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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이야기
변화


글 박경현(프란치스코)|포항 오천고등학교 교장, 진량성당

 

15,428일. 1974년 4월 19일 나는 세례를 받았다. 대부분의 선생님들이 나의 이름을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평범한 촌뜨기 중학교 2학년 학생인 나에게 과학을 가르치던 선생님이 “경현아! 너 성당에 다녀볼래?”라며 이름을 불러 준 것만으로도 나는 그냥 그 선생님의 말씀을 따르고 싶었다. 또래 친구들 몇 명이 함께 배운 교리 내용은 딱히 기억에 없다. 다만 추운 겨울에 시작된 교리공부를 위해 10여 리나 되는 성당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다녔다는 것, 눈이 하얗게 내린 들길을 맨 먼저 걸으며 기도문을 외우고 성가를 소리 내어 부르며 가는 길이 행복했다는 것, 성당에서 가장 신비스러운 곳이었던 수녀원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잔다크 수녀님이 손을 꼭 잡고 따뜻한 아랫목에 앉혀서 몸을 녹여주고 낯선 간식을 주었다는 것이 평생 옅어지지 않는 추억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중학교 3학년이 되어서 ‘프란치스코’라는 세례명을 받았고 혼자 자취를 하면서도 새벽미사에 빠지지 않고 성당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2016년 7월 27일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까지 42년 3개월 8일 동안 꾸역꾸역 나는 신앙 안에 머무르고 있다. 이 기간 동안 적어도 2,204번의 주일이 있었다. 대축일 미사까지 포함한다면 나는 적어도 2,000회 이상 미사 참례를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미사 참례를 위해 앉아 있었던 시간만 2,000시간, 83일을 밤낮없이 미사만 드려도 채울 수 없는 긴 시간이다. 그리고 나는 적어도 100회 이상의 고해성사를 통해 내 잘못을 통회하고 사제와 하느님 앞에 더 나은 모습을 보이기로 약속했다. 피정과 기도활동은 물론 교리교사, 청년회, 사목회, 재무평의회, 교구 평신도 단체인 ME 활동 등 교회의 여러 역할에도 참여했다. 이 기간을 통하여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나 자신의 변화와 성장을 위한 다짐을 반복했다.

6,935일. 나의 학창시절은 1966년 3월 2일 초등학교 입학으로 시작되었다. 다행히 유치원을 구경하기도 어려웠던 시절이어서 내가 학적을 가졌던 기간은 19년 정도이다. 직장생활과 겹치는 5년여의 기간을 제외한 기간은 오로지 학생 신분이었다. 책과 강의를 통해 지식과 기능을 쌓고 동료들과 어울리며 공동체를 체험했다. 하루 평균 3시간으로 계산 하더라도 20,000시간이 넘는 시간을 책을 펴놓고 있었을 것이다. 고등학교 때에는 대학 진학을 위해 많은 노력도 기울였고 또래 친구들과 친분도 쌓으며 우리들의 미래에 대해 밤을 새워 이야기도 나누었다. 틈틈이 책을 읽고, 나의 생각과 외로움을 글로 표현하기도 하면서 앞으로 펼쳐질 우리들의 미래에 대한 숱한 다짐들도 했다. 그리고 대학에 진학한 후에도 각종 동아리 활동과 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스스로의 성장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내가 평생 몸담아야 할 직업과 삶의 가치관 정립을 위해 불면의 밤을 보낸 적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성인으로서, 사회 구성원으로서, 나아가 자식으로서의 역할에 대해서도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며 스스로에게 언제나 채찍을 가했다. 나의 부족한 점을 개선하고 좀 더 성숙한 사람이 되기 위한 노력도 멈추지 않았다.

13,287일. 나는 1980년 3월 1일 교단에 선 이후 36년하고도 4개월 27일 동안 아이들을 지도하거나 학교를 관리하는 신분으로 살아가고 있다. 세상이 변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선생님’이라는 자리는 가볍지 않았다. 단순히 수학을 잘 가르치는 것으로 나의 역할이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아이들의 미래의 삶의 가치와 방법까지도 이끌어야 한다는 부담감을 한순간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비록 나의 가치관과 내가 살아온 익숙한 방식에 갇혀 아이들의 장래를 현명하게 이끌지는 못했지만 매순간 나에게 주어진 소명을 소홀히 하지 않으려고 나름 애를 쓴 것도 사실이다. 비록 많은 아이들에게 존경을 받지는 못했지만 부끄럽지 않은 선생님이 되기 위해, 나 자신의 삶을 바르게 이끌어 가기 위해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9,275일. 1991년 봄방학 때 하느님 앞에서 예쁜 아내와 나란히 앉아서 성하거나 병들거나 일생 사랑하며 존경하기로 약속하고 부부가 되었다. 양가의 적지 않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7년여의 만남을 통한 확신으로 다른 부부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으로 살아갈 자신이 있다며 기어이 부부의 연을 맺었다. 하지만 부부로서의 삶은 우리들의 예상과는 딴판인 별개의 세상이었다. 예측이 빗나간 길은 매순간 미로였다. 우리 부부는 서로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여겼지만 연인으로 알게 된 모든 것이 배우자로서의 자격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루하루 걸어 본 적이 없는 장면들과 맞닥뜨리며 모험과 같은 길을 서툴고 외롭게 걸어왔다. 각자의 날갯짓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어떻게 조화롭게 이뤄나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무지했다. 하지만 연년생의 남매를 자식으로 둔 아버지와 남편으로 살아온 세월도 벌써 25년하고도 5개월이 지났다. 혼인 10년째 ME주말을 체험하면서 완전히 새롭게 태어난 우리 부부는 지난 세월동안 겪었던 숱한 아픔과 외로움, 그리고 가슴 벅찬 기쁨의 순간들을 추억으로 쌓아가면서 나이와 더불어 깎이고 다듬어져 가고 있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

