말로된 표현, 하느님의 계시(말씀, 명령, 위임) ; 2. 계산, 설명, 이유, 동기 ; 3. 유다 지혜문학과 필로 시대의 혼합종교적 사고방식. 가장 잘 알려진 형태는 하느님의 독립적이고 인격화된 말씀이다. 요한복음은 ‘하느님의 말씀이 역사적 인격체로 인간의 모습을 취하신다.’고 가르친다. (Walter Bauer, The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Chicago, 1957. 1979)
3) το ρημα (레마) 1. 선포된 말씀의 의미, 문맥이 주는 특별한 의미다. 예언, 위협 등이 그 예다. (그리스도교에서) 하느님의 가르침이나 하느님에 대한 이해나 설교를 가리킨다. 복음이나 신앙고백처럼 전체적으로 통합된 하느님의 가르침이다. 2. 히브리어 어원에서 나온 의미로 사물, 대상, 사건을 뜻한다.(Walter Bauer, 상동)
4) 15,1-8에서 ‘머물다(μενω  메노)’ 동사가 7회 사용된다. 전치사 …안에(εν  엔)가 11회 사용된다. 동사와 전체사의 사용 빈도를 보아 ‘주님 안에 머무르기’가 오늘 복음의 중심 주제임을 알 수 있다.

 

 

부활 제6주일(5월 17일)
요한 15,9-17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10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11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12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13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14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15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16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17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1. 너희는 내 계명을 지켜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1) 계명 지키기(말씀 듣고 실천하기) :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방법적 원칙’을 제공하신다. 즉 당신의 계명을 지키라는 말씀이다. 이는 당신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사랑은 말씀을 통하여 전수된다. 그것은 사랑의 계명으로 요약된다. ‘예수님의 사랑’을 말씀을 통하여 실천의 계명(행동강령)으로 받아들이면, 그분의 사랑이 우리 안에 머문다.  

2)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물기 : 예수님께서 ‘사랑’의 이름과 장소를 제공하신다. 즉 당신의 이름과 당신이라는 존재 안에 그 사랑의 자리를 잡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이 짧은 복음 안에 10회 이상 등장한다. 오늘 복음의 핵심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랑’은 우리 신앙의 하느님을 설명하는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표현이기도 하며, 우리 신앙의 동기요 목적이며 환경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15,10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수직적, 수평적 차원에서 오직 예수님의 사랑으로만 설명하고 싶은 것이 요한복음의 의도이다.

3) 목숨 바쳐 형제를 사랑하기 : 예수님의 사랑은 아버지와 아들의 수직적 사랑에 머물지 않는다. 흘러넘치고 넘쳐서 수평적으로 널리 퍼져나간다. 그 사랑의 에너지와 힘, 그리고 그 사랑의 열정과 비전은 하느님 부자간의 사랑에서 나온다. 그런데 예수님의 사랑은 반드시 세상을 위한 사랑으로 열매를 맺는다. 그러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이 필요하다. 우선 <나 자신>은 (1)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기’를 통하여 (2) ‘형제를 위하여 목숨 바치기’ 사랑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그 다음 <내가 속한 주변 환경>은 (3) ‘서로 사랑하기’ 환경으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 그 속에 예수님의 계명 말씀이 뿌리를 내리게 하여 그분의 사랑이 싹트고 자라게 하며, 서로 사랑하는 환경을 만들고, 형제를 위하여 목숨바치는 사랑의 투사들이 나오게 한다.

4) 예수님 사랑의 모범을 따르기 :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15,12)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사랑이신 예수님의 동의어는 하느님 아버지(요한 5,19-30 외)와 제자들의 교회(사도 9,3-5)와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들(마태 25,40.45 ; 요한 21,15-19 참조), 그리고 심지어 빵의 성사(마태 26,26-29 ; 요한 6장) 등이다. 이런 하느님 나라를 위한 예수님의 끊임없는 성사적 배려와 사랑을 본받는다.

