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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이야기
선택


글 박경현(프란치스코)|포항 오천고등학교 교장, 진량성당

 지난해 어느 부부동반 모임에서의 일이다. 친목모임이라 술이 몇 순배 돌았을 때 즈음이었다. 그날 모임은 평소 격이 없는 동료, 후배들과 함께하는 편한 자리였고 나도 못하는 술을 몇 잔 기울이고 나니 행동과 목소리가 조금씩 커지고 말하는 시간도 길어졌다. 술자리라는 것을 감안하면 특별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친근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흔한 풍경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내는 내가 어떤 경우에라도 남들의 말을 잘 들어주고 꼭 필요한 말만 하는 품위있고 절제된 행동을 하여 후배들의 본보기가 되는 모습을 늘 원한다. 자신의 기대에서 점점 더 멀어져 인내의 한계를 넘나드는 나의 모습을 참다 못해 옷깃을 당겨 보기도 하고 남모르는 눈 흘김으로 경고도 보내고 허벅지를 찔러 보는 등 만류해 보려고 온갖 애를 썼다.

하지만 아무런 효과를 얻지 못하자 체념한 듯이 고개를 돌리며 한숨과 함께 나에게만 겨우 들릴 듯한 중얼거림으로 “25년 전으로 되돌아 갈 수만 있다면….” 그 순간 나는 못들은 척 대꾸는 하지 않았지만 아내가 마무리 하지 않은 뒷말을 혼자 상상하며 나에게 관대하지 못한 태도에 대해 원망하고 있었다. ‘나는 결코 당신과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미쳤지, 당신의 이런 모습을 미리 알아채지 못하고 덜컹 부부가 되어서 아이를 둘이나 낳았으니 이제 와서 되돌아 갈 수도 없고, 내 눈을 내가 찔렀으니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고, 그때 좀더 현명한 선택을 해야 했는데 후회가 막급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잠시의 침묵이 흐른 후에 나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25년 전으로 돌아가면 당신과 나는 사랑에 빠져 있었을 것이다.” 

나는 남녀공학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이성간에는 교제하지 않을 때에만 건전하다.”, “이성에너지의 평화적 이용.” 이런 논리로 이성교제는 젊은이들이 꿈을 펼치는 데에 큰 장애물인 것처럼 교육을 받았다. 지금의 아이들은 조선시대 이야기냐고 하겠지만 우리 세대의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이성교제는 학생신분으로서는 금기사항 중의 하나로 여겼었다. 모든 것이 궁핍하던 시절, 오로지 학생은 공부에만 매진하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여자 친구와 읍내의 빵집이나 분식집에 드나드는 것은 단박에 소문으로 번져 학생부에서 조사가 시작되기도 하고 결과에 따라서는 부모님이 호출되는 무서운 대가를 치르기도 했다. 그래서 사람들의 눈을 피해 학교에서 제법 떨어진 곳에 위치한 절 주변에서 요샛말로 데이트를 즐긴 친구들이 더러 있었던 모양이다. 이성교제로 처벌을 받는 많은 학생들이 그 절 주변의 순회지도에서 걸려드는 것을 보고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한동안 그 절 주변에 가지 않았을 정도로 겁이 많았거나 준법성이 뛰어났거나 한 아이였다. 나는 위험한 감정의 늪에 빠져 시간을 허송하지 않도록 마음의 빗장을 굳게 잠그고 매일매일 일기를 쓰기도 하고 학교생활에 집중하면서 고등학교뿐만 아니라 대학까지도 무사히(?) 졸업했다.

그러나 교단에 발을 들여 놓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우연히 가톨릭 동아리 신입생 환영회에서 아내를 처음 만났다. 나의 계획보다 무려 5년 이상 이른 시기에 마치도 무엇에 홀린 듯 그토록 단단했던 결심은 허물어지고 몇 겹으로 채워져 있던 빗장이 일시에 풀리며 사랑에 빠졌다. 아내와 나는 성격이 아주 다르다. 나는 머리로 사는 사람이다. 무엇이나 분석하고 기존의 방식을 따르기보다 변화를 추구하고 어떤 희생이 있더라도 의도했던 것을 성취해내는 것에 큰 의미를 둔다. 과제가 주어지면 자유로운 토론에 의해 결과를 도출하기 보다는 혼자 생각에 몰입하여 스스로 결정을 내려 다른 사람도 동의해 주기를 기대한다. 낯가림이 심하여 낯선 환경에서 적응하는 데에는 시간이 많이 걸리는 편이며 다른 사람과의 관계보다는 책임과 규칙을 중시한다. 목표지향적인 나는 공정한 분담과 책임있는 행동이 인간관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믿는 편이다.

