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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가는 성지
치명자산 성지,이순이(루갈다) (1)


글 박정길(마르코)|형곡성당

한국 천주교회 창립을 시작으로 연도대로 글을 쓰다 보니 이번 달은 전주 치명자산에 발길이 멈췄다. 이 산은 예로부터 승암산(중바위산)으로 불렸으나 해발 300m에 순교자들의 유해가 안치된 후로 치명자산 또는 루갈다산으로 더 많이 불린다. 주차장에서 30분 정도 올라가면 산정에 산상 기념성당이 있다. 건물 옆 계단을 올라 X자 모양으로 된 계단을 조금 더 올라가면 둥근 묘가 있는데 이 묘는 이순이(루갈다)와 유중철(요한) 동정부부 외에도, 시부 유항검(아우구스티노), 시모 신희, 시동생 유문석(요한), 시사촌 동생 유중성(마태오), 시숙모 이육희, 이렇게 7명의 유해가 합장 되어 있다. 호남의 사도인 유항검 선조는 한국교회에 깊이 간여해 업적을 많이 남긴 지도자지만 이번에는 이순이(루갈다)의 깊은 믿음을 함께 묵상해 보려 한다.

 

이순이(루갈다)의 첫영성체

‘유희’로 불리던 이순이(李順伊, 루갈다)는 1782년 한양의 유명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부친 이윤하(李潤夏, 마태오)는 양녕대군의 후손으로 이수광의 8대손이며 당대의 학자 이익의 외손자이고, 모친은 한국교회 창립에 기여한 권일신의 누이다. 이윤하는 두 처남과 이승훈을 만나면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고 권 씨도 이때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권 씨는 자녀들을 신앙적으로 잘 교육시켰다. 그런 어느 날 주문모 신부가 그 마을에 오자 교우들이 성사 준비로 분주해졌다. 이순이는 성체를 모시려는 열망으로 잔뜩 부풀었으나 주 신부가 지금은 열네 살이어서 성체를 영해 줄 수 없으니 열다섯 살이 되면 첫영성체를 하자고 타이르자 그녀는 너무나 슬퍼 단식기도를 시작했다. 단식한 지 사흘째 되던 날, 영성이 깊은 어머니는 딸의 마음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녀의 오빠 이경도는 이러다 큰일나겠다 싶어 주 신부를 찾아가 사실대로 아뢰자 특별히 성체를 영하도록 허락했다. 루갈다는 성체성사의 의미를 이미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기쁨에 넘쳐 첫영성체를 한 후 “나에게 오신 예수님, 내 몸과 일치하신 예수님을 어떤 경우라도 더럽힐 수 없습니다.” 이런 결심을 한 루갈다는 점차 동정을 지키려는 열망으로 가득찼다. 그러나 당시 조선은 효와 충을 제일의 가치 덕목으로 삼았으므로 독신으로 살 수 없는 시대였다. 일단 결혼을 하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고, 주 신부의 소개로 전주에 사는 유항검의 아들 유중철과 혼담이 오갔다. 유항검은 대부호에 지방의 양반이었으나 루갈다의 집안은 왕손이었다. 문중의 어른들이 찾아와 격에 맞지 않는 혼사라며 극구 반대하자 1797년 이경도와 모친 권 씨의 기지로 비난을 지혜롭게 풀어나가 마침내 관행에 따라 한양 한림동 집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누이여!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

루갈다는 시집에서 많은 곁 식구와 함께 살면서 집안에서는 온유함의 꽃이요 마을에서는 이름 모를 향기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지 얼마 후 루갈다가 사는 초남 마을에 포졸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시부 유항검을 먼저 체포해 한양으로 압송했고, 이어 남편 유중철도 전주로 끌고 갔다. 그해 9월 중순에 루갈다와 나머지 가족들도 체포되어 전주로 끌려가자 루갈다는 옥에서 어머니와 두 언니에게 편지를 썼다. 그중에 모친에게 보낸 옥중편지에 ‘저희 부부가 함께 살면서 육체적 유혹을 10여 차례 받았으나 4년 동안 동정을 지키며 오누이처럼’ 살아온 내용이 들어있었다. 만일 옥중편지에 심정을 고백하지 않았다면 동정 사실이 영원히 묻혔을 터인데 다행스럽게도 이 편지가 공개되어 우리에게 귀감이 되고 특히 성이 문란한 이 시대에 우리의 몸가짐을 살피게 한다.

