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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 볼리비아에 와서 제가 거행한 첫 번째 장례 예절이 생각납니다. 태어나면서 죽어버린 한 아이의 장례식이었습니다. 이 곳 풍습은 사람이 죽으면 관에 넣어 얼굴 쪽에 유리창을 하나 내어 찾아온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합니다. 그러면 조문객들은 와서 그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조용히 기도를 합니다. 방에 들어서니 자그마한 관이 있었습니다. 갓 태어난 아이니 당연한 일이겠지요.
가까이 가서 유리창을 들여다 본 순간 조금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이의 얼굴이 퉁퉁 부어 볼품없이 변해 있었거든요. 하지만 잠시 그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미처 세상의 빛을 보지도 못한 채 부모의 동의하에 엄마의 자궁 안에서 살해되는 수많은 낙태아들보다는 세상의 빛도 보고 사제와 모든 이의 축복 속에 하늘에 올라가는 행운을 지닌 아이가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이번 주제를 죽음으로 정한 건 최근에 작은 사건 하나를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저녁 어둑어둑 할 때 널어놓은 빨래를 걷으러 나갔습니다. 한참 빨래를 걷고 있는데 발이 따끔따끔해 오기 시작했습니다. 얼른 발을 들여다보니 발에 깨알 같은 개미떼가 한가득 붙어 사정없이 물어대고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거기 작은 바가지만한 개미집이 튀어나와 있었는데 내가 어두운 중에 그만 개미집을 발로 건드린 모양이었습니다. 얼른 개미를 털어내고 집으로 들어왔지만 가려움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습니다. 이런 저런 약을 발라 보았지만 가라앉을 생각은 않고 오히려 화끈거림은 더해만 가기 시작했고 설상가상으로 발부터 시작해서 알레르기 증세가 온 몸에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조금 지나면 가라 앉으려나 생각했지만 증세는 점점 더해만 갔고 결국 참다못한 나는 다른 신부님들의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마침 집 가까운 곳에 보건소가 있었기에 가서 의사선생님을 만나 처방전을 받아 약국으로 갔습니다. 약국에서 처방전대로 항 알레르기 주사를 맞았습니다. 그리고 약국 가게 문을 나서는 순간, 그만 정신을 잃고 쓰러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잠시 후 정신이 돌아왔을 때, 바닥에 쓰러져 누워있는 내 몸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모든 신경이 사라져 버린 듯 아무 고통도 없고 지극히 편안함을 느꼈지만 점점 더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하자 갑자기 구토가 밀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몸을 일으키고 몇 번을 토하고 나니 비로소 몸이 안정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개미에게 물리기 시작해서 바닥에 쓰러지기까지는 불과 40분도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 동안 좋은 것, 맛난 걸 골라 애지중지해 온 내 몸이라는 것이 지극히 작은 개미들의 공격에 바로 쓰러져버리는 이토록 나약한 것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큰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이 ‘죽음’ 앞에 나약한 우리 자신들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세상의 한다한 권력도, 우리가 그토록 원하는 재물도, 명예도 이 죽음이라는 신비 앞에서는 무색해지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우리 신앙인들에게 이 ‘죽음’은 마냥 신비로만 다가오지는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허무로만 다가오는 죽음을 믿음이라는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면 거기에서 엄청난 희망, 영원의 씨앗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좌절하지 않습니다. 그 어떤 시련이 다가와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려도, 이역만리 볼리비아에 던져놔도, 심지어 자신의 죽음이 다가와도 희망 안에서 삶을 꾸려나갈 수 있는 것이 신앙인이라는 존재입니다. 혹시 지금 주변에 자신을 괴롭히는 힘든 일이 있으신가요? 그래도 희망을 가지십시오. 우리는 신앙이라는 엄청난 보물을 지닌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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