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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가는 성지
가마골, 황사영(알렉시오)의 묘


글 박정길(마르코)|형곡성당

 

비정상과 정상의 차이

성지 순례를 하기 위해 이번 달에도 버스에 올랐다. 우리 순례자들이 탄 버스는 교행하는 형형색색의 버스와 그리고 휴게소에 즐비하게 정차해 있는 버스의 모양새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나 버스를 타는 목적은 다 다를 것이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등산복장을 한 등산객은 명산을 찾아 즐기며 정상에 오르려고 가지만, 수수한 옷차림에 달뜨지 않은 우리는 명산이 아니라, 골짜기로 순교자를 찾아 참배하고 고귀한 신앙을 배우러 간다. 관광객들이 유적지를 역사의 눈으로 보며 고개를 끄덕일 때, 우리 순례자들은 관아에서 순교한 성인과 복자의 흔적을 찾으려고 애쓴다. 이렇게 보는 눈이 다르고 주로 묘지와 외딴곳을 성지라고 부르며 찾아다니고 있으니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순례자들은 정상이 아니다.

어찌 비정상이 우리뿐이랴? 우리가 신앙을 고백하며 주님이라고 부르는 예수님께서는 형언할 수 없는 고통 속에 처참히 돌아가셔서 저렇게 십자가에 매달려 계시는데 누가 저 모습을 정상으로 보겠는가? 우리 신앙 선조들은 지극히 비정상인 큰 바보 예수님께 사로잡혀서 출세를 포기하고 제사를 폐지하고 양반의 신분과 부귀영화까지 몽땅 버렸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0, 37-39) 이 복음을 ‘완전한 사랑의 불길’로 실천하신 분이 바로 순교자들이다.

‘배교한다.’고 한마디만 하면 즉시 자유인이 되지만 순교자들은 이 말을 하지 않았다. 또 어느 지방에서는 관장이 옥에 갇혀 있는 교우가 도망가도록 기회를 주라고 일렀다. 포졸 신분에 ‘어서 도망가쇼.’ 할 수 없으니 헛기침을 하며 옥문을 열어놓고 자리를 비웠다가 한참 후에 와서 보니 눈치코치 없이 그 자세로 앉아있는 것을 보고 혀를 찼다 한다.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해도 부족할 판에 스스로 죽음을 택한 순교자들 역시 비정상이 분명하지만, 오늘 우리가 만날 분은 귀재였으나 ‘하늘나라를 위해 스스로 비정상’이 된 황사영(알렉시오) 선조를 만나기 위해 가마골 도로변에 내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몇 년 전이나 지금이나 조잡하게 서 있는 비닐하우스에 가려 묘는 보이지 않았다. 어서 빨리 어수선한 주변 경관이 정리되어 도로변에서도 성지를 볼 수 있는 그 날을 학수고대하며 좁은 길로 들어섰다.

  

귀재 황사영은 어떤 인물인가

황사영 알렉시오(黃嗣永, 1775~1801년)는 한림학사(정랑직)를 지내던 부친 황석범(黃錫範)이 병사한 이듬해 유복자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신동(神童)으로 불릴 만큼 영리했다. 1790년(정조 14년) 전국적으로 인재 등용을 위한 과거시험이 있었는데 정조가 훌륭한 임금이어서 팔도의 선비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해가 저물어 사관이 답안지를 거두다가 그중에 하나를 보고 깜짝 놀라 탑전에 올렸다. 정조 임금은 이를 보고 감탄했다. “이렇게 훌륭한 선비를 이제야 만나다니, 이 선비가 누구인가?” 중후한 선비로 알았는데 홍안의 소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몇 살이며 너는 누구냐?” “열일곱 살이며 창원황씨 후예로 사영이옵니다. 저의 11대 할아버지가 황침인데 한성판윤(요즘의 서울시장)을 지내셨고 그 후로 10대 동안 집안에서 벼슬이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황석범인데 한림학사를 지내다가 일찍 돌아가시어 저는 유복자로 태어났습니다.” 정조 임금은 너무 기뻐 그의 손을 잡았다. “내가 당장 중용하고 싶다만 나이가 너무 어리니 스무 살이 되면 오너라.” 정조 임금은 학문에 정진하라는 뜻으로 친히 급양비를 하사했다. 그런데 더 큰 영광은 임금이 황사영의 손을 잡았기 때문에 정2품과 동격인 어무가 내린 것이다. 어무가 내린 손은 흰 비단으로 감고 띠를 둘러 표시를 했다고 하는데 이러고 나가면 행인들이 길을 비키고 경의를 표했다. 황사영은 헌헌장부로 어무 표시를 하고 다녔으니 조선 팔도에 입소문이 자자했고, 한양 장안에 사는 사람들은 황사영을 먼빛으로라도 보는 것이 소원이었다고 한다.

