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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의 말씀살이 - 소공동체를 위하여
이 달의 말씀살이
- 소공동체를 위하여


글 교구 성서사도직과 한승호, 김동현, 김범식, 이준영 신부

 

 · 소공동체 복음나누기 자료제공 : 교구 성서사도직 담당 (053) 250-3082 cafe. daum.net/biap

 

 

 

* 매주 하는 복음 나누기 7단계

(1) 주님을 초대한다.

“기도로 이 자리에 예수님을 초대해 주십시오.”

 

(2) 말씀을 듣는다.

“ ― 복음 ― 장을 펴 주십시오. 어느 분이 ― 절부터 ― 절까지 읽어 주십시오.”

(다 읽고 난 후 잠시 침묵한다.) “다른 분이 본문을 다시 한 번 읽어 주십시오.”

 

(3) 복음말씀을 마음에 새긴다.

“각자 마음에 와 닿는 단어나 짧은 구절을 선택하여 큰 소리로, 기도하듯이 세 번씩 읽어 주십시오. 읽는 사이에는 잠시 침묵을 지켜 주십시오.” “어느 분이 본문을 다시 한 번 읽어 주십시오.”

 

(4) 침묵 중에 주님의 말씀을 듣는다.

“3분 동안 침묵 속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을 듣도록 합시다.”

 

(5) 마음 안에 들려온 말씀을 나눈다.

“이제 각자 주님께로부터 들려온 말씀을 함께 나눕시다. 왜 그 말씀이 내 마음에 와 닿았는지, 그 말씀을 통해 주님이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6) 모임에서 해야 할 활동에 대하여 토의한다.

“지난 번 모임에서 결정했던 사항을 어떻게 실천했는지, 그 결과와 개선해야 할 사항에 대해 이야기합시다.” “이번에는 어떤 활동을 하는 것이 좋을까요?” “우리 주위에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이웃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7) 자발적으로 함께 기도한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자유롭게 기도합시다.”

 

 

 

8월 7일 연중 제19주일 : 루카 12,35-40.

35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36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37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38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39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40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 예수님 초대

어느 분이 짧은 말로 예수님을 이 자리에 초대해 주시기 바랍니다.(다음 기도를 바칠 수 있습니다. “주님, 성령의 빛으로 저희의 눈을 여시어 주님의 길을 보게 하시고, 저희의 귀를 여시어 생명의 말씀을 듣게 하소서. 아멘.”)

 

■ 말씀 읽기

어느 분이 루카복음 12장 35-40절을 큰 소리로 천천히 읽어 주십시오.

 

■ 세밀한 독서

다음의 사항들을 살펴보며 본문의 말씀을 각자 천천히 읽겠습니다.

- 혼인 잔치에서 돌아온 주인을 기다리는 바람직한 종의 모습은 어떻게 묘사되어 있습니까?(35-36절)

- 예수님께서 “행복하여라”고 말씀하신 이들은 어떤 이들입니까?(37-38절)

-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에게 주인은 어떻게 합니까?(37절)

- 예수님께서 “명심하여라”고 하신 것은 무엇입니까?(39절)

- 사람의 아들은 언제 옵니까? 그리고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40절)

복음말씀을 누가 한 번 더 천천히 읽어 주십시오.

 

■ 새겨 듣기

잠시 침묵 가운데 복음을 통해 들려주시는 말씀을 곰곰이 새기며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을 가집시다.(3~5분)

 

■ 나누기

오늘 하느님께서 나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을 짧게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 실천하기

지난주 결심하고 실천했던 것을 나누어 봅시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린 적이 있습니까? 기다림의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기다릴 때에 나의 마음과 행동을 구체적으로 나누어 봅시다. 그리고 예수님을 기다리는 마음은 어느 정도인지도 나누어 봅시다.

 

■ 청원기도

우리 반공동체, 본당공동체, 지역공동체, 우리나라, 지구촌공동체에 기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 주는 시간입니다.