2. 내적 목표 : 그러면 예수님의 기쁨이 나의 것이 되고, 흘러넘칠 것이다.(15,9-11 참조)
예수님의 기쁨은 하느님 나라를 위한 영원한 기쁨이다. 그것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자유의 기쁨이다. 현세에서 누리고 마는 것이 아니라, 불멸과 참 생명의 기쁨이다. 그것을 성취하는 기쁨이며, 그것을 공유하는 기쁨이다.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무한한 기쁨으로 우리 인생이  가득 채워진다. 세상의 죽음도 더 이상 불행이아니라, 하느님께로 가는 여정의 한 과정이다. 그러므로 죽음도 예수님의 기쁨을 빼앗아 갈 수 없다. 이런 내용의 기쁨을 누리는 그리스도인은 ‘죽음’과 같은 인생의 불행한 현실 앞에서도 기쁨과 자유로 충만하다.  

3. 궁극 목표 : 사랑의 열매맺기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언제나 남아있게 하려는 것이다.”(15,16)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15,17)

1) 예수님의 친구 되기(15,13-15) : 예수님께서 먼저 주도적으로 우리의 친구가 되어주시고 친구로 대해 주신다. 동시에 예수님은 우리가 친구를 위하여 목숨바치는 사랑으로 친구가 되어 주기를 바라신다.

2) 예수님으로부터 뽑힌 자 되기(15,16) :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를 제자로 불러 주셔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존재한다. 그리스도인은 스스로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이 아니다. 철두철미하게 예수님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뽑힌 만큼, 예수님의 뜻-말씀-명령대로 실행하지 않으면, 그 자체로 이 관계는 유지되지 않는다.

3) 예수님으로부터 열매 맺기(15,16ㄱ) : 그리스도인은 스스로 열매를 맺는 자가 아니고, 예수님의 현존과 말씀으로 열매 맺는 자이다. 예수님을 벗어나거나, 예수님과 무관하게 열매 맺는 법은 아예 없다. 모든 존재와 행위의 가치와 의미를 예수님 안에서 찾는다면, 그것은 모두가 예수님 안에서 열매 맺는 것이다.

4) 예수님 이름으로 청원하여 소원성취하기(15,16ㄴ) : 현대인은 성공과 성취의 비전에 집중한다. 그리스도인의 성공과 성취는 예수님의 이름 안에 달려있다. 그분의 존재와 말씀과 가르침 그리고 행적으로 나타나는 모범 안에 그분의 인격이 녹아있다. ‘그분의 이름으로 청원한다는 것’은 인간 세상사의 희망을 ‘예수님 능력의 말씀으로 이룬다.’는 뜻이 된다. 이런 형태의 삶이 주님으로부터 뽑힌 자로서 열매 맺는 삶이다.

 


주님 승천 대축일 (5월 24일)
마르 16,15-20

15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16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17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18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19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20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 그 여자들은 자기들에게 분부하신 모든 것을 베드로와 그 동료들에게 간추려서 이야기해 주었다. 그 뒤에 예수님께서도 친히 그들을 통하여 동쪽에서 서쪽에 이르기까지, 영원한 구원을 선포하는 거룩한 불멸의 말씀이 두루 퍼져 나가게 하셨다. 아멘.

1. 승천은 파스카 축제와 신비의 일면이다.
승천은 전례적으로 부활절과 성령강림절(오순절) 사이에 있다. 부활 후 40일째 예수님은 승천하신다. 그러나 승천은 부활을 중심으로 한 파스카 신비 전체의 한 측면이다.  

2. 승천은 여러 가지 의미들을 지닌다.

1) 예수님의 공생활 초기 제자들을 선발하시는 과정과 유사하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갈릴래아에서 제자들을 처음 부르실 때, 그들을 파견하여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려는 목적이 있었다.(마르 3,14) 예수님 현존 가까이 머물 수 있는 자격과 마귀 쫓는 권한과 치유의 능력 등을 주셨다.(마르 3,14.15 ; 6,13 참조) 주님께서는 표징을 동반시켜 주시며, 제자들이 전하는 주님 말씀을 확증해 주신다.

2) 예수님의 승천은 에녹(창세 5,24)과 엘리야의 승천(2열왕 2,11)과 닮았다. 제1독서 사도 1,9 :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르신 다음 그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오르셨는데, 구름에 감싸여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다.”)