인기 절정인 그는 당대의 석학들을 만나 학문을 넓히던 중에 조선 시대에 가장 뛰어난 학자 다산 정약용을 만나기 위해 마재를 자주 찾았다. 정약용의 형님은 한국천주교회 창립 선조 중의 한 명으로 꼽히는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이며, 교회 최초 평신도 사도직 단체인 명도회장을 맡고 있었다. 황사영은 약용형제와 이승훈한테서 천주교의 교리에 대해 듣고, 배우면서 오묘한 진리에 깊이 매료되어 1795년 주문모 신부로부터 ‘알렉시오’로 세례를 받았고, 그 후 주문모 신부의 주례로 혼담이 오고 갔던 정약용의 맏형인 정약현(丁若鉉)의 딸 정난주(丁蘭珠, 아명 命連) 마리아와 혼배성사를 받았다.

 

황사영의 신앙생활

 알렉시오는 당시 지배 이념으로 위상을 잃어가던 유교를 보면서 천주교를 ‘세상을 구하는 좋은 약’, ‘구원의 학문’으로 여겼다. 그런 까닭에 부귀공명의 벼슬길을 포기하고, 명문거족임에도 중인, 상민, 천인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 교리를 가르쳤다. 알렉시오는 1796년 이승훈, 홍낙민, 유관검, 권일신, 최창현 등 교회의 주요 인물들과 함께 주문모 신부와 협의하여 북경의 주교에게 해로(海路)를 통한 서양선교사의 파견을 요청하는 서한을 발송했다. 청년 알렉시오가 이처럼 당시 교회의 극비상황에 깊이 간여한 것을 보면, 교회 내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때도 박해 중이어서 교우로 들통이 나면 여지없이 잡혀 들어갔으나, 포졸들은 알렉시오가 천주교 교우임을 뻔히 알면서도 어무가 내려 아무도 그에게 손을 대지 못했다. 그러나 이런 특권이 오래가지 않았다. 정조 임금은 황사영을 기다렸다. 삼 년이 지나도 오지 않자 삼정승이 못 마땅히 여겨 아뢰자 임금은 “선비들이 벼슬 한 자리를 하려고 설치는데 황사영은 나의 중용 약속을 오히려 가벼이 여기고 소신한 바를 행하고 있으니 그 인품의 고결함을 알겠다.” 하며 오히려 두둔해 주었다. 그런데 이처럼 어진 임금이 갑자기 승하한 것이다. 폭풍전야가 지나가자 1801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하면서 신유대박해가 일어나 교회 지도자들이 체포되고 교우들도 줄줄이 잡혀갔다. 정약용의 집에서 알렉시오의 서찰이 나오자 정약용은 그가 천주교 핵심 지도자라며 구체적으로 일러바쳤다.

체포령이 떨어지자, 알렉시오는 강완숙(골롬바)의 도움을 받아 피신처를 옮겨 다니다가 김의호의 제안대로 상복으로 바꿔 입고 2월 그믐께 김한빈과 함께 제천 배론 김귀동의 집으로 피신한다. 두 사람은 알렉시오가 숨어 살 토굴을 파고 토굴로 통하는 길은 옹기점에서 나온 큰 옹기그릇으로 덮어놓았다. 알렉시오는 초봄에서부터 한여름이 지나갈 때까지 고온다습한 굴에서 7개월을 어찌 견뎠을까? 토굴은 그에게 마지막 보루이자, 제 발로 들어온 창살 없는 감옥이었다. 동료 지도자들의 참수 소식을 들을 때도 가슴이 무너져 내렸으나, 그가 특별히 존경했던 주문모 신부……! 그래서 잠시도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던 주 신부가 자수한 후 순교했다는 소식을 듣자, 알렉시오는 감당 못 할 만큼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절체절명에 혼자 살아남은 그는 국가권력에 무참히 죽어가는 교우들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마음을 추슬러 한국교회의 참상과 교회의 재건과 대책, 그리고 자신의 의견을 북경교구에 전하기 위해 마침내 붓을 잡았다. 흐릿한 등불 아래 비장한 각오로 한 자 한 자 깨알 같은 글을 써 내려 가는 알렉시오! 교회와 나라의 시각으로 볼 때는 백서지만 개인으로는 혼을 담은 유서였다. 9월 22일(음) 이윽고 62×38㎝ 크기에 122행 13,384자로 쓴 백서가 완성되자, 알렉시오는 구베아 주교에게 백서를 전할 황심(토마스)과 옥천희(요한)가 찾아올 날만 기다렸다. 그런데 옥천희가 앞서 다른 서한을 북경에 전하고 돌아오다가 그만 의주에서 체포되었고 신문과정에 황심의 이름이 나오자 그도 즉시 체포되었다. 황심은 알렉시오가 도피하는 동안 그의 가족은 물론 많은 교우가 잡혀가 그로 인해 고초를 당하는 것을 보고 포도대장에게 알렉시오의 은신처를 사실대로 고해바쳤다. 포졸들이 배론에 급파되어 사방을 뒤졌으나 찾지 못했다. 그때 한 포졸이 토굴 위를 지나다가 땅바닥에서 퉁퉁거리는 소리가 나자 이상하게 여겨 결국 토굴의 실체가 드러나고 만다. 포졸이 검색하자 알렉시오가 둘둘 말아 옷 속에 지녔던 흰색 세명주(細明紬)의 백서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는 놀라지 않고 포졸에게 몸을 맡겼다. 쇠사슬에 묶여온 알렉시오는 25일 동안 신문과 고문을 반복해서 받다가 11월 5일(음) 서소문 밖에서 대역부도죄(大逆不道罪)로 능지처참(陵遲處斬) 된 뒤 그의 가산은 적몰(籍沒)되고 모친 이윤혜는 거제도로, 부인 정난주(마리아)는 제주목 대정현의 노비로, 그의 숙부 황석필은 함경도로, 노비 육손과 돌이는 갑산과 삼수로, 여종 판례는 평안도로, 여종 복덕은 홍양 관노비로 유배됨으로써 그의 집안은 완전히 풍비박산 나고 말았다.