 한편 루갈다는 남편이 부유한 집안에서 고생없이 살아왔기에 혹 배교하지 않을까 애가 타서 간절히 기도했다. 그런 어느 날 남편의 순교소식을 듣고 기뻐하면서도 안심이 안 되었다. 저녁때 유품이 오자 루갈다는 급히 소지품을 뒤지다가 쪽지 하나를 발견했는데 그 속에 “누이여! 우리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라고 남편이 급하게 쓴 글을 보고 비로소 안도하며 기뻐 울었다. 남편의 짧은 글은 루갈다가 동정부부로 산 고백이 참되다고 확증해준 것과 같다. 전주 관장은 루갈다와 그녀의 친척에 대한 판결을 조정에 요청했는데 뜻밖에 함경도로 유배 판결이 나자 루갈다는 아연실색했다. 당연히 순교할 줄 알았는데, 관노로 팔려 가면 동정을 잃는 것은 한순간이고 노리개가 될 것이다. 그녀는 친척을 대신해 관청에 소리쳤다. “나는 천주교 교우입니다! 죄인인 나를 국법대로 다스리지 않으면 당신들은 직무에 태만한 사람들입니다. 어서 처형해주십시오!” 아무리 항거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런데 사흘째 되는 날 백여 리쯤 유배 길을 왔을 때 포졸들이 쫓아와 다시 잡아가는 것이 아닌가? 루갈다는 참담한 상황을 되돌려 순교할 기회를 주신 천주께 감사드리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1802년 1월 31일(음력 1801년 12월 28일) 친척들과 함께 숲정이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는데, 당시 20세였다.

루갈다는 첫영성체를 한 후 마음이 바뀌었고 동정 결심이 이루어져 ‘동정부부’로 살다가 마침내 순교로 삶을 완성했다. 220년 전 루갈다는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그대로 믿었고 온몸으로 향주삼덕을 실천했다. 우리도 평일에 또는 주일마다 성체를 모시는데 어째서 이런 믿음이 없을까? 루갈다는 박해시대에 살았으니 평생에 성체를 영한 횟수가 다섯 번을 넘지 않았다고 본다. 우리는 루갈다보다 성체를 더 많이 모셨다. 이토록 성체를 많이 영했는데도 기쁨이 샘솟지 않고 삶이 바뀌지 않는 이유는 뭘까? 여러 요인이 있겠으나 박해시대 때 드렸던 미사와 우리가 드리는 미사가 어떤 차이가 있는지 공동선을 찾아보려 한다.

 

Ⅰ. 미사 준비

열심히 사는 신자도 있지만 별다른 준비 없이 너무 편하게 성당에 오는 신자도 있는 것 같다. 미사에 안 가면 허전하고 뭔가 손해 보는 것 같아 습관적으로 참례하고 있지는 않은지 또 다른 문제는 없는지 잠시 멈춰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선조들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신앙을 지켜왔을까? 최양업 신부를 따라 166년 전으로 잠시 돌아가 보자. “200명이나 되는 공소에서 사목한 지 사흘째 되던 날, 마을 이장이 제가 여기 온 것을 알고 마을 사람들에게 서양 사람이 왔다고 떠벌려 동조자들과 함께 집으로 들이닥쳤습니다. 점심때부터 밤까지 온갖 횡포와 욕설과 저주를 퍼부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더니 내일 다시 오겠다며 돌아갔습니다. 저는 전교사와 공소 회장들의 권고를 받아들여 한밤중에 그곳에서 도망쳐야 했습니다. 성사를 받지 못한 다른 교우들은 다음 날 저를 뒤쫓아 백 리나 되는 험준한 길에도 불구하고 다른 교우촌까지 와서 성사를 받았습니다.” “한 번은 다른 공소로 가려고 어떤 마을을 지날 때 그 마을 교우가 잠시 들러달라고 간청하여 집으로 갔는데 그중 한 사람은 15리나 떨어진 곳에서 왔습니다. 제가 이 마을을 지나간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집을 비워둔 채 아내와 열 살쯤 되는 아들을 데리고 길도 없는 험한 산을 넘어 저를 만나러 온 것입니다.” “우리 교우들은 천상 보화를 얻기 위해 어떤 희생이라도 아끼지 않습니다. 이러한 은혜를 받기 위해 이틀이나 사흘 길을 걷는 것쯤은 오히려 가볍게 여깁니다.”(일곱 번째 편지에서 발췌)

 필자는 초등학교 2학년 무렵 할머니가 금요일만 되면 숯불이 담긴 무쇠 다리미를 잡고 흰 천을 다리는 것을 봤다. 처음에는 예사로 여겼는데 학년이 올라가면서 할머니가 정성 들여 다리던 그 천이 ‘미사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미사보를 빠는 그 시간부터 할머니의 주일미사는 이미 시작되었고, 성체를 영하는 기쁨도 미리 맛보았을 것이다. 또한 깨끗해진 미사보를 다림질하면서 구겨진 마음도 하나하나 폈을 것이다. 할머니의 온화했던 성품을 떠올리면 항상 이런 그림이 나오기 때문이다.

