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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과 함께여서 행복하여라 - 제3화
드디어 가톨릭교회 품으로!


글 양 수산나|대봉성당

 

지난 달 나는 어떻게 한국에 오게 되었는가를 보여주는 첫 단계로서 내가 복음서들을 읽음으로써 그리스도께 돌아서게 된 것을 간략하게 이야기 했다. 그 다음에 고등학교 졸업과 옥스퍼드 대학 1학기 시작 사이 빈 기간에 로마, 아테네, 예루살렘 여행을 계획하고 부모님 허락을 받았다고 했다.

 

내가 로마에 도착한 바로 그날 저녁, 예약한 호텔 모퉁이에서 성모 마리아 상을 둘러싸고 있는 가톨릭 신자들을 맞닥뜨리게 되었다. 그들은 성모님께 기도하고 있었는데 나도 그들과 합류하여 함께 기도했다. 나는 내 주님의 어머니께 기도하는 것이 조금도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아서… 가톨릭교회가 그리스도께서 원하신 교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날 밤 당신교회의 일치를 위한 그분의 뜻을 내게 보여 달라고 더욱 뜨겁게 청했다. 나는 로마에서 한 영국 유대인을 만났는데 여러 달에 걸쳐 하느님께서 그 사람이 그리스도를 만나고 결국은 성공회 신자가 되도록 돕는데 나를 이용하셨다.(그러나 내 도움을 받은 이 개종자는 성공회 신자로 남았고 나는 나중에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로마에 3주 머물면서 나는 베드로와 바오로… 초기 순교자들의 무덤을 순례했다. 그 다음 3개월은 피렌체에서 미켈란젤로의 다윗 상과 복된 안젤리코가 그린 놀랍도록 순수하고 영적인 벽화들을 볼 수 있었다.(성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안젤리코 사후 수 세기가 지난 때에 그의 그림을 근거로 그를 복자품에 올렸다.) 그리고 나는 아테네에 며칠 머물렀다.(나는 훨씬 나중에 아테네를 다시 찾았다. 그리스 예술과 신화 특히 그리스 철학을 좋아해서.) 그 다음은? 예루살렘. 예수님께서 걸으시고 가르치시고,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루살렘! 성지에 머무르는 기쁨은 참으로 대단했다. 아버지와 친한 유대인 친구 가정에 머물렀는데 나를 안내해 준 유대인 친구들은 훌륭한 분들이었지만 내가 기도하고 싶은 곳에 한 번도 길게 머물기를 원치 않았다! 하지만 예루살렘과 갈릴래아에 머문 시간은 내 신앙을 심화시키는데 도움이 되었다. 나는 온갖 종파의 그리스도교 신자들과 사제들을 만났다. 그러나 런던에 돌아와서도 어느 것이 하느님의 뜻에 맞는 교회인지 더 분명해지지는 않았다.

 

이제 옥스퍼드. 옥스퍼드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은 놀랍도록 풍요로웠다. 2학년 때 나는 옥스퍼드 SCM(그리스도교 학생운동)의 여성회장(남자회장도 있었다)이 되었다. 항상 남녀 회장 둘이었다. 나는 모든 종파의 뛰어난 성경학자들과 신학자들을 만났는데 그들 중 일부는 죽을 때까지 친구로 남았다. 나는 철학, 정치학, 경제학1)을 공부하게 되어 있었는데 이 과목들은 학점을 받기에 괜찮을 정도로만 공부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신학과 교회사를 읽는데 할애했다. 꽤 빨리 나는 2세기 세대, 즉 사도들을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당신 백성의 일치를 위해 섭리하신 것을 어떻게 보았는가하는 것이 본질적인 질문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나는 속사도시대2) 교부들을 읽기 시작했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성인은 110년경 로마 콜로세움에서 사자들에게 던져져 순교했는데 신자들의 일치는 성체성사에 의해 이루어지고 길러지며 교리와 교계의 일치는 사도들의 후계자들인 주교들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그는 말한다. “하프의 줄들이 하프에 붙어있듯이 사제들도 그들의 주교에게 붙어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하느님께서 그들의 음악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들의 일치는 확실히 성체성사와 주교들을 통해서 오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훌륭한 성경학자인 나의 성공회 지도신부는 그때까지도 “수산나야, 성체성사와 주교들을 우리 성공회에서도 모시고 있단다.”라고 하셨다. 그러나 내가 다음으로 읽은 교부는 리옹의 이레네오 성인이었다. 이레네오는 말했다. “나는 위대한 순교자 폴리카르포 성인에게서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는 사도 성 요한을 알고 지냈고 성 요한은 주님을 알고 지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내가 여러분을 위해 쓰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계속한다. “만일 여러분의 주교가, 그리고 다른 주교가 그리스도교 가르침에 대해 일치하지 않는다면 로마에 가서 확인하시오.” 이레네오 성인은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의 교회, 즉 로마교회가 보편교회를 위한 규범이라고 말한다.

