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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과 함께여서 행복하여라 - 제5화
배 위에서 성소를 찾을 줄이야!


글 양 수산나|대봉성당

 

함부르크에서 부산까지 타고 온 배는 일본 화물선이었다. 우리 일행 열한 명과 일본인 한 명이 승객의 전부였다. 영국 해협에서 거칠게 대서양으로, 그 다음에는 지중해를 통과해서 동쪽으로 잔잔하게 항해했다. 첫 기항지는 알렉산드리아였다.

알렉산드리아! 서양 역사와 문화에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도시! 우리는 거의 하루 종일 알렉산드리아의 위대한 학자들과 성인들의 발자취를 따라 걸으며 서방과 그리스도교 역사의 향기 속에 행복하게 푹 잠겼다. 다음 기항지는 카이로였는데 아쉽게도 피라미드를 볼 시간이 없었다. 그리고 수에즈 운하를 거쳐 출애굽의 추억을 되새기며 계속 항해했다. 나날이 하느님께서 부르고 계시는 한국에 다가가고 있었다. 한 달 반 동안 항해하면서 영어를 거의 못하는 일본인 직원들과 햇빛이 눈부신 배 위에서 갑판골프를 쳤다.

인도양을 지나면서 기도할 시간이 많았고 나는 갈수록 결혼에로 부름을 받고 있다는 확신이 점점 줄어들었다. 내 손가락에는 아직 약혼반지가 끼워져 있었고 그 남자에 대한 애정도 있었지만 하느님께서 내 몸과 마음이 오로지 당신께만 속하기를 원하시는 것 같았다. 게다가 나와 아주 친해진 마리아 하이센베르거는 내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한국으로 떠나기 전 나는 순례하러 루르드에 가서 마리아를 만났다. 그녀는 성모님이 벨라뎃다에게 발현하신 동굴에서 아주 가까운 집에 머물고 있었다. 이 집은 ‘사도직협조자’라는 성소자들을 위한 양성센터였다. 마리아에게는 그 센터에 사는 사람들이 일종의 단체로 보여서 처음에는 성소에 관심이 없었다. 서정길 주교님께서 마리아에게 어떤 단체에도 속하지 말 것을 요구하셨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한 다리는 그 단체에 걸치고 다른 한 다리는 교구에 걸치게 된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그 센터에 사는 사람들이 나에게 성소에 대해 설명할 때 그들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점, ‘주교의 부름’에 대해 한 마디도 말해주지 않아서 나는 특별한 매력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일반 신자의 삶과 별로 다른 점이 없어서)

그러나 마리아는 배 위에서 내게 좀 더 이야기해 주었다. 마리아는 루르드에서, 주교가 젊은 여자평신도를 자기 교구 내에서 하느님 나라에 봉사하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불러 평신도 수준에서 자기의 사도직에 참여하도록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주교의 부름으로 그 여자는 어떤 단체에도 속하지 않고 주님의 교회를 위해 주님께만 소속된다. 주교는 그 여자를 ‘사도직협조자’로 불러 일반 사회의 한가운데 사는 사명을 주고 그런 삶을 살 수 있게 적절한 양성을 받도록 마련한다. 마리아는 이런 식으로 살도록 서 주교님께서 불러주실 것인지 여쭤볼 작정이었다.

 이 말을 듣자 나는 약혼반지가 내 손가락에서 스르르 빠져나가기 시작한다고 느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내가 수녀원에 들어가는 것을 막으셨고, 이번에는 내 약혼자와 빨리 결혼하는 것을 막으셨다. 그분께서는 내가 서 주교님을 통해 하느님의 부르심에 답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나에게 보여주시려고 나를 꼭 잡고 계신 것처럼 보였다. 마리아는 이런 일이 내 안에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지만 그것을 혼자 간직하고 있었다. 반지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배에서 나에게 고해성사를 주신 신부님은 내가 빨리 결정을 해서 그리스도에게만 속하도록 격려해 주셨다.

이제 큰 발걸음, 한국 땅을 디디는 첫 발걸음이 이루어졌다! 알렉산드리아, 카이로, 마닐라와 홍콩을 거쳐 함부르크를 출발한 지 5주 반 만에, 1959년 원죄없는 잉태 축일 아침 해가 뜰 무렵 아름다운 한국의 민둥산1)들이 이른 햇살을 받아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을 때 우리 배는 부산항에 들어왔다. 당시 한국과 일본의 관계 때문에 우리는 부두에 들어가지 못하고 신부님 몇 분이 작은 배를 타고 우리를 마중 나왔다. 또 다른 배 한 척은 피아노를 싣고 낙동강으로 해서 대구로 가게 되었다. 우리는 함께 여행한 일본인 직원들과 작별하고 한국 땅에 첫 발을 디뎠다. 순교자들의 피에 젖은 땅에. 그리고 우리 가슴은 노래를 불렀다. 감사의 마음으로, 그리고 우리의 새로운 나라를 위한 사랑의 기도로.

