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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과 함께여서 행복하여라 - 제7화
가출 소녀들과 새 모험이 시작되고…


글 양 수산나|대봉성당

 

1962년 초 어느 날 우리 소년의 집에 저명인사 두 분이 찾아왔다. 경북도지사와 대구시장이었다. 그분들은 박정희 대통령이 정권을 잡았을 때 군인이었다. 박경원 지사(95세인 지금도 매우 건강하시고 여전히 좋은 친구이다)는 우리가 하는 일을 아주 좋아하셔서 주교님께 “두 외국 여자들이 깡패들을 친동생처럼 대하는 그 정신으로” 가출 소녀들을 위한 사업을 시작해 달라고 청했다.

내가 유럽에서 장티푸스를 앓은 후 회복되고 있을 무렵 마리아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서 주교님께서 나는 소년들 일을 계속하고 너는 소녀들을 위한 일을 같은 정신으로 시작하라고 하신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급히 대구로 돌아왔다. 우리 본당신부님은 나와 일할 훌륭한 협력자 두 분을 찾아 놓았다. 한 분은 채 데레사라고 빼빼하고 명랑한 기혼 여성으로 낮 동안 우리와 일할 분이고, 류영숙 루시아는 나보다 세 살 많은 따뜻하고 둥글둥글한 지성인으로 함께 살 분이었다. 이분은 나의 한국인 절친이 되었다. 데레사는 남편이 서울로 이사 갈 때 우리를 떠났지만 돌아가실 때까지 좋은 친구요 도우미였다.

박 지사는 오래된 일본 적산 가옥 두 채를 우리가 돈을 모아 살 수 있을 때까지 빌려주었다. 방 몇 개는 온돌이었고 나머지는 다다미방이었다. 두 채가 나란히 있어서 마당은 하나지만 크고 넓었다.

 

우리 ‘가톨릭여자기술학원’에 처음 온 여자 아이들은 비가 오는 날, 비를 쫄딱 맞아서 더 어려보이고 애처로워보였다. 이들은 바로 의료검진을 받았다. 그들은 기술학원에서 양재, 미용, 기계로 하는 뜨개질 등의 기술을 배울 수 있었다. 이 부분의 이야기를 쓰기 위해 나는 1960년대 중반에 영국 독자들을 위해 쓴 책을 다시 읽었다. 다음은 거기서 인용한 것이다.

 

“건강이 회복되자 그들은 비로소 다른 것에 마음을 돌릴 수 있었다. 데이트와 음주가 확실하게 줄어들었다.(그런 류의 데이트를 3, 4일 지켜보니 깨끗이 끊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들이 더 신선한 공기를 마실수록 겉꾸미는 것이 사라지기 시작하고 사랑과 보호가 필요하다는 것이 표면에 나타났다. 그들의 정복에 대한 무용담과 야한 농담에 터지는 웃음과 몸짓이 가정에 대한 그리운 추억과 공상으로 바뀌었다.”

  

“그들 모두에게 우울증이 무겁게 내리눌렀다. 우울증이 심해지자 반복되던 도망의 유혹이 빠르게 되살아났다. 그것이 알코올이든 뭐든. 세 아이가 첫 주에 떠났다.”

 

“밤이면 긴장이 최고조에 달해서 유흥가로 달려가고픈 이 갑작스런 집단적 절실함을 넘어서는 유일한 방법은 막걸리를 담은 커다란 주전자가 대문으로 스며들어 오는 것을 못 본 체하는 것이었다. 한 시간쯤 술주정에, 춤에, 고함 소리가 난 후 모두가 결국 바닥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나는 처음 몇 년 동안 춤을 추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나에게 트위스트부터 시작해서 최근의 춤까지 가르쳐 줄 수 있어서 신이 났었다! 처음에 온 아이들이 자리를 잡자 새로운 아이들이 한 무리 대신 하나씩 둘씩 합류하면서 거친 춤들이 잦아들었고 비로소 나는 다시 ‘얌전하게’ 머물 수 있게 되었다.”

 

다른 직원들은 그 시대 한국 여성들이어서 함께 술을 마실 수 없었다. 나는 우리 시대 젊은 서양 여자로서 그들과 술을 많이 마시고도 그들이 모두 바닥에 쓰러져 잠들 때까지 멀쩡할 수 있었다.

 

“천주교 신자 아이 하나는 직장을 구하려다 사창가에 팔렸는데 3일 동안 꿋꿋하게 버티다가 맨발로 소지품도 두고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 아이는 제일 가까운 성당에 뛰어갔다. 신부님은 그 아이가 보복을 당할까 봐 돈을 주어 몸값을 치르게 했다. 그 아이는 자기를 착취할 뻔한 포주 앞에 돈을 집어던지고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도와준 신부님께서 그 아이를 우리에게 데려다 주었다.”

“한 아이는 가출 소녀도 아닌데 언니를 찾아 우리 집에 왔다. 언니는 우리 집에 머물고 있었다. 온 가족이 너무나 배가 고파 왔다는 것이다.” 그 아이도 우리와 머물게 되었다.

 

이 ‘학원’(지금의 푸름터)의 직원들은 모두 내가 한국에 잘 적응하도록 도움을 주었다. 옛날 책을 다시 인용한다.

“루시아는 예를 들어 나만큼 관료들의 아첨, 비위맞추기와 기회주의를 싫어한다. 그러나 내가 계장 같은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전화상으로 솔직하게 따질라치면 옆에서 전화기를 낚아채서 장난스럽게 싱긋 웃으며 본심과는 다르게 기름칠을 한다. 그녀는 내 생각에 동의하지만 내 방법에 동의하지 않는다. 상사에게 잘 보이기 위해 형편없는 짓을 하는 공무원이라도 최소한의 체면을 살려 줘야 한다는 것이다. 전화기를 놓고 나면 루시아는 나를 앉혀 놓고 호되게 야단을 친다. 솔직한 것은 친한 친구들에게만 통하는 것이라고.”

 

그 책에는 “루시아로부터 배운다”는 제목으로 하나의 장이 할애되었다. 다음 달에는 루시아와 많은 다른 이들이 내게 베푼 도움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