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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과 함께여서 행복하여라 - 제4화
한국교회사에 반해서 “땅 끝으로!”


글 양 수산나|대봉성당

“땅 끝까지 가라.”고 하느님께서 나를 부르시는 것 같다고 앞에서 말했다. 그렇지만 어디로? 어떻게?

 

옥스퍼드를 졸업한 후 나는 대륙으로 가는 기차를 타고 로마로 향했다. 위와 같은 질문을 할 수 있는 곳은 당연히 “인류복음화성”이라는 이름을 가진 기관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때는 그 기관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곳인지를 나는 몰랐다. 그래서 나는 로마로 갔고, 프로파간다 길 1번지의 벨을 눌렀다. 나중에 이 이야기를 들은 신부님들은 스무 살밖에 안 된 여자 평신도가 감히 그런 짓을 할 생각을 했다고 기막혀들 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순진한 자에게 얼마나 좋은 분이신지!

키가 땅딸막하고 동글동글하고 만면에 웃음을 띤 신부님께서 문간에 나타나셨다. 나는 나의 질문을 말씀드렸다. 그분은 고개를 끄덕이시더니 대단히 친절하게 나를 데리고 들어가셨다. 불어를 하시는 캐나다 분이어서 우리는 불어로 이야기 했다.(내 이태리 말은 시원찮았지만 불어는 문제 없었다!)

내 문제를 진지하게 이야기했을 때 그분은 내가 수녀가 되는 게 제일 좋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내가 무엇보다도 관상생활을 원하고 또한 비그리스도교 국가에서 사도적으로 사람들과 접촉하는 것을 원한다고 강조했더니 그분은 샤를르 드 푸꼬 신부님이 창설하신 ‘예수의 작은 자매회’에 가 보는 게 좋겠다는 결론을 내리셨다. 그들은 세계 여러 곳에서 더 가난한 사람들 곁에서 일하는 직업을 가진 관상수녀들이다. 그 신부님의 이러한 선택은 내 마음에 들었다.

 

런던으로 돌아와 사회복지사의 자격을 얻기 위해 런던 경제학교(L.S.E.)에서 1년 동안 공부했다. 예수의 작은 자매들과 만나 엄청 좋은 관계를 맺었다. 거의 그 수녀원에 들어갈 뻔 했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기를 부모님이 수녀원에 들어가는 것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으면 1년을 기다리게 한다고 했다. 나는 1년을 기다렸다. 런던의 가장 가난한 지역에 있는 병원의 사회복지사로 일하면서 자주 작은 자매회 수녀님들의 경당에서 기도하고 그분들과 더 가까워졌다. 하지만 어느 날 도서관에서 조용히 책을 읽고 있었는데 순간적으로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체험한 첫 열정이 내게서 날아가 버리는 것을 느꼈다. 이것은 내 신앙의 위기는 아니었고 다만 체험적 수준의 사건이었다. 하지만 수녀가 되는 것이 내 성소라는 생각에 대한 확신이 사라졌다.

 그러면 결혼이 내 성소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는 선교모임에서 역시 선교를 떠나려고 하는 프랑스 의사를 만났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게 되었고 약혼하기에 이르렀다. 나중에 하느님께서는 나를 오로지 당신에게만 속하도록 부르고 계신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시고 그 약혼을 깨도록 나를 이끌어주셨다. 먼저 작은 자매회 수녀님들, 그 다음엔 선교하고 싶어 했던 착한 남자를 실망시킨 것은 나에게 깊이 미안한 마음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약혼하기 전에 나는 프랑스에서 개최된 선교모임에 갔는데 파리에서 공부하고 있는 한국인이 특별강사였다. 그는 자기 나라에서 가톨릭교회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이야기해 주었다.

