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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문화와 영성 (20)
풍랑을 가라앉히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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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송창현(미카엘)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복음서는 예수님에게서 일어난 일에 대한 기록이다. 특히 복음서는 예수님 사건을 기쁜 소식으로 전하며 그것의 현재적 의미를 해석한다. 따라서 복음사가는 예수님에게서 일어난 일의 의미를 찾는 예수님 사건의 해석자이다. 우리가 복음서를 읽는다는 것은 예수님 사건이 가지는 과거의 의미뿐 아니라 현재적 의미를 해석하는 것이다. 우리는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갈릴래아 호수의 풍랑을 가라앉히신 이야기를 읽는다. 이 이야기의 의미는 무엇일까? 복음사가는 그 의미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 우리는 그 사건의 의미를 탁월한 화가 렘브란트의 그림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 렘브란트의 〈갈릴래아 호수 풍랑 속의 그리스도〉

● 네덜란드 레이덴에서 1606년에 태어나 성장한 렘브란트는 1631년부터 암스테르담으로 가서 활동하게 된다. 그곳에서의 활동 초기에 그는 성경의 다양한 이야기를 그렸다. 1633년에 렘브란트가 그린 〈갈릴래아 호수 풍랑 속의 그리스도〉(Christ in the Storm on the Sea of Galilee)는 캔버스에 그린 유화로 160×127cm의 크기이다.

● 이 작품은 미국 보스톤의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박물관(Isabella Stewart Gardner Museum)에 소장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작품은 1990년 3월 18일에 도난당했다. 당시 도둑들은 경찰복장을 하고 박물관에 침입해서 이 그림과 다른 12점의 작품을 훔쳐갔다. 현재 이 사건에 대한 조사는 계속 진행 중에 있으며 박물관은 렘브란트의 그림이 있었던 그 위치에 빈 액자만을 전시하고 있다.

 

■ 갈릴래아 호수의 풍랑 이야기

● 예수님이 사셨던 기원후 1세기의 팔레스티나는 지리적으로 북쪽에는 갈릴래아 호수와 요르단 강을 동쪽 경계로 하는 갈릴래아 지방, 그 남쪽은 사마리아 지방, 그리고 그 남쪽은 유다 지방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갈릴래아 호수는 성경에서 킨네렛 호수, 티베리아스 호수, 겐네사렛 호수 등 다양하게 불리는데, 호수의 동서의 너비 중 가장 넓은 데가 약 12km이고 남북 길이는 약 21km로서 전체 호수의 둘레는 52km 정도이며, 호수의 수심은 약 40m이다. 호수 주변은 산들로 둘러싸여 있다. 호수의 수면은 통상 평온하지만 강한 바람이 산 사이로 불면 갑작스런 돌풍으로 큰 파도가 일어나기도 한다. 갈릴래아 호수에서 자주 발생하는 이러한 자연 현상은 복음서에 나오는 풍랑 이야기(마태 8,23-27; 마르 4,35-41; 루카 8,22-25)의 배경이 된다. 기원후 1세기 당시의 사람들은 자연의 힘에 의한 위험을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마르 4,35-41의 본문을 중심으로 살펴보려 한다.

우리 본문의 시작인 35절에서 시간적인 배경이 바뀌는데 “그날 저녁이 되자”로 표현된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고 말씀하시고 배를 타신다. 따라서 우리 본문은 갈릴래아 호수라는 공간적인 배경에서 호수 건너편으로 가기 위해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탄 배에서 일어난 사건을 묘사한다. 여기서 호수 저쪽은 이방인들의 지역인 데카폴리스 지방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군중을 남겨 둔 채 제자들과 함께 같은 배를 타시고 호수를 건너가신다. 이제 한 배를 탄 예수님과 제자들은 운명 공동체이다. 그런데 호수에서 거센 돌풍이 일어 물이 배 안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37절) 이 이야기는 호수의 풍랑을 통해 자연과 인간 사이의 적대적 관계를 묘사한다. 혼돈 세력의 파괴적인 힘은 살아있는 피조물에게 고통을 주며 자연 세계 안에서 여전히 활동적이다.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져서 제자들은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된다. 그들은 이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서 속수무책이다.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라고 말씀하셔서 제자들을 이러한 위급한 순간에 처하게 하신 예수님은 고물에서 주무시고 계셨다. 결국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워 도움을 청한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38절)