하지만 아내는 전혀 다른 성격을 가졌다. 아내는 가슴으로 사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중시하여 혹시라도 관계를 어색하게 하는 행동이나 말에 대하여 매우 부정적인 느낌을 갖는다. 속마음은 불편하다 하더라도 언제나 밝은 표정을 유지하며 자신으로 인해 주변 사람들이 불편해 하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내가 손해를 보는 한이 있어도 배려심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듣는 것에 매우 민감하다.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배우자인 내가 그런 행동을 한 것에 대해서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래서 내가 조금 흥분하거나 분위기에 취해서 말이 많아지거나 행동이 과해져 함께하는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불편하게 하는 것에 매우 민감하다. 따라서 평소에 나의 이성적인 판단에 의한 행동이 가능한 순간에는 별 문제가 없지만 긴장이 풀리고 나의 절제되지 못한 행동을 대하는 순간이면 아내는 늘 좌불안석이다. 연애시절 자신이 갖지 못했던 이런 모습이 왜 멋있게 보였는지 후회가 된다고 종종 말한다. 그래서 나와 부부로 살아온 세월동안 매일 매순간 이해되지 않는 수없는 장면을 맞닥뜨리며 살아왔기에 다시 25년 전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이런 선택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아내의 말은 백 번 이해가 가고도 남는다.

〈노란 숲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 /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 /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중략)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많은 사람들이 애송했던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라는 시의 일부이다. 읽으면 읽을수록, 그리고 나이가 들어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더 깊은 공감이 가는 시다. 우리는 살아가는 매순간 동시에 갈 수 없는 숱한 갈림길을 만난다. 때로는 선택이 명확한 경우도 있지만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에는 똑같이 아름다운 여러 개의 길 앞에 서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오로지 하나의 선택이 불가피하기 때문에 바라다 볼 수 있는 가장 먼 곳까지 수천 번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고 많은 고민과 번민의 시간을 보낸 후 신중하게 선택을 하지만 나의 선택의 결과는 인생이 마무리 되는 순간이 되어서야 드러나는 것이다.

모든 스포츠가 마찬가지이지만 감독 놀음이라는 야구의 경우 경기의 승패는 특히 감독에 의해 좌우된다. 야구 감독의 경우 경기가 끝날 때까지 수없이 많은 판단을 해야 한다. 더 혹독한 것은 그 중대한 결정을 위해 주어진 시간이 넉넉하지 않다는 것이다. 더러는 몇 초의 시간 안에 앞으로 전개될 상황을 예측하여 선수들에게 신속히 지시를 내려야 한다. 그래서 감독은 언제나 경기에 집중하며 한순간도 눈을 떼지 못한다. 그리고 더 두려운 것은 자신의 판단의 결과가 즉시 드러난다는 것이다. 관중들은 결과만으로 평가하여 시시각각 환호와 비난을 쏟아내며 즐긴다. 하지만 스포츠가 재미있는 이유는 예측이 가능하지 않고, 채울 수 없는 기대들이 있고, 잘못된 선택들로 인한 실패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만일 작전을 펼칠 때마다 성공만 거두는 감독이 있다면, 항상 홈런만 치는 타자가 있다면 우리는 그 경기를 즐기지 못할 것이다. 잘못된 선택이라 비난했던 판단이 행운으로 돌아오기도 하고 의외의 결과를 만들기도 한다. 실패한 작전은 스포츠를 즐겁게 이끄는 성공 요소인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인생 여정이 즐거운 것은 끝날 때까지 아무도 알 수 없는 길을 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고, 오늘의 삶의 모습은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먼 과거의 선택에 의해서 이루어진 결과인 것이다. 내가 살아온 57년 세월을 생각해 보면 까치발을 하고 내려다 봐도 다 보이지 않는 갈림길에서 우연한 선택이 행운을 가져다 주었기에 지금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이다. 마치 단 한 번의 잘못된 선택으로 탈락하고 마는 O, X 퀴즈대회에서 나는 수천 개의 문제를 찍어서 맞힌 사람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학교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곳이다. 가르친다는 선택을 준비하는 것이다. 우리는 아이들이 윤리적으로, 그리고 공동체의 약속을 벗어나는 선택에 대해서는 단호하고도 엄격할 필요가 있겠지만 가치의 문제, 진로의 문제에 대해서는 선택의 결과보다는 선택의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학습할 필요가 있다. 부모로서, 교사로서 우리들은 아이들보다 더 많은 경험을 했다. 하지만 우리들 역시 남아 있는 우리들의 미래를 위한 선택을 해야 할 사람들이다. 우리들이 지나왔던 길과 똑같은 길들이 우리 아이들의 앞에 그대로 놓여있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은 각자 그들만의 수없이 많은 갈림길을 만날 것이다. 그 선택에 의해 인생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실패한 듯 보이지만 자신에게는 의미있는 길일 수도 있고 성공한 듯 보이지만 만족하지 못하는 길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생의 끄트머리에서 되돌아보면 인생에서 가지 않는 길은 없다. 그냥 내가 선택한 길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나의 선택에 의해 인생은 그 모습이 달라졌을 뿐 성공과 실패로 정의되지 않는다. 우리들에게 허락된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선택한 어떤 길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