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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과 함께여서 행복하여라 - 제8화
하느님이 주교로 점지하신 분


글 양 수산나|대봉성당

지난달에 말했듯이 젊은 여성들과 새로운 일을 하면서 가장 큰 도움을 내게 준 사람은 내 친구, 나중에 내 후임 원장이 된 류영숙 루시아다. 일찌감치 이 일에 합류해서 루시아와 함께 오래 부원장으로 일한 권영순 필립바에게도 특별한 감사를 드리고 싶다.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지만 일일이 언급할 자리가 없다. 

그때는 돈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도움을 준 분들도 있었다. 내가 좀 알고 지낸 한 분은 자기 오토바이 뒤에 나를 태우고 공장 사장들에게 돈을 얻으러 다녔다. 이들 중 많은 분들이 이 약간 이상한 백인 여자 거지에게 돈이나 자기들 공장에서 만드는 물건들, 접시와 대접들 아니면 당시 난방과 요리에 꼭 필요한 연탄을 주었다.

당시 총대리였던 이명우 몬시뇰은 우리들의 ‘지도신부’였는데 그 역할을 정말 잘하셨다. 그분은 어떤 식으로 약간 보수적이어서 “이단들과 성경 공부한다.”고 나에 대해 못마땅해 하셨다. 이 일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에 서 대주교님께서 나의 교회일치 정신에 따라 동산병원에서 선교사 부인들과 성경 공부하는 것을 허락하셨기 때문이었다. 몬시뇰께서는 다른 나이든 신부님과 마찬가지로 라틴어를 아주 잘 하셨는데 공의회 중 어느 날 찾아오셔서 선언을 하셨다. “수산나, 니가 옳았다. 나는 공의회 가르침을 매일 읽고 있는데 우리가 이제 프로테스탄트들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한 형제란다! 그래서 오늘 내가 뭐 했는지 아나?” “몰라요. 말씀해 주세요.” “내가 옆집 목사하고 점심 먹었지!” 몬시뇰다운 모습이었다!

우리들을 많이 도와주신 또 한 분의 신부님이 계셨는데 당시 가톨릭시보 사장으로서 밤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가르침을 라틴어에서 우리말로 여러 시간 번역하셨다. 그분은 바쁘고 피곤하셨는데 자주 우리 집에 오셔서 원조로 받은 옥수수죽(색깔이 노랗다고 기술원 아이들과 직원들이 금죽이라고 불렀다.)과 수제비를 잡수셨다. 당시 기술원이 주교관보다 더 가까웠기 때문이다. 또한 신부님은 우리 아이들이 감옥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성탄극을 하도록 하셨다. 그분은 헌신적인 교도소 담당 사제였다. 그리고 나와 내 동료들을 자주 ‘시립희망원’(아직 가톨릭에 위탁하기 전)에 데려가셨다. 당시 그곳 사람들은 도움도 별로 못 받고 있어서 사람들이 절망원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그곳에 수용되어 있는 아픈 사람들과 악취와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찾아갔다. 이분은 미군들로부터 얻은 음식을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이분이 바로 김수환 스테파노 신부님이다. 이 대단한 신부님과 그토록 가까이 일 할 수 있었던 것은 굉장한 특혜였다. 그분은 나중에 한국의 첫 추기경, 세계적으로 유명한 추기경이 되신 분이다. 그분의 우정은 한결같았다. 마산 주교가 되었다가 서울로 가셨는데 루시아와 내가 찾아가면 언제나 문을 열고 시간을 내주셨고 항상 따뜻한 환영과 관심을 보여주셨다.

서정길 대주교님께서는 대구대교구 사도직협조자들의 양성에서 사제가 하는 역할을 김수환 신부에게 맡길 생각을 하고 그분이 독일에서 공부를 마쳤을 때 이 사도적 삶의 정신을 보장하는 루르드 양성센터에 보내 성소 정신을 잘 알아 오라고 하셨다.