3) 그리스도의 승천은 강생과 수난-부활을 수렴한다. 이 승천의 목적은 만물의 충만, 그리스도 몸의 성장과 일치 그리고 성숙을 위한 것이며, 그리스도의 몸인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다.(제2독서 에페 4,8-11 ; 필리 2,6-11참조)

4) 이 승천은 ανεληυψθη(αναλαμβανω의 부정과거 수동태) 예수님 스스로 오르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들어올리신 것이다.(신학적 수동태) 아버지의 뜻과 계획에 대한 아드님의 전적인 순종의 의미가 잘 나타난다. 동시에 아버지의 전적인 주도권도 잘 나타난다. 그리스도께 수렴되는 모든 의미는 전적으로 아버지께 그 뿌리를 둔다. 모든 존재의 가치와 의미는 오직 아버지의 영광을 지향한다.

3. 승천은 사도들의 사명인 복음 선포의 궁극적인 비전을 보여준다. 

1) <복음> Το Ευαγγελιον(에우앙겔리온) 마르코 복음서 전체에서 ‘복음’이란 단어는 3회 나온다. 1,1의 제목에서 그리고 16장 15절과 20절의 결론부에 두 번 나온다. 이는 복음서의 존재 목적이 복음선포의 사명을 밝히기 위한 것임을 말해 준다. 1,1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Το Ευαγγελιον)의 시작 / 16,15 너희는…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 16,20 제자들은…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2) 복음의 핵심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대한 믿음’이다. 인간을 영원한 생명으로 살리는 것은 바로 이 믿음이다. 이것을 믿고 세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 지금까지 행해진 인류의 온갖 악과 범죄들(증오, 전쟁, 질투, 폭력, 살인 등)로는 더 이상 세상의 평화와 행복을 위한 기대를 걸 수가 없다. 이 족쇄를 몸소 풀어내신 분이 인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 16,16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믿는다는 것은 어떤 근거에 뿌리를 내리거나 안정된 기반을 갖추고 있다는 뜻도 된다.(요한 15,4-5 참조) 믿음을 거부하는 것은 그 자체로 단죄를 받은 것이다. 왜냐하면 절망적인 인류에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얻은 새로운 생명과 그 가능성을 포기한 것이기 때문이다. 절망하는 자에게 더 이상의 새로운 가능성은 없다. 더구나 예수님께서 이루신 ‘생명 회복 자체와 그 회복의 길’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자멸과 같기 때문이다.    

3) 믿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다섯 가지 은사들 : 16,17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 16,18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믿는 이들에게는 다섯 가지 이적들이 따른다. 첫째, 구마능력 (참조 : 사도 16,16-18), 둘째, 새로운 언어를 말하는 능력 (참조 : 사도 2,1-11;1, 코린 12,10.28 ; 14장), 셋째, 독사를 다스리는 능력(참조 : 사도 28,3-6 ; 루카 10,19 참조), 넷째, 치유 능력 (참조 :사도 3,1-10;9,32-35;14,8-10;28,8-9), 다섯째, 독에 피해를 입지 않는 능력(성경 밖의 구전전승) 등5)이다. 이 놀라운 능력의 원천은 ‘예수님의 이름’이다. 이 능력의 목적은 사도들이 전하는 말씀의 확증을 위한 것이다.(마르 16,20)

4. 승천은 메시아의 통치 모습을 보여주고자 한다.
다니 7,13-14 / 13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나 연로하신 분께 가자 그분 앞으로 인도되었다. 14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되었다.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 신앙인이 바라보며 나아가는 최종적인 비전이다

 