 

■ 마침기도

마침성가는 가톨릭 성가 34번을 부르겠습니다.

* 위 성가는 예시 자료입니다. 자유롭게 성가를 고르셔도 됩니다.

 

제19주일 복음묵상 한승호(베드로)|월성성당 보좌신부

“늘 준비하고 갖추어진 종!”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군대에서 하는 힘든 훈련 중에 ‘전투 준비 태세’라는 훈련이 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가상해서 재빠르게 짐을 싸고 무기를 준비하여 전장에 나갈 준비를 하는 훈련입니다. 군대에 있었던 남자라면 누구나 이 훈련을 많이 하였습니다. 결국 이 훈련을 자주 하다 보면 잠을 자다가도 ‘출동 준비!’라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전장에 나갈 준비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평소에 훈련을 하는 것은 그것을 습관들이고 실제 상황이 닥쳤을 때 제대로 대처하기 위해서입니다. 평소 훈련이 없었다면 제대로 대처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맞이하는 일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합니다. 평소에 예수님을 잘 모시는 훈련을 하지 않으면 막상 예수님을 사랑해야 하는 결정적인 순간에 그분을 제대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이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그러합니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어야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해야지.’ ‘고난의 순간이 오더라도 잘 참고 견뎌야지.’ 우리는 이렇게 끊임없이 다짐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다짐이 다짐으로만 그쳐버리지, 실천으로 나아가는데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리고 소비되어 버립니다. 평소에 하지 않던 것을 하려니 마음속에서 준비해야 할 것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사실 이런 이치를 우리는 모르는 것이 아니라 자주 잊고 살아갑니다. 이 세상에서 자신의 삶이 한 달이든 일 년이든 십 년이든 정해진 시간에 끝난다고 하면 우리들 중에 그 누구도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주어진 시간이 소중하게 여겨질 때 우리는 가장 필요한 일들을 찾아서 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이 소중한 시간을 덧없고 의미없는 일에 쓸 이유가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니 늘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면서 준비 태세를 갖추고 살아가셨으면 합니다.

평소에 조금씩 훈련해 보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해야 결정적으로 누군가를 도와주어야 하거나 용서해야 할 때, 참으로 힘든 고난에 빠질 때 그 다짐을 잘 실천할 수 있습니다. 열심히 훈련하고 준비해서 주인을 잘 맞이하는 충실한 종의 모습을 갖추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전하시는 메시지입니다.

 

 

 

8월 14일 연중 제20주일 : 루카 12,49-53.

49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50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51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5 2이제부터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53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

 

■ 예수님 초대

어느 분이 짧은 말로 예수님을 이 자리에 초대해 주시기 바랍니다.(다음 기도를 바칠 수 있습니다. “주님, 성령의 빛으로 저희의 눈을 여시어 주님의 길을 보게 하시고, 저희의 귀를 여시어 생명의 말씀을 듣게 하소서. 아멘.”)

 

■ 말씀 읽기

어느 분이 루카복음 12장 49-53절을 큰 소리로 천천히 읽어 주십시오.

 

■ 세밀한 독서

다음의 사항들을 살펴보며 본문의 말씀을 각자 천천히 읽겠습니다.

-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49절)

- 예수님께서 받아야 하는 것은 무엇이며 그동안 예수님은 어떻게 계시게 됩니까?(50절)

- 예수님께서는 평화가 아닌 무엇을 일으키러 오셨습니까?(51절)

- 한 집안이 갈라지면 어떤 모습입니까?(52-53절)

복음말씀을 누가 한 번 더 천천히 읽어 주십시오.

 

■ 새겨 듣기

잠시 침묵 가운데 복음을 통해 들려주시는 말씀을 곰곰이 새기며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을 가집시다.(3~5분)

 

■ 나누기

오늘 하느님께서 나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을 짧게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 실천하기

지난 주 결심하고 실천했던 것을 나누어 봅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분열은 하느님을 따라 사는 삶과 세상을 따라 사는 삶의 갈라짐입니다. 나 자신의 이기심 때문에 실천하지 못한 하느님의 뜻은 없는지 생각해 보고 용기를 내어 실천하도록 합시다.

