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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가는 성지
반주골, 한국 최초의 영세자 이승훈(베드로)


글 박정길(마르코)|형곡성당

 성지를 소개하기 전에 드릴 말씀은, 요즘은 스마트폰을 많이 사용하고 있어 성지 이름 내지는 주소를 휴대전화 내비게이션에 입력하면 바로 안내를 받을 수 있고, 또 좬한국 천주교 성지순례좭 책자에 성지마다 교통편이 상세하게 나와 있어 필자는 성지를 찾아가는 과정을 생략했다. 둘째는 성지 소개를 마치 감상문 쓰는 형식에서 벗어나 순교자와 증거자들의 삶을 우리의 삶과 일상에 끌어들여 접목시키는 노력을 해보고 싶었다. 이 작업을 통해 신앙 선조들과 우리는 별개가 아닌 공동선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성지를 어떤 마음으로 순례하느냐에 따라 보고 느끼는 것도 다 다르다. 지금 순례 중인 전국의 신자들과 필자와 동행하는 신자들도 구경꾼이 아닌 순례자로 신앙 선조들의 강건한 믿음과 지칠 줄 모르는 사랑을 닮아가는 순례 여정을 통해 ‘은총의 가랑비’가 풍성히 내리기를 바라며 기도한다.

성지를 찾아가다 보면 단번에 찾을 때도 있고 몇 번을 돌아서 어렵게 찾아갈 때도 있는데 반주골은 후자에 속한다. 3년 전 순례 왔을 때가 그랬다. 지금도 안내에 따라 다른 길로 들어갈 때가 많은데 성지개발이 안 됐을 때 순례하신 분들은 어땠을까? 또 초대교회는 어떠했을까? 오늘 찾아가는 성지가 바로 이런 곳이다. 폐쇄적인 조선 시대에 천주교를 받아들여 험준한 산과 우거진 숲을 헤쳐 가며 천주교의 새 길을 만들어 준 신앙 선조들……. 이분들의 노고가 있었기에 잘 다듬어진 길을 가면서도 별로 고마워할 줄 모르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에 길든 버릇임을 반성한다. 길을 만들고 그 길을 최초로 가신 창립 주역 이벽(세례자요한)에 이어 두 번째로 만날 선조는 이승훈(베드로)이다. 우리는 이분을 만나기 위해 인천시 남동구 정수사업소 뒤쪽 소로길로 접어들었다.

 

한국 최초의 영세자 이승훈(베드로)

정수사업소 붉은 벽돌담을 끼고 돌면 벽돌담 대신 철조망이 쭉 처져 있는데 텔레비전으로 보던 전방 철책선과 비슷했다. 이중으로 처진 철조망 사이로 감시 카메라가 보였다. 정수시설이니 안전과 보안에 치중할 수밖에 없겠지만 이런 길을 계속 올라가자니 이상하게도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벽을 느꼈다.

이승훈은 1756년 부친 이동욱(李東旭)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호는 만천(晩泉)이다. 1780년(정조 4년) 24세의 젊은 나이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갈 수 있었고 문과에 응시할 자격을 얻었으나 벼슬길을 단념하고 명문가인 마재 정 씨 가문 정약용의 누이동생과 결혼한다. 앞서 천진암에서 소개했듯이 석학 이벽 선조와 교분을 갖게 되었고 천진암 강학회 이후 1783년 말 부친 이동욱이 동지사〔(冬至使) 조선시대 명나라와 청나라에 동지를 전후하여 보내는 정례사행〕 서장관〔(書狀官) 사신으로 사행 중에 매일 매일의 사건을 기록하고 돌아온 뒤에는 왕에게 견문한 바를 보고하는 직책〕에 임명되어 이승훈도 함께 북경으로 가게 되자 이벽 선조는 그를 붙들고 “베이징에 가면 서양 신부를 만나 천주교 서적을 꼭 구해오라.”며 신신당부했다. 이벽 선조의 간절한 청을 들어주기 위해 북경 북당에서 예수회 선교사를 만난 이승훈은 뜻밖에 교리를 배우게 되었고, 이듬해 그라몽 신부로부터 ‘베드로’로 세례를 받아 한국 최초의 영세자가 되었다.

귀국하여 이벽 선조에게 세례를 주고 다시 이벽 선조로 하여금 최창현, 최인길 등에게 세례를 베풀게 했다. 1785년 서울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서 종교 집회를 시작으로 신자 공동체를 만들었고 마침내 한국 천주교회를 창설하는 데 밑거름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을사추조적발사건’이 발생하자 그는 천주교 서적을 불태우고 벽이문〔(闢異文) 천주교를 이단으로 배척하는 글〕을 지어 첫 번째 배교를 한다. 이 시기는 안타깝게도 이벽 선조가 가문처형을 당해 요절한 해였다.