성령 강림 대축일 (5월 31일)
요한 20,19-20

19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1. ‘주간 첫날 저녁’의 은혜를 누려라.
주간 첫날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제7일 안식일 다음날로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새벽이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날이다. 이제 부활의 첫날 하루가 저물어 저녁이 되었다. 아직은 믿지 못할 예수님의 부활소식이 막달레나를 통하여 새벽부터 전해지기 시작했지만, 제자들은 아직 믿지 못했고, 세상이 두려워서 모여서 숨어있다.(20,19ㄱ) 유다인들의 세상이 너무나 두려운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자리에 예수님께서 찾아오신다. 비록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세상을 더욱 두려워하고 있다. 그러나 중요하게 드러나는 것은 1) 비록 제자들의 믿음이 부족하지만 함께 모여 있었다는 점 2) 부활 증거의 순간이 부활 당일 24시간으로 한정되지 않는다는 점 3) 따라서 부활의 의미는 우리의 주일뿐 아니라, 평일-주간에도 차고 넘치게 증거 되어야 한다는 점 등이다.
종합적으로 볼 때, 주일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의 틀을 잘 짜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부활 체험과 증거를 중심으로 주간과 일상의 시간을 사용하는 것은 신앙의 지혜이다. - 주일 미사 참례의 중요성을 실감하지 못하는 기성 신자들과 냉담자들에게 주일 미사 참례의 의미를 잘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계기가 된다. 부활 신앙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자는 부활 축제의 매주일 미사에 잘 참례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는 것이다. 비록 믿음의 단계에 들어서지 못했을 지라도, 주일 모임에 참여하는 그 자체로 부활체험의 신앙에 접근하고 은혜를 누리는 지름길이다.

2. 현존(현현)을 근본으로 하여, 평화의 말씀(청각)과 증거(시각)를 받아라.
예수님께서는 부활 신앙을 주시기 위하여 인간의 시청각적 체계를 사용하신다. 1) 현현으로 당신의 현존적 부활을 알려주시는 예수님께서는 2) 말씀으로 평화를 주시고 3) 구체적 수난의 흔적들(손과 옆구리)을 보여주신다. 하느님의 현존과 영과 말씀은 창세기 1,1-2에서 처럼 창조의 원리이다. 하느님은 언제라도 ‘현존과 영과 말씀’으로 새로운 창조를 하신다. 그리하여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주님 안에서 그분과 함께 그분을 통하여) 평화와 기쁨으로 바꾸어 주신다.(20,20.21)
부활의 신앙으로 누리는 은혜는 기쁨과 평화이다. 현대인은 정신질환과 정서적 장애를 많이 겪는다. 과로와 스트레스, 근심과 걱정, 불안과 불면증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고통들을 겪는다. 부활 신앙은 평화와 기쁨으로 사람을 변화 시킨다.

3. 예수님의 숨결과 성령을 받아라.
위로부터 오는 능력과 뜨거운 열정과 내적으로 충만한 기쁨이 없다면, 십자가의 길을 걷는 그리스도교는 너무나 슬프고 우울하며 고리타분한 교리와 계명과 무미건조한 예식의 종교일 뿐이다.

1) 예수님의 숨결은 창조의 숨결이며, 성령의 은혜는 그 창조적 에너지와 활력이다. 2) 오늘 축하하는 성령의 축제는 ‘하느님의 숨결’로서 주로 ‘내면’으로 작용한다. 3) 예수님의 말씀은 살아생전에는 그 의미가 다 드러나지 않는다. 그분의 죽음과 부활로 그 의미가 드러난다. 그러나 결정적으로는 성령 강림에 의해서 예수님 말씀의 모든 의미가 드러난다. 그러므로 기도를 시작할 때나 계시말씀의 성경을 읽을 때나 ‘성령’의 현존과 도우심을 청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4. 성령의 힘을 입으면, 용서가 가능하다.
용서는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사람이 누군가를 용서한다면, 그것은 이미 하느님의 능력을 힘입은 것이다.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자는 용서의 주체가 될 수 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20,23)
성령의 힘을 입은 자는 하느님의 능력을 가진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만을 위해서 그 능력을 유보해 둘 것이 아니라, 타인들을 위하여 그 능력을 발휘하여야 한다. 하느님의 뜻대로 사람들을 용서하는 주도적 기능을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첫째, 성령을 받으면, 용서할 능력을 가지므로 용서할 수 있다. 둘째, 성령을 받으면, 용서해야 한다. 하느님의 능력과 은혜는 모두 인간들을 위한 ‘사랑의 봉사’로 사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유인 것이다. *2009년 5월 <사목정보>지에도 실렸음을 밝힙니다.

각주
5) 정양모, 마르코 주석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2001년, 분도출판사, 각주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