마침내 예수님은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에게 명령하신다.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39절) 이 명령은 구약 성경(시편 104,7; 이사 17,13)에서 하느님이 혼돈의 물을 복종시키는 전형적인 방식을 회상케 한다. 풍랑을 가라앉히는 것과 관련된 표현은 “당신 힘으로 바다를 놀라게 하시고 당신 통찰로 라합을 쳐부수셨네.”(욥 26,12)와 “당신께서는 오만한 바다를 다스리시고 파도가 솟구칠 때 그것을 잠잠케 하십니다.”(시편 89,10)에서 발견된다. 엄청난 바다의 풍랑처럼 파괴적인 자연의 힘인 혼돈의 물은 생명을 위협하는데 이것은 하느님에 의해서만 통제된다. 하느님은 혼돈의 물을 가라앉히고 제한하기 때문에 세상은 살아있는 피조물을 위한 안전한 환경이 된다. 이와 같이 언제든 창조 세계를 위험에 빠트릴 수 있는 혼돈의 물은 창조주에 의해 끊임없이 통제되어야 한다. 혼돈에 대하여 창조주 하느님이 꾸짖으시는 것처럼 예수님은 갈릴래아 호수의 풍랑을 꾸짖으신 것이다. 예수님은 혼돈에 거슬러 창조 세계의 평화를 안전하게 하신다. 그러자 바람과 호수는 예수님에게 복종한다. 이렇게 하여 앞선 단계에서 발생한 문제는 해결된다. 이 문제 해결의 주도권은 예수님에게 있다. 우리 본문에서 일어난 변화는 예수님에 의해서 일어났다. 그분은 당신 말씀으로 호수의 풍랑을 가라앉히시는 능력과 권위를 가지고 계신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질문하신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40절) 여기서 겁과 믿음은 대조를 이룬다. 겁은 믿음이 없음을 나타낸다. 제자들은 같은 배에서 예수님과 함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풍랑의 위협 앞에서 두려움에 떨었다. 그분의 현존에도 불구하고, 위기의 순간에 그분이 무슨 일을 하실 수 있는지,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지 못하였던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신뢰하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 본문은 제자들의 질문으로 끝난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41절) 제자들의 이 말은 예수님의 정체에 대하여 질문하고 있다. 이 질문은 제자들의 몰이해라는 모티프와 관련 있다. 예수님을 뒤따르는 참된 제자는 그분이 누구이신지를 이해한다. 그러나 우리 본문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한다. 복음서 안에서 제자들의 몰이해는 겁, 두려움, 믿음 없음, 깨닫지 못함, 완고한 마음 등으로 묘사된다.

이 복음서 본문을 읽는 오늘의 독자인 우리는 어떤 반응을 나타내는가? 사실 복음서를 읽으면서 우리는 제자들의 긍정적인 모습뿐 아니라 그들의 부정적인 모습에서도 공감한다. 왜냐하면 제자들의 부족한 모습에서 우리 자신의 부정적인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에 대하여 오해하고 몰이해했던 제자들처럼 오늘의 우리도 그러하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을 읽고 들어서 잘 알고 있는 우리이지만 아직도 그분이 누구이신지를 잘 알아듣지 못한다. 우리는 여전히 겁을 내고 두려워한다. 믿음이 없고 깨닫지 못하며 마음이 완고하다. 우리가 만일 예수님과 함께 탄 배에서 풍랑을 만난다면 어떤 행동을 할까? 17세기의 위대한 화가 렘브란트는 복음서에 나오는 갈릴래아 호수의 풍랑 이야기를 어떻게 해석하고 표현하고 있는가?

 

* 송창현 신부는 1991년 사제수품 후 로마성서대학원에서 성서학 석사학위(S.S.L.), 예루살렘 성서·고고학연구소에서 성서학박사학위(S.S.D.)를 취득,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성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