 

■ 청원기도

우리 반공동체, 본당공동체, 우리나라, 지구촌공동체에 기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 주는 시간입니다.

 

■ 마침기도

마침성가는 가톨릭 성가 44번을 부르겠습니다.

* 위 성가는 예시 자료입니다. 자유롭게 성가를 고르셔도 됩니다.

 

연중 제20주일 복음묵상 김동현(요셉)|지산성당 보좌신부

새로운 물결

평화로운 마음을 잔잔한 호수에 비유하고는 합니다. 그리고 성난 마음을 폭풍우 치는 파도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사람은 언제나 마음이 호수처럼 잔잔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고인 물은 썩게 마련이죠. 폭풍우 치는 호수의 물에는 신선한 산소가 공급됩니다. 평생 잔잔하기만 하다면 갇혀 있게 되고 더러워지기 마련입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예수님의 평화란 어떤 것일까요?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일까요? 아니면 아무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정적인 고요한 상태일까요?

한 공동체가 있습니다. 그 공동체는 겉으로 보기에는 평화로워 보입니다. 어떤 분쟁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이유는 서로가 편이 갈라져 같은 편 사람들끼리만 지내고 다른 편 사람들에게는 관심을 가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이러한 관행을 깨려고 하면, 그래서 새로운 모습의 공동체를 형성하려고 시도하면 오히려 공동체의 분열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하던 대로 하는 것이 낫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일으키시는 분열은 이렇게 굳어진 우리 마음의 분열이 아닐까요? 지역주의, 학연주의, 혈연주의 안에서 똘똘 뭉쳐진 거짓된 겉모습의 평화를 깨뜨리고 참된 공동체를 위해 분열을 일으키시는 것. 예수님은 편히 살아가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율법에 대한 잘못된 마음을 깨뜨리십니다. 우리에게도 신선한 마음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예수님이 주시는 분열은 그리스도인이 실행해야 할 가치입니다. 어느 틈엔가 세상의 가치를 따라 익숙한 것이 평화로운 것이라고 생각하며 서로를 갈라놓는 일에 동조하는 것은 참된 평화를 실현하는 일이 아닐 것입니다.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고 하죠. 아무런 관심이 없으면 싸움도 분열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저 조용할 뿐입니다. 공동체의 참된 일치를 위해서는 아픔과 분열을 겪기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통한 분열은 갈라지기 위한 분열과 아픔이 아니라 서로가 다듬어져 하나로 어울리기 위한 과정입니다. 이 과정은 힘들지만 외면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되는 소중한 과정입니다. 우리를 유혹하는 악마들은 이러한 분열을 조장하기보다는 그냥 현재에 안주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잔잔한 호수처럼 조용하기를 바라는 우리의 마음에 예수님이 작은 돌 하나를 던지십니다. 예수님만이 홀로 편한 세상에 젖어가는 우리의 정신에 불을 지르러 노력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8월 21일 연중 제21주일 : 루카 13,22-30.

22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하시는 동안, 여러 고을과 마을을 지나며 가르치셨다.

23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24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5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아 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며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여도, 그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

26 그러면 너희는 이렇게 말하기 시작할 것이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27 그러나 집주인은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하고 너희에게 말할 것이다.

28 너희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가 하느님의 나라 안에 있는데 너희만 밖으로 쫓겨나 있는 것을 보게 되면,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29 그러나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30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 예수님 초대

어느 분이 짧은 말로 예수님을 이 자리에 초대해 주시기 바랍니다.(다음 기도를 바칠 수 있습니다. “주님, 성령의 빛으로 저희의 눈을 여시어 주님의 길을 보게 하시고, 저희의 귀를 여시어 생명의 말씀을 듣게 하소서. 아멘.”)