루르드에서 협조자들의 초대를 받아 젊은 스테파노 신부님은 성체 앞에서 하는 3시간 침묵기도를 함께 했다. 나중에 그분은 하느님께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어졌을 때 침묵의 기도 가운데 하느님께 주도권을 드리는 것이 어떤 것인지 경험했다고 말씀하셨다. 그 후로는 마산에서, 그리고 서울에서 침묵 가운데 여러 시간 기도하시는 분으로 잘 알려졌다. 그리고 많은 다른 사제들, 수도자들과 평신도들이 이것을 경험할 기회를 주셔서 각자의 성소 안에서 깊이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도록 도와주셨다. 이 대단한 신부님에 대해서 한 가지 더! 그분이 아직 대구에 계실 때 하루는 서 대주교님과 함께 기차를 타고 가면서 시골 마을을 바라보니 십자가 달린 프로테스탄트 교회들만 많이 보여서 ‘이런 마을을 복음화 하기 위해 뭘 해야 하나?’ 생각했단다.

김 신부님은 한 학교를 가리켰고 두 분은 가톨릭 신자 선생 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래서 김 신부님은 루시아와 나의 협조로 시골 교사들이 가족에게 돌아오는 주말에 초등학교 교사 모임 ‘작은 꽃 교사회’를 시작했다. 대구를 떠날 때까지 김 신부님은 이 모임을 우리 ‘기술원’에서 가졌다.

하루는 선생님 한 분만 출석했다. 신부님께서는 이 한 사람을 위해서 한 시간 강의를 하셨다. 김수환 신부님다운 모습이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다른 교사들도 모두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회원들은 지금도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김수환 신부님을 기억한다.

마산으로 떠나면서 김수환 주교님은 서 대주교님께 청했다. “대구에 외국인 협조자가 두 사람이니까 한 사람은 마산을 위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서 대주교님께서는 마리아가 마산교구를 위해 부름을 받겠는지 물으셨고 그녀는 좋다고 했다. 그래서 마리아는 마산교구로 가게 되었고 나는 대구에 머물게 되었다. 나중에 서울에 가신 김수환 주교님께서는 서울을 위해 한 사람의 외국인 협조자 후보를 찾으라고 하셨다. 벨기에인 여자가 오게 되었다. 그 이후로는 한국인 협조자들이 많이 생겼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1962년부터 1965년까지 열렸는데 우리는 지금도 공의회 50주년을 경축하고 있다. 나는 공의회 전 1956년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한 강한 믿음을 가지고 개종했지만 인간적인 수준에서 보면 ‘코를 막고’ 들어가야 했다. 기독교인들을 갈라진 형제로 보기보다 이단 취급을 한다든지, 평신도들이 성경에 깊이 들어가기에는 너무 무식하다고 생각한다든지, 라틴어로 미사를 드리게 한다든지…. 거룩한 가톨릭교회와 대단히 거룩한 교황님들임에도 불구하고 그 냄새는 아주 안 좋았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 모든 것을 바꾸었다. 공의회 참석 후 대구에 돌아오신 서 대주교님께서는 공의회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평신도’라고 말씀하셨다. 서 대주교님께서는 시대를 앞서신 분이셨고 외국평신도들을 초대하면서까지 한국교회 초기 열정적이었던 평신도 사도직을 다시 활성화시키려 애쓰셨다. 나도 그 초대받은 이들 속에 행복하게 끼어있었다. 서 대주교님은 대단히 명석한 판단력을 가지신 분이어서 주교님들 사이에서도 지혜가 필요할 땐 대주교님을 쳐다본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김 추기경님은 대구교구 30주년 축하미사 강론에서 “하느님께서는 이분을 영원으로부터 주교로 점지하셨다.”고 표현하기까지 했다. 그분과 같은 주교님들과 신학자들, 그리고 성 요한 23세와 복자 바오로 6세에게 우리 모두는 크게 “감사하다.”고 해야 한다! 그리고 물론 무엇보다도 그들을 인도하신 성령께 감사해야 한다.

다음 달에는 기술원 이야기를 좀 더 하고 다른 이야기도 계속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