 

한국의 천주교는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된 것이 아니라 유교학자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했다. 그 학자는 ‘성誠’(유교 개념으로 하늘의 말씀과 인간을 위한 길)을 찾고 있었다. 유교학자 이벽은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를 읽고 말씀과 길이 하나의 추상적인 생각이 아니라 한 인격임을 알아보는 은총을 받았다. 나중에 그는 세례자 요한이란 본명으로 세례를 받고 순교했는데 그 역시 어떤 식으로 한국에 그리스도를 전하는 데 세례자 요한처럼 ‘선구자’였다. 이렇게 한국 사람들은 책을 통해 먼저 신앙을 갖게 되었고 꽤 시간이 흐른 후 세례도 받게 되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비로소 사제가 도착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순교자들이 생겼다. 영웅적인 수많은 순교자들이….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이 놀라운 역사를 나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나는 간략하게만 언급한다. 그러나 내게는 한국의 초기 교회사가 엄청난 빛의 폭발이었다. 이 강의를 들은 후 즉시 나는 이렇게 기도했다. “사랑하는 주님, 제가 이렇게 놀랍고 젊은 한국교회에서 일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제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제게 보여주소서!”

런던으로 돌아와서 나는 우리 집 지하실에서 선교 준비 모임인 ‘빛을 향하여’(Ad Lucem)1)라는 모임을 시작했다. 첫 모임에서 나는 “가톨릭신자 된 지가 얼마 안 되어서 런던의 신부님들을 잘 모르니 누가 우리 지도신부가 될 수 있는지 아는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다. 런던에서 공부하고 있는 스리랑카 남학생이 손을 들었다. “동양학 학교에서 한국말을 공부하는 두 신부님을 알고 있는데…….” “한국말을?” 나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다음 모임에 제발 그분들을 초대해 주세요.”

그 두 분이 우리 모임에 오셨다. 그분들은 전주교구를 위해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벨기에 신부님들이었다. 두 분 다 정기적으로 와서 우리를 도와주겠다고 했다. 그 다음 주에는 그분들과 함께 런던에서 한국말을 공부하고 있는 오스트리아인 평신도 여성 한 분을 데리고 왔다. 그녀의 이름은 마리아 하이센베르거, 나중에 ‘하 마리아’로 잘 알려진 분이다. 이 분은 대구교구(당시엔 아직 대교구가 아니라 대목구)의 앞을 내다보시는 크신 분, 나중에 대주교가 되신 서정길 주교님의 초대를 이미 받은 터였다. 머지 않아 그 세 분은 나 역시 서정길 주교님께 추천하도록 마련해 주었다.(그 당시 서 주교님은 편찮으셔서 오스트리아에서 치료를 받고 계셨다.) 나는 겨우 3년밖에 안 된 신자였지만 서정길 주교님은 나도 초대하기로 결정하셨다.

주님께서는 나의 기도에 응답해주셨다!

 

나의 부모님께서는 내가 수녀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걱정을 하셨는데 이 결정으로 걱정을 덜게 되셨다. 좀 멀리 가는 것이라고 느끼긴 하셨지만 내가 평신도 사회복지사로 간다는 것이 그분들과 더 가까울 수 있다고 느끼게 해준 것이다. 물론 부모님은 짧은 내 약혼시절에 가장 행복해 하셨다. 그리고 이 약혼은 약혼자와 내가 다른 방향으로 떠날 때도 여전히 유효했다. 그는 아프리카 카메룬에 있는 어떤 교구에서 일하기로 약속했고, 나는 말릴 수 없이 한국에 끌렸다! 우리는 2년 후에 하느님께서 우리가 아프리카에 살기를 원하시는지, 한국에서 살기를 원하시는지 보기로 합의했다.

 

그동안 한국으로 갈 우리 열한 사람(사제, 수사, 수녀, 평신도)은 모두 비행기가 아니라 배를 타기로 했다. 그 당시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학교)가 가난해서 음악과에 피아노가 부족하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비행기에는 한 사람당 20kg이 고작인데 화물선에는 한 사람 당 200kg이 허용되었다. 그리고 영국에서 내 친구들은 피아노 7대를 모아 주었다. 그중 한 대는 외할머니 거였다! 이 피아노를 싣고 우리는 1959년 10월 말에 독일 함부르크에서 출발했다. 그 여행 이야기는 다음에 하기로 한다.

 

 

1) 선교 준비 모임으로, 다른 나라에 선교하러 가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운동. 사제, 수녀, 부부, 기혼자, 미혼자 등 선교사가 되고 싶은 사람이면 누구나 참여 가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