 

■ 말씀 읽기

어느 분이 루카복음 13장 22-30절을 큰 소리로 천천히 읽어 주십시오.

 

■ 세밀한 독서

다음의 사항들을 살펴보며 본문의 말씀을 각자 천천히 읽겠습니다.

-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여행하시는 동안 무엇을 하십니까?(22절)

-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라는 물음에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대답하십니까?(23-24절)

-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아 버리면, 문을 두드려도 집주인은 어떻게 대답합니까?(25절)

- 그들은 주님 앞에서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그들에게 주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26-27절)

-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29절)

- 30절을 함께 낭독합시다.

복음말씀을 누가 한 번 더 천천히 읽어 주십시오.

 

■ 새겨 듣기

잠시 침묵 가운데 복음을 통해 들려주시는 말씀을 곰곰이 새기며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을 가집시다.(3~5분)

 

■ 나누기

오늘 하느님께서 나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을 짧게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 실천하기

지난주 결심하고 실천했던 것을 나누어 봅시다. 자비의 희년을 보내는 가운데 우리는 기도와 나눔을 어떤 모습으로 실천하고 있는지 나누어봅시다.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곳에 하느님처럼 자비로이 기도하고 아버지처럼 자비로이 나눕시다.

 

■ 청원기도

우리 반공동체, 본당공동체, 지역공동체, 우리나라, 지구촌공동체에 기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 주는 시간입니다.

 

■ 마침기도

마침성가는 가톨릭 성가 404번을 부르겠습니다.

* 위 성가는 예시 자료입니다. 자유롭게 성가를 고르셔도 됩니다.

 

연중 제21주일 복음묵상 김범식(아브라함)|성서성당 보좌신부

혼자 먹기, 혼자 놀기, 혼자 살기. 어느 순간부터 우리에게는 홀로 주도적인 삶을 살아간다는 ‘나홀로족’이 낯설지 않게 되었습니다. 언뜻 보면 개인주의의 심화와 1인 가구의 효용성이 가져다주는 시대상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지만 개인의 취향을 존중하고 불필요한 소비를 줄이며 나눔의 정신까지 갖춘 나홀로족의 모습을 보게 될 때면 자의든 타의든 주어진 여건 속에 고군분투하는 오늘날의 많은 개인들이 짠하면서도 고맙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이런 나홀로족은 신앙생활 안에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다양한 상황과 배경을 등지고 어떤 이들은 스스로 원해서, 어떤 이들은 어쩔 수 없이 혼자 성당에 왔다 갔다 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힘들지만 간신히 주일미사 만큼은 참여하려고 애쓰시는 분들이 많은데, 그런 분들을 볼 때면 신자로서의 의무를 지키는 것이지만 그러하기에 더 대견하고 기특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개중에는 특별한 이유없이 단지 번거롭고 불편하다는 이유로 혼자만의 신앙생활을 고수하는 분들도 보이곤 합니다. 간혹 미사시간에 성당 구석진 자리에 홀로 떨어져 있다 조용히 사라지는 교우분들을 붙잡고 왜 그렇게 멀찍이 떨어져 앉아 있는지, 왜 어떤 단체에도 속하지 않는지 등을 조심스럽게 물어보곤 합니다. 그러면 적지 않게 혼자 조용히 미사만 참례하고 가는 것이 심적으로 편하고 좋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사회적으로나 신앙적으로나 나홀로족이 많아지고 있는 요즘, 우리는 생각해 봐야 합니다. 어쩔 수 없이 성당에서 미사 외에는 다른 활동을 할 수 없을 때에도, 공동체에 대한 마음과 일치에 대한 지향을 지니고 하는 신앙생활과 개인의 편의와 취향에 따라 홀로 해나가는 신앙생활의 차이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것은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우리에게 ‘하늘에 이르는 길’에 대해 이야기해줍니다.

