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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과 함께여서 행복하여라 - 제10화
대구 사투리를 쓰는 엉터리 철학교수


글 양 수산나|대봉성당

 하양이 아직 시골이었을 때(지금처럼 대학들이 모여 있지 않았을 때) 당시 하양본당의 이임춘(펠릭스) 신부님은 우리들의 친구가 되었다. 그분은 하양 뒤쪽 무학산 위 땅을 사서 그곳에 목장을 할 계획을 하고 있었다. 그 지역 많은 농부들에게 수입이 더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분은 농장으로 올라가는 길을 닦으면서 그들에게 일거리를 주고 싶어 하셨다. 나는 미국가톨릭구제회 캐롤(안) 몬시뇰과 친구였고 서 대주교님께서는 대구대교구의 구제회 밀가루 여분을 기꺼이 이 신부님께 나누어 주셨기 때문에 산길을 내는 일을 한 하양 농부들이 밀가루를 충분히 받아 일부는 팔아서 생활에 보탤 수 있었다.

하양 농부들은 농장에서 일함으로써 수입이 생겼으나 자녀들을 대구에 있는 중학교에 보내기에는 여전히 가난했다. 그래서 신부님은 농부들이 하양에도 대구만큼 좋은 학교가 있어야 가난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고 생각하여 무학중학교를 시작했고 나중에 고등학교까지 설립하여 명문학교로 키웠다. 신부님은 시골 학생들을 도시에 보내지 않고도 서울대학을 비롯한 여러 훌륭한 대학에 갈 수 있도록 교육한 공로로 향토 교육대상을 받았다.

애석하게도 언덕 위 농장은 실패했다. 내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수입하도록 도와 준 젖소들이 새로운 목장과 경쟁에 휘말렸기 때문이다. 새 목장 사람들은 깡패들을 동원하여 대구 가게들이 우리 우유를 못 사게 만들었다! 내 친구들과 영국의 은인들은 무학농장의 실패를 대단히 슬퍼했지만 어쨌든 한국은 경제적으로 발전해서 하양 사람들이 무학산까지 올라가서 일할 시간도 없게 됐다. 그러나 이 신부님은 대단히 훌륭한 학교를 하양에 남겼다. 나는 기술학원 아이들이 자주 무학농장에 올라가서 일했고 얼마동안 학원의 권 필립바 부원장이 하양에 분원을 열어 양재와 미용을 배우면서 농장도 도와줄 수 있었다는 것을 언급하고 싶다. 행복한 추억이 남아있다.

그즈음 어느 날 내가 아직 학원 책임을 맡고 있을 때 광주관구 대신학교 신부님 한 분이 나를 찾아 왔다.(그 당시 대구에 대신학교가 없어서 광주로 신학생들을 보낼 때였다.) 그 신부님은 대신학교에서 근대철학사를 강의하기로 한 신부님이 파리에서 박사공부를 마치지 못해서 2,3학년 신학생들에게 근대철학을 강의할 사람이 없다고 했다.

내가 철학, 정치학과 경제학을 옥스퍼드에서 공부했기에 와서 좀 가르치겠느냐고 물었다.(그 시절엔 여자가 신학교에서 가르치지 않았다.) 나는 그 신부님께 하루를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리고 서 대주교님께 가서 옥스퍼드에서 내가 전공과목을 최소한으로 공부했다고 말씀드렸다! 왜냐하면 나는 그 당시 가톨릭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하나의 참 교회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중이어서 신학과 교회사 책을 읽고 저명한 학자들에게 질문하기 바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같이 무식한 철학 선생이 신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대주교님의 대답에 나는 놀랐다. “그 사람들이 나에게 당연히 먼저 물어봤기 때문에 나는 벌써 수산나 씨를 보내겠다고 말했어요. 걱정마세요, 수산나 씨! 영어로 된 다른 책을 구해서 학생들보다 2~3장을 먼저 공부하세요! 나는 신학생들이 기도의 삶과 주교에게 순명하는 삶을 기쁘게 사는 평신도 여성과 접촉하기를 원합니다! 일 년 정도 철학은 뒷자리에 둬도 됩니다!”