하지만 그는 1786년 교회로 돌아와 무너진 천주교를 다시 세우려고 권일신과 의논한 끝에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를 만들고 권일신, 이존창, 유항검 등 10여 명이 신부와 주교가 되어 미사집전과 고해성사, 견진성사를 집행했다. 당시 베이징의 주교가 이 광경을 봤다면 기절할 일이지만 열심한 자매들이 몇 날 며칠을 밤새워 만든 제례복을 차려입고 정성을 다해 성사를 집전하는 것을 지켜본 신자들은 황홀하다 못해 감격의 눈물을 흘렸을 것이며 가성직자들도 위로와 힘을 얻었을 것이다. 1787년 겨울에는 정약용, 강이원 등과 함께 반촌(현재의 혜화동)에서 교리를 연구했다. 이승훈 선조는 1789년 평택 현감에 등용되어 선정을 베푸는 한편 신품성사의 의문을 발견한 유항검의 이의로 1790년 윤유일을 북경에 밀사로 파견하여 진상을 알아보게 했는데 그가 돌아와 가성직 제도와 조상 제사를 금지한 북경 교구장 구베아 주교의 명을 차례로 전하자 이승훈은 조상 제사 문제로 다시 교회를 떠났다.

1791년 진산에 사는 윤지충이 구베아 주교의 명대로 제사를 지내지 않은 사건으로 말미암아 권일신과 함께 체포되어 평택 현감 재직 시 향교에 배례하지 않았던 사실과 1787년 반촌에서 서학서를 공부했던 사건이 문제되자 다시 배교, 관직을 삭탈 당하고 석방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 이듬해 3월 22일 이가환, 정약용 등과 함께 체포되어 의금부의 국청에서 배교했으나 정약용은 유배되고, 4월 8일 정약종(아우구스티노), 홍낙민(루카), 홍교만(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등 6명과 함께 참수되었다. 이승훈 선조는 비록 여러 번 배교했으나 초기 한국 천주교회를 주도했고, 가성직제도를 만들어 교회의 첫 장을 열었으니 한국 천주교회에 있어 중요한 인물이다.

 

우리는 마지막을 어떻게 장식할 것인가?

 10여 분 산길을 올라가니 나무숲 사이로 십자가와 비석이 보였다. 비석에 작은 초상화가 붙어 있어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이승훈 선조에 있어 40년의 세월은 바람 앞의 등불과 같았을 것이다. 가성직제도 및 제사 금지 등으로 배교를 반복하면서 순교하는 신자들을 볼 때 어떤 생각을 했을까?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을 기념하여 지금은 천진암 성지 이벽 선조 왼쪽에 묻혀있지만 반주골의 묘는 우리 순례자들에게 많은 깨우침을 주며 우리들의 믿음을 되짚어보게 한다. 이승훈 선조의 배교는 우리가 다 아는 약전(略傳)에 남아 있으나 박해도 없고 제사 문제로 갈등할 필요도 없는 자유로운 세상에 사는 우리는 어떤가? 드러나게 표시가 없다뿐이지 우리도 불충과 배교를 거듭하며 사니 별반 다를 게 없다. 아쉬움이 남는 것은 이벽 선조에게 등 떠밀려 베이징에 가지 않고 이승훈 본인의 확고한 의지로 가서 세례를 받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베드로 사도가 잡혀 계신 예수님을 옹호하러 간 것이 아니라 구경꾼으로 생각 없이 따라갔다가 세 번 배반한 것과 맥을 같이하기 때문이다.

우리도 이처럼 생각 없이 나서지 말고, 무슨 일을 하든지 매사에 분명하게 지향을 두는 것이 좋다. 분명한 지향 없이는 분명한 믿음과 행동이 나올 수 없으므로 이 교훈을 이승훈 선조가 새해 우리에게 주는 덕담으로 받아들이면 더 이로울 것이다. 바로 밑에는 두 아들의 묘가 있는데 장남은 비신자이고 삼남인 이신규(마티아)는 병인박해 순교자다. 두 묘를 비롯하여 흩어져있는 묘들을 보면서 한 번 죽으면 그만이고 그때를 되돌리지 못하는 죽은 자가 산 자에게 이런 당부를 하는 것 같았다.

“이보게, 선배로 말하니 눈에 보이는 것과 썩어 없어질 몸을 가꾸고, 먹고 사는 일에 시간을 너무 허비하지 말게. 골수에 새겨 신경 쓸 일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이웃에게 내어주는 삶을 살아야 하네. 생각보다 허락된 시간이 짧으니 미루지 말게. 하느님께서 자유의지를 주셨으니 자네의 십자가는 자네의 삶으로 완성하기까지 미완성이라는 것을 유념하며 사시게!”

자주 듣는 이 말이 오늘따라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이승훈 선조가 참수 직전에 후회와 자책으로 한시(漢詩)를 읊었다. (초반부 생략) “남이 나를 배교했다 말하더라도 내 신앙은 천주 안에 그대로 남아있고, 물이 비록 못 위로 치솟아도 그 못 속에 온전함같이 내 목숨 앗아가도 내 신앙은 변함없다.”

필자도 젊은 혈기로 십자가에 저항하며 온갖 죄를 짓고 부끄럽게 산 날이 많았음을 고백하며, 그때 불려갔더라면 내 영혼 어찌 되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 정신이 번쩍 들고 머리끝이 쭈뼛 선다. 오래 참아주시고 시간을 연장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어제보다 좀 더 잘 살아보려고 노력하지만 제대로 썩지 못하고, 제대로 녹지 못해 생생하게 살아있는 나를 볼 때가 더 많다.

 

“늦게야 님을 사랑했나이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나이다.”

- <성 아우구스티노 고백록>(10권) 중에서

 

 

* 반주골 성지 : 인천시 남동구 장수동 산 1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