복음의 예수님께서는 구원에 대해 묻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 좁은 문은 1독서에서 드러나듯이 좁지만 “모든 민족들과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는 문이며, 2독서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훈육, 곧 하느님의 덕스러움에 따라 길러지는 자녀들에게 열려 있는 문입니다.

언뜻 생각할 때 좁은 문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여러 명이 함께 가기보다 혼자 가는 것이 유리해 보입니다. 문이 좁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는 주님의 말씀을 떠올릴 때 그 좁음은 단순히 어떤 물리적인 크기와 범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영혼의 상태, 신앙의 모습과 연관되어 있는 것입니다.

나 혼자만 많은 것을 소유하고 누리겠다는 편향된 마음은 나의 편의와 취향에 따라 신앙생활을 하겠다는 태도에서 자라나고, 그 자리에서 나는 무엇보다 커다란 존재가 됩니다. 좁은 문에 적합하지 않은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때로는 불편하고 아프지만 다른 이들을 향한 마음을 잃지 않고, 신앙 안에서 형제자매들과 함께하고자 하는 자리에서 우리의 마음은 하늘나라의 문에 알맞은 크기로 조각되어 갑니다. 서로 부딪히며 깎이는 과정에서 모두가 좁은 문에 적합한 모습으로 다듬어져 가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홀로 들어갈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함께하는 것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오늘날, 우리는 신앙 안에서 더욱 연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함께 울고 웃다가 마침내 하느님의 영광을 함께 누릴 수 있도록 나아가야겠습니다.

 

8월 28일 연중 제22주일 루카 14,1.7-14.

1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가시어 음식을 잡수실 때 일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는데,

7 예수님께서는 초대받은 이들이 윗자리를 고르는 모습을 바라보시며 그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8 “누가 너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너보다 귀한 이가 초대를 받았을 경우,

9 너와 그 사람을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이분에게 자리를 내 드리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너는 부끄러워하며 끝자리로 물러앉게 될 것이다.

10 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그러면 너를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여보게, 더 앞 자리로 올라앉게.’ 할 것이다. 그때에 너는 함께 앉아 있는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11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12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초대한 이에게도 말씀하셨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13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14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 예수님 초대

어느 분이 짧은 말로 예수님을 이 자리에 초대해 주시기 바랍니다.(다음 기도를 바칠 수 있습니다. “주님, 성령의 빛으로 저희의 눈을 여시어 주님의 길을 보게 하시고, 저희의 귀를 여시어 생명의 말씀을 듣게 하소서. 아멘.”)

 

■ 말씀 읽기

어느 분이 루카복음 14장 1.7-14절을 큰 소리로 천천히 읽어 주십시오.

 

■ 세밀한 독서

다음의 사항들을 살펴보며 본문의 말씀을 각자 천천히 읽겠습니다.

-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계신 곳은 어디이며 사람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1절)

- 예수님께서는 어떤 상황에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고 계십니까?(7절)

- 비유의 내용은 무엇입니까?(8-10절)

- 예수님께서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고자 한 것은 무엇입니까?(11절)

- 예수님께서는 어떤 이들을 초대하라고 말씀하십니까?(12-13절)

- 예수님께서 “너는 행복할 것이다.”고 하신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14절)

복음말씀을 누가 한 번 더 천천히 읽어 주십시오.

 

■ 새겨 듣기

잠시 침묵 가운데 복음을 통해 들려주시는 말씀을 곰곰이 새기며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을 가집시다.(3~5분)

 

■ 나누기

오늘 하느님께서 나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을 짧게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 실천하기

지난주 결심하고 실천했던 것을 나누어 봅시다. 나 자신이 높아 보이기 위해 남을 무시하거나 존중하지 못한 적이 없는지 생각해 보고 존중과 배려로 다른 사람을 대하도록 합시다.

 

■ 청원기도

우리 반공동체, 본당공동체, 지역공동체, 우리나라, 지구촌공동체에 기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 주는 시간입니다.