 

황사영의 백서

문제가 된 것은 백서의 본론 중에 유럽 가톨릭 국가들이 무력을 동원하여 조선을 위협함으로써 천주교의 공인을 꾀하고자 한 ‘대박청래(大舶請來)’로 인해 그는 졸지에 매국노가 되었고, 교회 안에서도 유치한 계획 내지는 몽상(夢想)으로 비난의 화살을 받았다. 하지만 필자는 ‘함께 가는 성지’ 글을 시작하며 언급한 대로 결과보다 먼저 시대의 상황으로 들어가 공동선을 찾으려 한다. 왜냐하면 내가 순교자의 처지와 그분의 신앙심에 젖는 공감 없이 머리로만 이해한다면 순교자의 생생한 실화가 마치 옛이야기나 동화처럼 들릴 것이고, 따라서 순례를 많이 한들 신앙생활에 별 도움이 되지 않기에 공동선을 찾는 노력은 매우 중요하다. 지금은 문명의 발달로 컴퓨터 워드로 글쓰기가 좋은 시대다. 처음에는 거칠었던 글도 마음먹기에 따라 고치는 작업을 반복하다 보면 매끄럽게 다듬어져 글을 읽는 사람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고 작가의 의도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도 있다. 그러나 215년 전 열악한 토굴 안에서 그가 구한 것은 붓과 벼루, 명주가 고작이었고 언제 체포될지 모를 긴박한 상황에서 백서를 쓴 것만 해도 다행인데, 다시 고쳐 쓸 생각은 엄두도 못 냈을 것이다. 남이 완성한 글을 보며 토씨 하나를 고치기는 쉽고 써놓은 글을 비평하는 것이 글을 쓰기보다 훨씬 쉽다. 백서의 끝에 교우들이 박해 속에서 산간 등지로 이주하거나 헤매는 현실에 있어 대·소재(大小齋) 지키기가 어렵다는 것을 호소하며 관면을 요청했는데 필자는 알렉시오가 피신을 전전하며 교우들의 실상을 직접 겪고 쓴 글이라고 생각한다.

가난에 찌들어 초근목피로 살아가는 극빈자의 배고픔과, 손만 뻗으면 양반에 호의호식하며 살 수 있으나 하느님 때문에 포기하고 참는 배고픔과는 분명 차이가 있을 것이다. 만일 우리 각자가 224년 전 어무가 내린 황사영의 입장으로 되돌아간다면 어떤 삶을 살았을까? 추후의 망설임 없이 알렉시오처럼 좁고 험한 길을 택했을까? 아니면 20세가 되자 기다렸다는 듯이 정조 임금을 찾아가 부귀영화의 넓은 길을 갔을까? 포졸에게 쫓기면서 노모와 처자식이 보고 싶을 때 나라면 어찌 했을까? 차츰 벼랑 끝으로 몰리면서 그도 인간인데 고뇌의 땀을 흘리며 ‘비정상’에서 벗어나 정상이 되고픈 유혹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알렉시오는 마지막까지 ‘비정상의 자리’를 지켰다. 그 결과 집안이 풍비박산 난 것처럼 알렉시오의 몸도 극도의 고통 속에 사방으로 찢어졌다. 26세로 처참하게 최후를 맞은 알렉시오! 우리는 눈에 보이는 백서로 그를 평가하지만, 뼛속 골수와 숨은 생각까지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알렉시오가 ‘행한 대로’ 이미 넉넉히 갚아주셨음을 굳게 믿는다.

순교 연도로 보면 늦었으나 현재 창립 선조 이벽(세례자 요한)을 비롯하여 황사영(알렉시오) 선조가 ‘133위 순교자 2차 시복 명단’에 올라 시복시성이 추진되고 있어 다행한 일이다. 어서 결실을 잘 맺어 가마골에서 새 아침의 찬란한 햇빛이 떠올라, 그 빛이 널리 퍼져나가기를 순례자의 한 사람으로 두 손 모아 기도한다.

 

* 황사영 묘 :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가마골로 258번 길(산 3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