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로그인

하느님과 함께여서 행복하여라 - 제11화
성모님이 특별히 선택하신 곳에서


글 양 수산나|대봉성당

이번 달은 내가 사랑하는 대구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진 곳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하지만 누구나 환영받고 편안하게 느끼는 곳, 성모님께서 아주 특별히 선택하신 루르드다. 피레네 산맥 낮은 언덕 바위 동굴에 그분께서 하늘에 올림을 받아 영광을 입으시고 두 발을 디디신 곳이다.

성모님의 이끄심으로 루르드에 사도직 협조자 양성센터가 생기게 되었다. 루르드에서 내가 한 주된 일은 한국의 모든 교구에서 주교님들이 보낸 협조자와 후보자들을 돕는 것이었다. 신부님들이나 주교님들이 영어, 프랑스어 혹은 독일어로 하는 중요한 강의들을 대부분 속기해서 한국말로 반복해 주었다. 이것은 교리적인 양성에 아주 중요했고, 루르드 양성센터는 훌륭한 강사들의 도움을 받았다. 그분들은 전공 분야에서 세계적 수준이라고 인정받은 사람들이었다. 몇 분만 언급하고 싶다. 몬시뇰 데캉은 루벵대학교의 유명한 성경학자로, 그분 말씀대로 성경을 듣고 읽고 손으로 씀으로써 음미하고 소화하도록 도와주기 위해 여러 번 오셨다. 프랑스어권에서는 교황청 주교성 장관으로 무척 바쁜 가운데도 와서 강의해주신 가론 추기경님과 프랑스 주교회의 사무총장이신 교회사 전문가 위오 쁠러루 신부님이 있다. 영어권에서는 조규만 주교님과 함께 교황청 국제 신학위원회 위원인 폴 맥파틀런 신부님이 강의해 주었다. 이분은 이문희 대주교님과 박석희 주교님의 초청으로 한국에서 강의했고 그의 책이 우리말로 번역되기도 했다. 독일어권에서는 저명한 신학자 하이트마이어 박사, 한국어로는 박석희 주교님 등등 많은 분들이 양성에 기여했다. 이분들은 평신도들이 주교의 사도직에 참여하며 세상 속에 침투하여 복음을 사는 것이 이 시대에 얼마나 필요한지를 보고 바쁜 가운데도 시간을 내준 것이다. 그리고 세미나는 물론 개인으로도 도움을 주어 각 교구의 첫 협조자들이 기도하는 사도적 삶을 살아 성령께서 지역 교회를 위해 그들을 사용할 수 있게 양성하는 게 목표였다.

그러나 루르드는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이가 찾는 순례지이다. 1970년대 루르드 방문이 늘어나면서 한국인 순례자들의 안내가 필요했다. 특히 개인으로 오는 순례자들이 도움을 못 받아 제대로 순례를 못하고 돌아가는 안타까운 사정을 알게 된 이문희 대주교님께서 예수성심시녀회 수녀들이 이곳에 머물면서 한국인 순례자들을 도와주게 하였다. 그래서 협조자들이 양성시간을 쪼개서 이들을 돕던 일에서 해방되도록 해주신 이 대주교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내 부모님은 비신자여서 루르드에 있는 나를 한 번 방문하도록 설득할 필요가 있었다. 결국엔 오셨다. 그 후 런던으로 돌아가신 사랑하는 아버지께서 내게 편지를 보내셨다. “네가 알다시피 나는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걸 믿기가 어렵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너와 네 동료들이 하고 있는 것보다 더 멋진 일은 아무 것도 없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덧붙이셨다. “하지만 그 참한 아가씨들을 시집 못 가게 말리다니…? 아이고!”

 

루르드에서의 내 사명은 1973년부터 2004년까지 31년 동안 계속됐다. 한국은 2년마다 한 번씩 찾아와서 필요한 만큼 세미나도 하고 주교님들과 그들의 협조자들을 방문했다. 그것은 김수환 추기경님과 자주 만나고 훌륭한 한국 주교님들을 알게 된 기회였다. 그중 특별히 언급하고 싶은 분은 현재 광주대교구 교구장이시고 주교회의 의장이신 김희중(히지노) 대주교님이다. 그분이 로마에서 공부하실 때 나는 그분을 알게 되었다. 1970년대만 해도 사람들이 해외에 나가는 것이 흔치 않은 일이어서 루르드에서 양성 받는 한국 사람들에게 로마 순례의 기회를 한 번씩 갖도록 했다. 그때 히지노 신부님께서 여러 번 카타콤바 순례는 물론 고해성사도 베풀어 주셔서 이 기회에 특별히 감사를 표하고 싶다.

로마 순례 외에도 나는 새롭게 이 사도직 성소가 시작되는 필리핀과 인도네시아는 물론 미국, 일본, 싱가포르, 인도, 이란까지도 찾아갔다. 그러나 이 연재물은 한국에서의 내 삶의 이야기니까 아시아 여행에서 일어난 “한국”과 관련되는 사건 두 가지를 말하고 싶다.

인도네시아에서 이 성소의 삶을 처음 살게 된 사람은 대학교수였다. 그녀는 재정이 열악한 자카르타 가톨릭대학교 총장으로서 학술대회 참석차 한국에 왔을 때 내가 대구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들에게 소개했다. 당시 박정한 교수(나중에 부총장이 된)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 박정한 교수는 자카르타 가톨릭대 의학부에 구급차를 마련해 주기 위해 기금을 모았고, 몸소 그곳에 가서 전달하여 내 친구 총장에게 큰 기쁨을 주었다.

 그 다음에 내가 필리핀에 있을 때 서울의 사업가 한 분(나의 친구이자 은인)이 사업차 마닐라에 와서 나와 만났다. 그분이 말하길 “마지막 날은 하루 종일 시간이 있으니 가톨릭교회를 좀 보여 달라.”고 했다. 아직 그분이 세례를 받기 전이었지만 처가 쪽 가족들이 신자인지라 관심이 많았다. 내게 점심초대를 해준 필리핀 신부에게 이 친구와 나를 하이메 신 추기경님(당시 마닐라 대주교) 점심에 초대받도록 해달라고 청했다. 신 추기경님은 언제나 거대한 식탁에 사람들을 환영했다. 나는 이미 그분을 알고 있어서 그분은 우리 둘을 초대해 주셨다. 그러나 그날 같은 식탁의 주빈은 독일의 가톨릭원조기구 ‘미세레올’에서 온 분들이었다. 그 식탁에서는 원조금 사용에 문제가 있어서 토의가 이루어졌다. 나는 옆에 있는 이 한국 사람이 신경 쓰여 쳐다보았더니 그분은 나직한 소리로 말했다. “이런 문제를 이처럼 단순하게 열린 마음으로 토의하는 걸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어요!”

 식사 끝에 신 추기경님은 그 한국인에게 “한 선생님, 아직도 망설입니까?” 하고 물었다. 내 친구는 “추기경님, 아직 몇 가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하고 대답했다. 추기경님은 “아우구스티노 성인께서 어느 정도까지는 믿기 위해 이해해야 하지만 어느 시점에 이르면 알아듣기 위해 믿어야 한다고 했어요.” 한 씨가 갑자기 벌떡 일어서서 “그렇다면 추기경님, 저 믿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성령께서 일을 하신 것이다. 추기경님께서 기뻐하시며 한 씨에게 묵주를 선물하시고 당신 자동차로 우리를 호텔까지 데려다 주도록 하셨다.

 다음 달에는 은퇴생활의 이야기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