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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가는 성지
마재 초대 명도회장 복자 정약종(아우구스티노)


글 박정길(마르코)|형곡성당

 도로 옆으로 흐르는 남한강 전경을 가깝게, 때로는 멀리 보면서 굽은 도로를 얼마간 달리다 보면 신양수대교가 나오고, 신양수대교 밑에는 북한강이 남쪽으로 흐르고 있는데 이 두 강이 합류하여 한강(漢江)을 이루는 지점과 인접해 있는 곳이 바로 마재성지다. ‘마재’하면 거룩한 부르심을 받은 복자 정약종 선조의 고향이자 새로운 조선을 꿈꾼 최대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의 유적지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마재성지에서 유적지까지는 차량으로 2분이면 갈 수 있다. 그곳에 가면 형제들이 살았던 여유당 생가터와 다산의 묘가 있으나 이번 달은 창립 선조의 한 명인 복자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을 만나야 하기에 정약용(세례자 요한)은 다음 기회에, 강진 유배지나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수원성지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

정약종(丁若鍾)은 1760년 진주목사(晋州牧使) 정재원(丁載遠)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약현, 약전은 형이며, 실학자 약용은 동생이다. 큰아들 철상(가롤로)은 본처의 자식이고 사별 후 후처로 들어온 유조이(체칠리아)한테서 하상(바오로), 정혜(엘리사벳)가 태어났는데, 모자녀(母子女)는 103위에 오른 성인들이며, 복자 정약종(아우구스티노)과 복자 정철상(가롤로)은 2014년에 시복되었다. 순교자들의 가계 관계를 맞춰보지는 않았으나 한 가족이 전부 시복, 시성 되는 경우는 드물 것이다.

 

가계 관계와 지리적 조건

마재에서 바라보면 멀리 천진암 앵자봉 능선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권철신(암브로시오) 형제가 살고 있는 양근(陽根)과도 지척이며, 마재 앞 한강을 건너면 이벽 선조의 집이 가깝다. 이런 계기로 한국 교회 창립 선조들은 마재에서 멀지 않은 주어사 천진암에 모여 천주학을 공부하면서 차츰 교회의 기틀을 다지는 요람이 된 것이다.

맏형 약현의 부인이 창립 주역 이벽 선조의 누이이며, 맏딸은 정난주(마리아)이고, 사위는 백서로 잘 알려진 황사영(알렉시오)이다. 또한 정씨 형제의 누이가 한국 최초의 영세자인 이승훈(베드로)의 부인이었으니 이런 가계로 보아 정씨 형제가 일찍이 천주교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선조 정약종은 천성이 곧고 매사에 신중했으며 천주교의 참된 이치를 깨닫고자 노력했다.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온 이승훈(베드로)이 강학회 회원들에게 세례를 줄 때 그는 입교를 서두르지 않았다. 좀 더 많은 교리서를 탐독하며 신앙을 받아들일 준비를 한 후, 1786년에 세례를 받았고, 세례를 받을 때에 입교를 앞두고 망설이던 자신의 모습이 성 아우구스티노(354-430)의 회심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여 이 위대한 성인을 영세 주보로 모셨다. 그는 입교 후 천주교 교리를 더 깊이 연구함으로써 당대에서 교리지식이 가장 뛰어났다.

1786년 정약종 선조는 신앙의 자유를 찾아 그의 식솔을 데리고 현재의 한강 팔당댐을 건너 광주 분원으로 이주한다. 그러나 1800년 5월에 그의 동네인 양근에서 박해가 일어나자 다시 한양(지금의 서울)으로 이사했다. 1794년 12월에 입국한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를 만나 자주 긴밀히 접촉하고 자기 집에 여러 번 모시기도 했다. 이 무렵 유조이와 정하상, 정정혜가 주문모 신부한테서 세례를 받는다. 정약종 선조는 한문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 여러 한문본 교리책에서 중요한 것을 뽑아 평민도 쉽게 알 수 있도록 우리말 『주교요지(主敎要旨)』 상·하 두 권의 교리서를 만들어 전교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 책은 우리말로 된 최초의 교리서로 주문모 신부도 이 책을 보고 중국의 교리서인 『성세추요』보다 낫다고 칭찬하며 이를 널리 권장토록 했다. 정약종 선조의 열성에 탄복하여 교리 강습회인 ‘명도회’가 만들어졌고, 초대 명도회장에 정약종 선조가 임명되었다. 그는 또한 교리서를 종합 정리하여 성교전서(聖敎全書)를 쓰려 했으나 박해로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세상에 휩쓸리지 않고 앞만 보고 가는 거북이 신앙