그런데 오늘 우연히 오래된 나의 일기장을 발견했다. 38년 전인 1978년 대학교 1학년 입학 할 때부터 1년간 써둔 일기장이었다. 하루하루 깨알같이 적어둔 일기를 읽으면서 나는 스러질 듯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1978년 5월 18일 화요일. 매우 울적한 마음으로 펜을 잡는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는 수많은 것이 필요하다. 물질적인 면이나 정신적인 면으로나. 내 생각으론 정신적인 면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랑’이 아닐까 생각한다. 한 인간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수많은 사랑을 받고 또 주는 것 같다. 가깝게는 부모님의 사랑으로부터 형제간, 친구, 멀리는 하느님의 사랑에 이르기까지. 그러나 나와 가장 가까운 형제와 부모도 소홀히 하는 나는 위선자이다. 이중인격자이다. 겉으로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처럼 혹은 가장 이성적인 인간인 것처럼 남들에게 이야기한다. 그러나 나의 본심, 즉 진실한 나를 바라볼 때 너무나 더러운 인간, 너무나 거만한 인간, 교만과 이기심으로 가득 찬 인간이다. 부모님과 형제의 어려움도 외면하며 자신을 내세우는 나는 어리석은 인간이다.〉

〈1978년 5월 19일.(일기의 끝부분이다.) 나의 책상에 앉아 곰곰이 나 자신에게 이야기해 본다. 프란치스코! 좀 더 깊이 생각하고 행동을 무겁게 하게. 남에게 아무리 아름다운 말을 하여 그들의 호감을 얻는다 할지라도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불충실한 너에게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좀 더 말과 행동을 신중하게,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가장 공손하게 대하는 인간이 되게나!〉

〈1978년 5월 20일…좀 더 겸손한 태도와 좀 더 신중한 몸가짐이 필요한 것 같다. 마음의 수양, 대인관계에서 아량이 필요한 시기에 살고 있는 나에게 좀 더 깊은 생각 후 행동할 수 있는 힘을 주소서. 진실한 모습으로 다른 사람과 가까이 할 수 있는 용기를 주소서, 저는 무식하나이다.〉

〈1979년 10월 12일…여러 사람 앞에서 얘기 할 원고를 작성하면서 이상한 생각이 든다. 나는 나의 생활이 어떠한지 생각하는 것은 소홀한 채, 또 나의 현 위치가 어떠하며 얼마나 그 일을 실천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감히 다른 사람 앞에서 얘기하기 위해서 유식한 말을 끌어 모으다니. 인간은 위선적인 존재인가 보다. 자기를 내세우기 위해 모든 사실을 아는 척 해야 하는 엄청난 과오.〉

〈1978년 12월 15일…글을 읽자. 그리고 많이 생각하면서 나의 생을 꾸려보자. ‘말보다 실천’이란 너무도 흔한 것부터 실천하자. 나를 똑바로 보면서 보다 폭넓은 생의 이해력을 가지고 살자. 남을 너무 의식하지 말고 과거에 너무 집착하지도 말고!〉

하루하루 절실한 마음으로 쓴 일기를 읽어보면서 오늘 저녁, 내가 쓰고 싶은 일기의 내용과 그토록 똑같게 쓰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소름이 돋았다. 지식과 신앙조차도 감히 무너뜨리지 못하는 나의 아집과 교만함에 맥이 풀린다. 남만큼 배웠다고, 남과 다르지 않게 신앙생활을 했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교사로서의 삶이나 남편과 아버지로서의 삶조차도 나를 성장시키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몰려오기도 한다. 그리고 갑자기 얼굴이 붉어진다. 내가 만난 아이들과 동료 선생님들, 그리고 가까운 가족들에게 변화를 다그치며 안타까워하던 나의 모습이 떠오른다. 마치 돌덩이처럼 굳어있는 자신의 모습은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내 주변 사람들에게 너무나 쉽게 변화를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작은 변화도 기적이라고 했고, 인간의 변화는 성령의 은혜로만 가능하다고 했다. 아이들에게 변화를 강요하는 것이 부모나 선생님으로서의 역할이 아니다. 변화하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는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어른들이 해야 할 가장 소중한 역할이다. 거룩한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고자 발버둥치는 몸짓이 참으로 거룩한 모습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