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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 영성수련기 ②
밀어


글 김태형(필립보) 신학생|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돌로 된 마음(에제 11,19)

뜨거운 마음을 품은 적이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도 시간은 훌쩍 흘러 어느새 신학생 7년차에 접어든다. 부끄럽지만 지나온 흔적을 보면 스스로 대견할 때도 있고 이제는 작은 바람에 휘청대는 갈대 신세는 면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그러나 솔직히 고백하자면 해결할 수 없는 깊은 고민들은 아직 때가 아니거니 하며 가슴에 묻어버릴 때도 있다. 그렇게 무덤덤하게 가슴속 고민들을 묻어버릴 때마다 작은 출렁임에도 시름했던, 여렸던 때가 그리운 건 왜일까? 대학원 2학년에 올라가기 전 거쳐야 하는 렉시오 디비나 영신수련도 그저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사제직을 향한 여정 중에 제법 중요한 과정임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특별한 간절함은 없었다. 간절함보다는 이 또한 무난히 잘 마칠 수 있으리란 말 그대로의 덤덤한 마음이 전부였다. “여러분 각자가 이 과정에서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영신수련 첫날 지도 신부님의 첫 질문에도 속으로는 무얼 그리 특별한 걸 얻을 수 있겠냐며 시큰둥하기만 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습니다.(히브 4,12)

그러나 영신수련으로 나를 이끄신 분, 그분께서는 나를 덤덤하게 두지만은 않으셨다. 주님의 날카로운 말씀은 이내 내 딱딱하게 굳은 마음을 갈라 속내를 드러내놓게 만드셨다. ‘저 별로 원하는 거 없습니다.’하며 겉으로 덤덤한 척 교만 떨던 마음은 이내 그간 모른 척 묻어두었던 마음 속 갈등들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성소를 위태롭게 할 만한 질문들이 속에서 터져나왔다. 십자가를 볼 때 불편했던 마음, 차마 드러낼 수 없어서 꾹꾹 눌러두었던 내면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님, 당신은 누구시기에 저를 수난으로, 죽음으로 이끄십니까? 어찌하여 저에게 십자가에 달려 죽으라고 명하십니까? 제가 죽기까지 평생을 따를 분이 정녕 당신이십니까?” 감히 함부로 말할 수도 없었던 고민들, 영혼의 울부짖음이 내 안에서 들려왔다.

그렇게 시작한 한 달간의 여정에서 말씀께서는 나를 놀라운 곳으로 이끄셨다. 거기서 만나 뵌 주님은 포근하기도 위엄 가득한 분이기도 하셨고, 나를 탄식하게도 기쁘게도 하셨다. 처음 마주친 강렬한 울림은 광야에서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던 세례자 요한에게서였다. 수십 번, 수백 번 들어 익히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세례자 요한. 그전에는 어떠한 감흥도 없이 그저 나도 저렇게 살아야겠구나 정도의 피상적인 느낌만을 주던 세례자 요한. 그러나 영신수련 중에 만난 세례자 요한은 그 누구보다 기쁨에 가득 찬 사람이었다. 남루한 모습으로 광야에서 메뚜기와 들꿀만으로 살아가던 세례자 요한, 그럼에도 오실 분을 기다리며 환희에 차 사람들을 그분의 길로 이끌던 세례자 요한. 그 순간 너무나도 가슴이 아팠다. 예수님의 길을 따르겠다고 겉으로는 당당하게 이야기하지만 좁은 길, 수난의 길로 접어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기쁨 없는 신앙인으로 살았던 나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의 부족함을 느끼는 슬픔과 한편으로 세례자 요한의 넘치는 기쁨을 동시에 맛보는 모순적이고도 표현할 수 없는 순간이 찾아왔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울면서 기도드렸다. “주님, 세례자 요한의 기쁨이 제 마음 속에 넘치게 하소서. 물기 없이 파삭 무너질 모습이 아니라 기쁨에 젖어 당신의 일을 하게 하소서.”

그 후로 말씀께서는 자격 없는 나에게 당신을 계속해서 드러내셨다. 그러다 다시 한 번 말씀께서 나를 깊게 감싸는 시간이 찾아왔다.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변모하신 구절을 렉시오 디비나 할 때였다.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어 복음 구절의 표면에 머물렀으나 말씀에 잠길수록 말씀께서 드러내주시는 것이 있었다. 묵상하는 구절은 거룩한 변모였지만 떠오르는 모습은 역설적이게도 제자들의 배반이었다. 산에 올라 그 놀라운 광경을 목도하였지만, 곧 스승을 모른다고 배반할 베드로가 마음에 펼쳐졌다. 다시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거룩한 변모를 보고도 십자가에서 돌아선 제자들과 지금껏 놀라운 일들로 나를 여기까지 이끌어주셨지만 아직도 알아듣지 못하고 갈등하는 내 모습이 어찌나 겹쳐있던지, 마음이 저렸다. 말씀께서는 다시 한 번 나를 기도하게 하셨다. “주님, 깨우치기에 느리기만 한 저를 용서하소서. 이 마음을 당신께서 이끄시고 깨우쳐주소서.”

말씀과의 깊은 만남 속에서 시간 감각은 무뎌져갔다. 하루하루는 순식간에 지났고 피정은 며칠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도 막바지에 다다랐다. 묵상 구절도 어느새 변모와 수난을 지나 부활과 승천에 이르렀다. 그리고 주님의 부활을 가장 먼저 체험한 마리아 막달레나의 대목에서 나는 다시 한 번 엎어져 울 수밖에 없었다. 빈 무덤에서 주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을 알고 놀라 소리치며 미친 듯 주님을 찾는 막달레나. 그 모습은 마치 타올랐던 마음이 차갑게 식었을 때 놀라며 불안해했던 나의 예전 마음과 닮아있었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갔습니다.’하며 서럽게 울던 그녀의 모습은 잔잔한 바람에도 시름하던 나의 옛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제법 덤덤한 척 하지만 사실은 빈 무덤을 헛된 것들로 가득 채우곤 억지로 스스로를 위로하는 지금의 내가 그려져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주님의 시신은 누가 가져간 것도 아니었고 빈 무덤을 삿된 것으로 채워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엎어져 엉엉 울고 있을 때 낮은 목소리가 다가왔다. “필립보야.”

 

내가 그것을 먹으니 꿀처럼 입에 달았다.(에제 3,3)

글을 쓰다가 자꾸만 멈춰서 적은 것들을 다시 보게 된다. 지우고 다시 쓰길 몇 번이고 거듭하지만 답답하기만 하다. 눈빛과 손길로 전해지는 말씀의 밀어를 표현하려니 계속 가슴만 먹먹해진다. 무슨 수를 써야 그분의 그 온화한 음성과 부드러운 손길을 전할 수 있겠는가. 나에게 있었던 일, 정말로 그분께서 나에게 하셨던 그 일에 비하면 이 글은 너무나도 보잘 것 없을 따름이다. 형편없을 수밖에야 없지만 부족한 표현이 말씀과 읽는 분들에게 누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바라는 것이 남았다면 말씀 안에서 주님을 계속 뵙는 것이다. 이제 그 옛날 예언자의 말이 조금이나마 이해된다. “내가 그것을 먹으니 꿀처럼 입에 달았다.”(에제 3,3)

 

1) 밀어(密語) [명사] 남이 못 알아듣게 비밀히 말함. 또는 그렇게 하는 말.

    밀어(蜜語) [명사] 남녀 사이의 달콤하고 정다운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