우리는 부산 주교님을 뵈러갔다. 가는 길을 따라 처진 울타리에 기대 판자와 함석으로 만들어진 판잣집에 피난민들이 살고 있었다. 그 안에 아이들이 촛불을 켜놓고 공부하고 있었다. 12월의 아침은 매우 추웠고 가난한 사람들은 최소한의 보호도 못 받고 있는 것 같았다. 부산의 최 주교님은 우리를 따뜻이 맞아주시고 아주 소박한 가구가 놓인 당신의 식당에서 손수 우리에게 점심을 차려주셨다. 세 분의 사제들은 전주로 떠나시고 남은 사제 한 명과 두 수사님과 수녀님들(모두 베네딕도회원인데 그 중에는 벌써 북한에서 고통을 받고 추방되었다가 두 번째로 입국하시는 분들), 그리고 마리아와 나는 대구로 왔다. 마리아와 나의 대구 정착이야기는 다음에 하겠지만 내가 어떻게 나의 성소를 마침내 찾게 되었는지는 이 달에 끝내겠다.

나는 먼저 영국으로 떠나는 한 친절한 군인에게 약혼반지를 주어서 내 약혼자에게 전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약혼자에게 고통을 주어 미안하다, 이제 다른 부름을 확신한다고 편지를 썼다. 그 반지는 인도에서 도둑 맞았단다! (인도의 가난한 가족이 먹을 게 더 생겼으리라.) 나는 반지가 더 이상 의미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둘 다 더 행복할 것이라고 거듭 그 군인을 안심시켰다.

 나는 처음부터 항상 사도적이면서 동시에 관상적인 길을 찾고 있었다. 예수의 작은 자매회가 매력이 있었던 이유도 이것이었다. 마리아와 이야기를 나눌수록 그것이 더 분명해졌다. 사도들의 후계자의 부름을 통한 사도적이고, 매일매일 순수한 긴 기도 시간과 함께 끊임없는 기도로 관상으로 머물 때 성령께서 사도 안에 활동하시도록 허락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영국 예수회 지도 신부님께 내가 알게 된 성소를 살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시느냐고 편지를 썼지만 답이 없었다. (당시 젊은이들은 지도 신부에게 순명했다.) 두 번째 편지를 보냈지만 여전히 답이 없었다. 세 번째는 “신부님, 서 주교님께서 다음 달에 유럽에서 한국으로 돌아오시는데 그때까지 답이 없으면 내가 대구교구를 위해 사도직협조자로 불러주시겠는지 그분께 여쭤보려고 합니다.”라고 썼다. 이 세 번째 편지조차도 답을 받지 못했다.

서 주교님께서 돌아오셨고 신부님의 통역으로 우리는 이 성소가 어떤 것인지 주교님께 설명을 드렸다. 그분은 당신 교구를 위해 이런 형태의 삶을 살도록 기꺼이 한국 여자들을 부르겠다고 하시고 마리아와 나를 후보자로 받아들이셨다. 나는 이 사실을 영국의 영적 지도신부에게 알렸다. 답이 왔다. “수산나야, 나는 매번 같은 주소로 세 번 답장을 보냈다. 네가 뭘 살고 싶은 건지 충분히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결혼을 하든지 수녀가 되는 게 더 좋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 세 번의 편지가 분실된 것을 보니 하느님의 섭리임에 틀림없다. 그러니 나는 기꺼이 너를 축복해 준다!”

한국 우편물에서 분실된 편지는 오직 이 세 통의 편지뿐이다.(훨씬 나중에 딱 한 번 더 있었고.) 나는 하느님께서 그토록 분명한 표징을 보여주셔서 깊은 감동을 받았다! 나는 대구교구(지금은 대교구) 사도직협조자로 살아온 것이 참으로, 참으로 행복하다. 그리고 하느님께 온 마음으로 감사드리고 한국교회에도 감사한다.

다음에는 하느님께서 내가 대구에서 무엇을 하도록 이끌어주셨는지 그 첫 발걸음을 이야기 하려고 한다.

 

1) 나무들은 2차대전 때 일본인들에게 모조리 벌목 당했고, 아직 초·중·고 학생들이 다시 심기 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