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로그인

최성준 신부와 함께하는 동양고전산책
“사랑
- 인(仁)”
- 동양의 덕목으로 풀어 본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글 최성준(이냐시오)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막는 법은 없습니다.”(갈라 5,22-23)

 

이번 달부터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하나씩 다루어 볼까 합니다. 이는 성령께서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혜입니다. 그 은혜가 어찌 이 아홉 가지밖에 없겠습니까. 하지만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신 이 아홉 가지 성령의 열매를 중심으로 그 열매들이 어떤 덕성을 지니는지 알아보고, 동양의 성현들은 그 덕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가르쳐 왔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아홉 가지 성령의 열매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세 가지 열매인 사랑, 기쁨, 평화는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맺어지는 열매입니다. 둘째 묶음은 인내, 호의(친절), 선의(착함)로, 이웃과의 관계에서 맺어지는 열매입니다. 마지막 셋째 묶음은 성실(신용), 온유, 절제로서 나 자신과 관련되는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느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나 자신과의 관계에서 필요한 덕목을 성령께서 은총으로 열매 맺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의 열매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니 사서(四書) 가운데 한 권인 『대학(大學)』의 첫 구절이 생각납니다.

 

“큰 배움의 도는 내 안의 밝은 덕을 밝히는 데 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데 있으며, 지극한 선에 이르러 그치는 데 있다.”1)

 

유학의 전통에서 배움의 길에 들어서려는 이는 그 배움의 길(道)이 어디에 있는지를 먼저 깨달아야 하는데, 그것은 먼저 내 안에 있는 밝은 덕을 밝히는 데 있습니다. 인간이 태어날 때 하늘이 부여해 준 명(天命)이 고스란히 내 안에 있습니다. 하늘이 내려 준 명이기에 그 자체로 온전히 밝은 덕(明德)입니다. 배운다는 것은 외부로부터 새로운 것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내 안에 온전히 있는 것을 밝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학(大學)』의 첫째 강령입니다. 이렇게 내 안의 밝은 덕을 밝혔으면, 이제 이웃에게로 확장되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배우는 목적은 나만 똑똑해지고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백성들, 곧 이웃을 쇄신시켜 나가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대학』의 둘째 강령입니다. 이런 배움의 길은 지극한 선(至善), 곧 하느님에 이르러 그칩니다. 인간의 배움은 지극한 선, 절대자 하느님에 이르러 그칩니다. 그러니 사람은 배움의 길을 걸어감에 있어서, 가장 먼저 하늘이 나에게 심어 준 명(命)이 무엇인지 깨달아 알아야 하고 그 밝은 덕이 밝게 빛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이웃들에게 그 빛을 비추어 주고, 다른 이들에게도 있는 그 사람 고유의 빛이 밝게 빛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내게서 시작된 배움의 길은 이웃에게로 끊임없이 확장되어 가며 온 인류에게로 향한 다음, 하느님 앞에서 그칩니다. 바꾸어 생각해 보면, 사람은 최선을 다한 후에 조용히 하늘의 뜻을 기다려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쳐야할 바를 모르고 자신의 힘만 믿고 끝없이 나아가기만 한다면 오히려 어리석음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지극한 선에 이르러 우리의 나약함을 겸허히 인정하고, 우리가 하늘에서부터 온 존재임을 깨닫고 하늘의 뜻을 기다리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맺는 열매, 이웃과의 관계에서 맺는 열매, 그리고 나 자신과 연관된 열매로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매달 하나씩 다루어 보겠습니다.

 

첫째 열매 : “사랑”

가장 먼저 다루어 볼 성령의 열매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전체를 아우르는 덕목입니다. 사랑은 이 모든 것을 포괄합니다. 사실 사랑이 전부입니다. 성령의 열매로서의 사랑은 아가페적인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유학(儒學)에서는 인(仁)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인(仁)은 ‘어질다’라고 번역되지만 바로 아가페적인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仁)은 곧 사랑입니다. 공자가 가장 중시한 개념으로 유가(儒家)의 최고 덕목이기도 한 인(仁)의 뜻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봅시다.

첫째, “인(仁)”은 ‘어질다, 자애롭다, 인자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번지가 인(仁)에 대해서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인(仁)이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2)

 

둘째, “인(仁)”이라는 글자에는 ‘씨앗’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살구씨를 행인(杏仁)이라고 표현하는 데서도 그 의미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결국 인(仁)은 사람이 마음에 품고 있는 것입니다. 그 어진 마음은 씨앗과 같아서 아직 제대로 싹이 트지 않기도 하고 가시덤불에 가려 제대로 자라나지 못한 경우도 있지만 누구나 제대로 가꾸기만 한다면 내 안에서 잘 자라나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인(仁)이란 사람의 마음이다. 의(義)란 사람이 걸어가야 할 길이다.”3)

“인의예지(仁義禮智)는 바깥으로부터

나에게 녹아들어온 것이 아니라, 내가 원래 가지고 있는 것이다.”4)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추고 있는 것이 바로 어진 마음(仁)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랑은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마음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때 이미 우리 안에 심어 두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창세 1,26)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하느님에게서 났으며 하느님은 바로 사랑이시기에(1요한 4,7-8,16) 우리에게도 사랑이 온전히 담겨 있습니다.

 

셋째, “인(仁)”에는 ‘서로 통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사람이 서로 관계를 맺고 소통하는 것이 바로 인(仁)의 상태입니다. 반대로 소통하지 못하는 상태를 불인(不仁)이라고 하는데, 한의학에서 신경이 통하지 않고 마비된 상태를 불인(不仁)이라고 표현합니다. 다음 호에서 사랑과 인(仁)의 덕목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1) 『대학(大學)』 제1장 “大學之道, 在明明德, 在新民, 在止於至善.”

2) 『논어(論語)』 안연(顔淵) 12편 22장 樊遲問仁, 子曰, “愛人.”

3) 『맹자(孟子)』 고자(告子) 上편 11장 “仁, 人心也, 義, 人路也.”

4) 『맹자(孟子)』 고자(告子) 上편 11장 “仁義禮智, 非由外 我也, 我固有之也.”

 

* 최성준 신부는 북경대학에서 중국철학을 전공하고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동양철학을 강의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