1801년(순조 1년) 신유대박해가 일어나 포졸들의 추적이 심해지자 정약종 선조는 신변의 위험을 느껴 성상(聖像)과 교리서적, 그리고 주문모 신부의 편지 등을 고리짝에 넣어 사람을 시켜 옮기게 했다. 그러나 포졸들이 밀도살한 쇠고기를 운반하는 것으로 오인하여 포도청으로 끌고 가는 바람에 어이없게도 그만 진상이 드러나고 말았다. 그는 고리짝의 내용물이 모두 자기 것임을 시인했으나 주문모 신부에 관한 일은 일체 함구하면서 나라에서 천주교를 금함은 오히려 부당하다고 항변했다. 이런 호교적 자세는 결국 왕명에 도전하는 불경죄가 되었다. 지금은 잘 쓰지 않으나 압수된 그의 일기 속에 세상, 마귀, 육신 이 삼구(三仇)는 천주교 신자들이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항상 대적할 원수라고 적었는데, 여기서 ‘세상’이라는 표현이 정부를 지칭하는 말로 간주되어 국가 전복의 모반죄로 정죄되었다. 정약종 선조는 “땅을 내려다보면서 죽는 것보다 하늘을 쳐다보면서 죽는 것이 낫다.”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1801년 2월 26일(음력) 대역무도죄로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다. 선조의 유해는 1981년 화성군 반월면에서 이장되어 천진암 성지 이벽 선조 왼쪽 끝에 모셔져 있다.

성지 현양 동산에서 정약종 선조를 묵상하던 중 이솝우화에 나오는 거북이가 생각났다. 이승훈이 세례를 줄 때 그는 대열에서 빠졌다. 이후에도 모임이 잦았을 것이며 그때마다 혼자만 세례를 받지 않았으니 이상한 눈치를 자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정약종 선조는 남이 뭐라던 2년간 의문 나는 교리를 묻거나 독학한 다음 세례를 받았다. 이런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에 순교의 길을 당당히, 기쁘게 갔으리라. 우리 신자들은 이미 안전한 길로 들어왔으니 거북이처럼 앞만 보고 가야 하는데, 무리 중에는 얇은 귀로 너무 많은 것을 듣다 보니 혹 길을 잘못 든 것은 아닌지 방황하는 토끼들도 더러 있다. 정철상은 부친의 강건한 신앙을 지켜보며 성장했고 옥바라지를 하다가 부친이 순교하자 명에 따라 체포되어 4월 2일(음력) 최필제, 정인혁 등과 서소문에서 참수되어 아버지의 길을 따랐다.

가장이 대역무도죄로 처형되자 재산이 몰수되고 가족은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었다. 유소사(41세)가 하상(7세)과 정혜(5세)를 데리고 갈 곳은 시동생 정약용의 집밖에 없었다. 천주교 집안으로 지탄받아 평판이 흔들리고 가세가 몰락할 판에 더부살이가 오니 반길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더구나 다산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를 간 후였다. 유소사가 갈수록 심해지는 냉대와 구박을 받으면서 수년 동안 허접스러운 일과 삯바느질을 하며 견딘 것을 보면 그녀의 믿음과 덕행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정약종 선조의 거북이 같은 믿음이 밑거름되었고 그 거름은 신앙의 자양분이 되어 마침내 기해대박해에 성직자 영입과 교회 재건을 위해 투신해 온 정하상(바오로)은 9월 22일 서소문 밖에서, 유소사(체칠리아)는 고령에다 여독이 깊어 11월 23일 옥사했으며 정정혜(엘리사벳)는 12월 29일 서소문 밖에서 순교했다. 박해 연도대로 시복 시성이 이루어졌더라면 좋았을 터인데 아버지보다 늦게 순교한 모자녀(母子女)가 먼저 성인품에 오른 것이다. 어쨌든 마재는 거룩한 부르심의 땅, 성가정 성지라고 불릴 만하다.

오늘을 사는 우리 가정도 모두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믿지 않는 부모나 냉담 중인 자녀가 있다면 가족 중에 한두 명이라도 신앙의 심지를 켜고 거북이처럼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누가 알아주지 않고, 때로는 멈추고 싶고 끈을 놓고 싶은 유혹이 오더라도 신앙 선조들의 끈질긴 신앙을 본받아 이 길을 가야 한다. 이런 모습을 보고 또 보고, 또는 듣게 된다면 그들도 바뀔 때가 분명 오기 때문이다. 유소사(체칠리아)는 38년 동안 온갖 냉대와 핍박을 받으면서도 신앙의 심지를 끄지 않았으며 자녀들의 바람막과 버팀목 역할까지 성실히 해냈다. 성녀의 모범을 통해 우리는 위로와 용기를 얻을 수 있다. 또한 성녀는 103위 성인 중에 79세로 최고령자였으니 우리의 모든 것을 들어주고 다독여 주며 하나하나 신경 써주는 친할머니 같은 느낌이 들어 더 정감이 간다.

성녀 유소사(체칠리아), 신앙생활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모든 가정을 위해 빌어주소서.

 

* 마재성지 :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다산로 698-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