우리는 미사의 중요성을 잘 알지만 쉽게 잊어버리므로 ‘내가 왜 미사에 가는지’ 나 자신에게 자주 물어봐야 하고 마음가짐이 바로 서면 선조들처럼 미사에 참례하려는 열의(熱意)를 가지고 공복재도 지켜야 한다. 공심(공복)재는 성체를 흠숭하고 성체를 잘 영하기 위해 마음과 육신을 비우는 것이기에 어떻게 준비하고 어떤 마음으로 오느냐에 따라 받는 은총이 다 다르다고 본다. 그리고 가끔 일찍 나서서 신앙 선조들의 삶을 묵상하며 걸어서 성당에 오는 희생도 있어야 한다.

 

Ⅱ. 우리는 말씀과 성체의 힘으로 산다

미사참례를 하고 있는 우리 신자들은 ‘성찬 전례와 영성체 예식’이 끝나면 순서대로 일어나 제대 앞으로 나온다. 사제가 “그리스도의 몸” 하면 “아멘.”으로 응답하는 순간 사제의 엄지와 검지에 있던 성체가 우리 손바닥에 놓이고 신자들은 성체를 입안에 모시며 자리로 돌아온다. 성가가 2절로 넘어가면서 오르간의 반주와 성가 소리가 더 커졌다. 자리에 다소곳이 앉으며 눈을 감는 신자가 여럿 있지만 소리에 휩쓸려 묵상이 흐지부지될 때가 많다. 또 어떤 신자는 성체를 언제 삼켰는지 자리에 앉자 바로 성가를 따라 부른다. 이 시간은 창조주께서 성체의 형상으로 피조물의 먹이로 오시는 엄청난 기적의 순간이며 예수님이 내 안에, 내가 예수님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순간이다. 이때만큼은 예수님과 무언의 대화, 내적일치를 이루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세상의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중차대한 시간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쉬움이 들 때가 많다. 필자는 복사를 서기 전 제의실에 있는 기도문에 눈이 갈 때가 많은데 ‘지금 봉헌하려는 이 미사가 저의 마지막 미사가 될 수도 있음을 깨닫고’ 이 부분에 이르면 마음이 뭉클해진다. 사제가 이런 심정으로 미사를 봉헌하는데, 우리 신자들은 안타깝게도 어제도 오늘도 성체를 영했고 내일도 성체를 영할 수 있다는 안일한 틀에 갇혀 절박함과 간절함을 잊고 산다. 그러나 우리 중 누군가에게 오늘 이 미사가 ‘마지막’이 될 수 있고, 그 주인공이 바로 내가 될 수 있다. 내가 방금 모신 성체가 ‘내 생애 마지막 영성체’라면 평화롭게 성가를 부를 여유가 있을까. 아마도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되어 참회와 속죄를 할 시간조차 부족할 것이다. 내가 죽는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으면 지금 미사를 봉헌하는 사제가 멀리 떠나 이제 다시는 성체를 모실 수 없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 선조들은 실제로 이런 상황에서 사형수처럼 눈물을 흘리며 마지막 미사를 드렸다. 흐르는 물에 이끼가 끼지 않는 것처럼, 우리도 일탈하여 가끔 박해시대 때 신앙 선조들이 드렸던 절박한 미사로 돌아가 그 안에 머물며 간절함을 배울 필요가 있다.

“우리가 교우촌에 도착하면 어른이고 아이고 남녀노소 구별 없이 모두 새 옷으로 갈아입고 신부님께 인사드리려고 한꺼번에 몰려옵니다. (중략) 우리가 교우촌을 떠나려고 여행할 옷으로 갈아입을 때부터 공소 전체가 울음바다가 되고 탄식 소리가 진동합니다. 어떤 교우는 저를 못 떠나게 붙들려는 듯 옷소매를 붙잡고, 어떤 교우는 제 옷깃에 그들의 애정 정표를 길이길이 남기려는 듯 제 옷자락을 눈물로 적십니다. 그들은 저를 따라나서서 제가 멀리 사라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며 돌아가려 하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좀 더 오랫동안 제 뒷모습을 지켜보기 위해 산등성이에 올라가기도 합니다.”(일곱 번째 편지에서 발췌)

 

가경자 최양업(토마스) 신부의 편지 구절구절이 세속에 젖어 해이(解弛)해진 우리의 정신과 영혼을 흔들어 깨우는 자극제가 되었으면 한다.

* 치명자산 성지 :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낙수정2길 103-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