그렇다면야! 나는 광주로 가서 그들이 진짜 철학교수를 모실 때까지 1년 동안 매달 보름 정도를 지냈다. 내 철학 강의에서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는 나중에야 마산교구 신부님에게서 들었다. 내 억양과 어휘가 대구 사투리라 알아 들을 수가 없어서 내 시간이 되면 모두 대구 신학생들 옆자리에 앉았고 대구 학생들 노트를 빌렸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이 훌륭한 젊은이들과 색다른 강사는 잘 지냈다. 그렇지만 시험 점수는 틀림없이 그들에게 끔찍했을 것이다!

나는 한국의 경험이 없어서 옥스퍼드에서 배운 기준을 사용했다. 그래서 70여 명 중 세 사람만 ‘A’ 학점을 받았다. 그들은 책에 있는 설명을 그대로 암기하기보다 내용을 잘 알아듣고 자기들 나름대로 표현을 했기 때문이다. 이 세 사람은 대구, 광주, 안동 출신이었다. 나머지 학생들은 B나 C학점을 받았다. 하지만 어쨌든 신학교 교수들이 내 방법 때문에 학생들을 낙제시키지는 않았으리라 믿는다.

 내 늙어가는 기억력이 맞다면 그것은 1971년의 일이다. 그리고 그해 벌써 류 루시아는 권 필립바와 다른 이들의 도움으로 내가 없는 동안 학원을 아주 잘 이끌고 가는 것이 확실해 보였다.(루시아는 친절하게도 여러 해 동안 나에게 원장 명칭을 갖도록 해 주어서 내가 나중에 한국 영주권을 얻는 데 도움이 되었다.) 내가 더 이상 학원에 필요 없게 되자 하느님의 섭리는 나에게 새로운 사명을 받도록 이끄셨다, 그 사명으로 나는 사랑하는 한국에 2년마다 3개월만 머물게 되었다. 다음 사명이란? 물론 그것도 한국을 위한 것이었지만 한국에서 일하는 사명은 아니었다.

거의 모든 한국 교구에서 젊은 여성들이 점점 더 사도직협조자 성소를 살겠다고 하니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세계적으로 주교님들이 동일한 사도적 정신이라고 확신하기 위해 그들의 첫 후보자들을 양성할 수 있는 보편적인 양성센터로 이용할 수 있는 곳이 필요했다. 이 센터는 또한 주교가 교구 안에 있는 다른 협조자들을 도와주도록 양성자로 임명할 사람들을 양성할 필요도 있었다. 그들을 장상들로서가 아니라 이 사도적 정신으로 살고 판단하도록 이끌어 주는 충고자로서 도와주기 위해서다. 양성을 받는 협조자는 그 빛에 양순할 것이 요구된다. 왜냐하면 협조자들은 그리스도께 대한 순명을 어떠한 중개자도 없이 바로 교구 주교에 대한 순명으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20세기 초 유럽에 있는 주교들이 평신도 여성들을 이런 식으로 부르기 시작했을 때 양성이 보장되어야 했기 때문에 벨기에에 있는 브뤼셀 교구가 이 서비스를 마련했다. 그러나 나중에 루르드의 성모님께서 성모님의 발치에서 양성이 이루어지기를 원한다는 것을 보여주셨다.(여러 가지 방법으로 보여주셨는데 이야기 하자면 너무 길어진다.)

양성을 위하여 루르드에 보내진 많은 한국인들이 불어를 충분히 할 만큼 오래 있을 수 없기 때문에 한국말을 하는 양성자가 그곳에 필요했다. 나는 1966년부터 1968년까지 루르드에서 이미 양성을 받았고 유럽 언어를 몇 개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루르드 센터에서는 대주교님께 나를 루르드에 보내주시면 도움이 되겠다고 요청을 했다. 대주교님께서는 나를 보내기로 동의하셨다. 나중에 이문희 대주교님께서 나를 도와 줄 또 한 사람의 대구 협조자를 보내주셨다.(우리는 이제 둘 다 은퇴했고 마산 주교님께서 마산 협조자 한 사람이 이 일을 계속하도록 하셨다.)

이 사명으로 인해서 내게 두 가지 변화가 생겼다. 첫째, 내가 대구뿐 아니라 한국에 있는 모든 교구와 접촉을 하게 되었다. 둘째, 다른 나라 교구들도 이 성소를 시작하도록 도와주어야 했다. 이 이야기는 다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