나의 성공회 영적 지도신부는 103세에 돌아가실 때까지 내 친구였다. 그러나 이레네오의 가르침에 나오는 로마교회의 입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을 때 내가 만족할 만한 답을 하지 못했다. 나는 그때까지 영적 지도를 해주신 성공회 신부님께 감사하면서 꿇어 앉아 그분의 강복을 받은 후 성공회 성당을 떠나 대학교 내에 있는 가톨릭 성당으로 갔다. 그 당시 영국에서는 스물한 살이 되기 전에 성공회에서 로마 가톨릭교회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부모의 허락이 필요했다. 나는 런던에 갔다. 엄마는 집에 계셨다. 내가 가톨릭 신자가 되겠다고 했을 때 엄마는 좀 우셨다. “왜냐하면 가톨릭교회는 정치적으로 너무 우익이라 아빠가 마음에 안 들어 하실 테니….” 그렇지만 “우리는 자유를 신봉하니까 물론 ‘좋다’고 하실 거야.”라고 하셨다.

 

아버지께서 오셔서 침실에 들어가실 때 나는 따라가서 말했다. “아빠, 여기 좀 앉으세요. 제가 청할 게 있어요.” 아빠는 침대에 앉으셨다. 나는 아빠의 마음을 아프게 할 것이란 생각에 아빠 옆에 떨면서 앉았다. “아빠, 내가 21살이 되기 전에 가톨릭 신자가 되는 걸 허락해 주시겠어요?” “네가 가톨릭 신자가 될 거라는 걸 나는 3년 전부터 알고 있었다!” “내가 가톨릭 신자가 되겠다고 맘먹은 지 3개월밖에 안 됐는데 아빠는 3년 전부터 알고 있었다고요?” “3년 전부터 너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고 나는 내 딸이 머리가 괜찮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나로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을 믿기가 힘들지만 만일 참으로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다면 그분은 창조된 것들을 이용하여 일하실 것이다. 사람, 물, 빵, 포도주를. 나는 개신교보다 가톨릭을 훨씬 더 존중한다. 그러니 좋아, 가톨릭 신자가 되어라!” 아버지의 반응은 나에게 큰 평화를 안겨주었다. 그리고 어머니도 안심하셨다.(‘우익’으로 말할 것 같으면 몇 해 후 나는 아버지에게 『지상의 평화』3)를 한 권 드렸는데 그것을 읽으시고 역시 안심하셨다. 가톨릭의 사회 가르침은 “우”이거나 “좌”가 아니다.)

 

2학년 때는 옥스퍼드 대학교 내 예수회대학의 훌륭한 예수회원 토마스 코비쉬리 학장신부와 그리스도교 교회일치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3학년 초 1956년 12월 13일 그 학장신부님은 나를 가톨릭교회 품으로 받아들이셨고 12월 14일에 첫 영성체를 했다. 12월 13일은 여동생과 나의 가장 친한 한국인 친구의 축일인 루시아 축일이고 12월 14일은 온 생애동안 대단히 특별한 나의 하늘친구인 십자가의 성 요한 축일이라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날들이다!

이제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가톨릭 교회생활에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나는 하느님께서 나를 부르신 “땅 끝으로” 내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그 이야기는 다음에.

 

1) 옥스퍼드 대학에는 PPE학과가 있다. 철학(Philosophy), 정치(Politics), 경제(Economics)를 통합한 학과이다.

2) 열두 사도 후 1, 2 세대 교부들

3) 교황 성 요한 23세의 회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