 

■ 마침기도

마침성가는 가톨릭 성가 26번을 부르겠습니다.

* 위 성가는 예시 자료입니다. 자유롭게 성가를 고르셔도 됩니다.

 

연중 제22주일 복음묵상 이준영(리노)|죽도성당 보좌신부

찬미예수님! <빛> 잡지 구독자 여러분~ 겸손한 사제 좋아하세요? 모든 사람들이 거만한 사제보다는 겸손한 사제를 더 좋아하실 겁니다. 여태껏 간혹 거만한 사제의 행동 때문에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린다는 소식은 들어봤어도 겸손한 사제 때문에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린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겸손한 사제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겸손함인 예수님을 어느 정도 닮아 있기 때문에 신자의 범위를 벗어나 비신자들에게도, 교회의 범위를 벗어나 세상에서도 큰 환영을 받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 받는 프란치스코 교황님과 김수환 추기경님, 그리고 이태석 신부님을 보면 그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겸손해야 하는 것은 사제들에게만 국한되는 문제는 아닙니다. 겸손함은 모든 사람이 추구해야 하는 덕입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이라면 평신도, 수도자, 사제의 직무를 떠나 겸손함을 쌓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겸손한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하느님도 마찬가지시고 겸손함이야말로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지름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1독서도 “네가 높아질수록 자신을 낮추어라. 그러면 주님 앞에서 총애를 받으리라.”(집회 3,18) 하고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겸손한 사람들을 총애하시기에 예수님께서도 복음을 통해 겸손해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전반부를 이루는 7절에서 11절은 초대받은 경우에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후반부를 이루는 12절에서 14절은 초대하는 경우에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초대받은 경우와 초대하는 경우는 상반된 상황이지만 복음 전체를 아우르는 공통 주제는 겸손함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지위나 신분에 따라 식탁에 앉는 순서가 정해졌습니다. 그래서 초대한 사람은 귀한 사람일수록 윗자리에 앉도록 권유를 했고, 권유를 받은 사람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윗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전혀 다른 상황이 발생합니다. 초대한 사람의 권유도 없었는데 사람들이 스스로 윗자리를 찾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특별한 존대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으스대는 교만함을 보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이런 모습과 달리 예수님은 하느님 앞에서 스스로를 내세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가 너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하고 말씀하시며 스스로 윗자리에 앉았다가 더 귀한 이가 오면 끝자리로 물러나는 창피를 당하겠지만 스스로 끝자리에 앉는다면 더 윗자리에 앉도록 권유받으며 사람들 앞에서 영광스럽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의 이 말씀이 끝자리에 앉되 모든 사람들 앞에서 높아질 상황을 예상하고 기대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겸손이 아니라 겸손을 가장한 자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혼인 잔치로 상징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기대감 없이 낮아지고 겸손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우리가 초대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려주십니다. 예수님은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나를 다시 초대해서 보답할 형제, 친척,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람들 앞에서 높아질 것이라는 기대감 없이 끝자리에 앉는 것처럼 호의를 다시 돌려받을 거라는 기대감 없이 잔치를 베풀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에게 보답할 수 없는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초대한 이들(소외 계층)에게 보답을 받지 못하더라도 의인들 앞에서 하느님에게 보답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빛> 잡지 구독자 여러분~ 예수님께서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루카 10,27)고 가장 큰 계명을 남겨주신 적이 있지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 앞에 겸손한 모습으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나에게 보답하지 못하는(소외 계층, 가난한 이들) 사람들을 향한 우선적 선택으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겸손함인 예수님이 살아가신 모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보답의 시기가 현재는 아닐지라도 마지막 날에 하느님으로부터 보답 받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새로운 한 주 동안 보상을 기대하지 않는 겸손함으로 하느님 앞에 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겸손함을 바탕으로 가난한 이들을 먼저 선택하는 의인이 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