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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가는 성지
치명자산 성지,이순이(루갈다)와 어머니 권 씨(2)


글 박정길(마르코)|형곡성당

 

죽어야 산다

지난달 최양업(토마스) 신부의 편지를 소개하느라 미흡했던 부분을 먼저 보완한 다음 공동선을 찾으려 한다. 루갈다의 동정결심은 오직 하나, 복음의 권고인 향주삼덕(向主三德)을 잘 실천하기 위해서였다. 이미 언급했듯이 박해시대에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려고 루갈다처럼 동정으로 살려는 처녀들이 많았다. 그러나 미혼으로 살아갈 수 없는 시대의 걸림돌에 부딪혀 하나둘 꿈을 접었으나 루갈다는 걸림돌을 디딤돌로 삼았던 것이다. 남존여비가 엄했던 시대에 루갈다가 아무리 동정결심을 해도 모든 결정은 남편한테 달렸기에 루갈다는 더 간절히 기도했고 마침내 ‘동정으로 살자.’는 확답을 들은 것이다.

결혼생활을 하면서 4년 동안 ‘동정부부’로 살아온 것을 비유하자면 살얼음판과 같았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 같다. 동정으로 살다 동정으로 죽으면 좋을 텐데 박해시대에는 또 하나의 관문이 있었다. 그 문은 다름 아닌 순교(殉敎)였다. 목숨을 바치는 순교는 원의와 결단이 있어야 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혹독한 고통을 참아 받아야 한다. 체포된 뒤 바로 죽이면 좋을 텐데, 문초와 고문이 거듭되면서 고통은 극에 달한다. 루갈다도 여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혹독한 매를 맞아 정강이에서는 살이 터지고 온몸은 피가 낭자했다. 이런 몸으로 햇빛조차 들지 않는 감옥에서 옥사장의 눈을 피해 틈틈이 겨우겨우 쓴 것이 바로 옥중편지였다. 편지 여러 구절에 믿음·소망·사랑을 자주 강조한 걸 보면 그녀가 대신덕(對神德)을 몸소 실천했음을 알 수 있다. 지루하게 기다려온 처형의 날! 사형집행의 관례대로 망나니가 루갈다의 옷을 벗기려 하자 그녀는 “내가 비록 네 손에 죽는다만 어찌 감히 내 몸에 손을 대려 하느냐.”하고 당당하게 말한 후 자기 손으로 옷을 벗었다. 그런 다음 손을 가지런히 모은 뒤 목을 뉘었다.

 

루갈다의 어머니 권 씨

루갈다의 어머니 권 씨는 남편의 빈자리를 채우며 3남 2녀를 신앙적으로 정성껏 키운 결과 훗날 자녀들의 삶에 튼튼한 주춧돌이 되었다. 그로 인해 장남 이경도(가롤로)는 1802년 1월 29일 서소문 밖에서, 셋째 아들 이경언(바오로)은 1827년 6월 27일 전주에서 순교했다. 둘째 딸인 이순이(루갈다)는 결혼한 후 남편과 같이, 때로는 혼자서 시아버지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에 더 많이 애덕을 쏟았다. 유항검은 호남의 사도로 한국교회에 여러 중책을 맡아 집을 비울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시아버지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은 1801년 10월 24일, 남편 유중철(요한)과 시동생 유문석(요한)은 1801년 11월 14일, 이순이(루갈다)와 시 사촌 동생 유중성(마태오)은 1802년 1월 31일, 이렇게 다섯 명이 전주에서 순교했다. 루갈다의 친정 오빠 두 명을 합하면 일곱 명이 되는데 모두 2014년 8월 16일 광화문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루갈다의 이런 열성적인 믿음과 격려가 없었다면 친정과 시집에서 이처럼 많은 순교자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한 편의 연극에도 동원되는 인원이 많다. 무대 위에서 주연과 조연을 맡은 배우가 있는가 하면 잠시 비쳤다가 사라지는 단역도 있고 무대 뒤 어두운 곳에서 힘든 일을 하는 사람도 많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밝혀진 순교자보다 무명 순교자와 증거자가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필자는 루갈다의 어머니 권 씨의 행적을 찾다가 한계에 이르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다행스럽게도 김길수 교수의 좬하늘로 가는 나그네좭 책에서 권 씨의 행적을 찾아 인용한다. ‘권 씨는 명문대가(名門大家)에서 태어났는데 재주가 뛰어나고 미모가 출중했다.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 할 정도로 아름다운 미모와 뛰어난 재주를 타고났지만 오히려 예쁘고 머리 좋은 것이 영성적으로 도움이 안 된다고 싫어했다고 한다.’ 더 소개하고 싶으나 이 내용이 전부다. 그러나 현세를 사는 우리에게 들려주는 메시지는 많다. 좋은 머리에 비상한 재주로 출세했으나 부도덕과 인성 부족으로 지탄을 받아 하루아침에 추락하는 경우를 자주 보는데 차라리 평범하게 살았더라면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을 해본다. 또 요즘 들어 건강하게 살려고 둘레길과 등산로에서 운동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어딜 가나 운동복과 등산복 차림이 흔하다. 건강을 지키고 얼굴을 아름답게 꾸미고, 날씬한 몸매로 관심을 끌고 싶은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그러나 뭐든 정도가 지나치면 중독이 되고, 집착하면 할수록 더 목마르기에 적정선에서 멈출 줄 알아야 한다. 세상은 우리의 눈과 발을 멈추게 하고 유혹하는 것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즘 들어 ‘저작권’이란 용어를 많이 사용하는데 문학, 예술, 학술을 망라하여 창작품을 저작자의 허락 없이 함부로 쓸 때 저작권을 위반하는 것이다. 우리 중에 닮은 사람은 있어도 똑같은 사람은 없듯이, 우리들의 모상은 창조주께서 손수 지으신 창작품들이다! 우리 신자 중에는 없겠지만 혹시 예뻐지려는 목적으로 성형수술을 하려는 신자가 있다면 권 씨가 ‘오히려 예쁜 것이 영성적으로 도움이 안 된다.’고 한 말을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문(門)에 서는 연습을 해야 한다

필자는 40여 년이 흘렀으나 군대에서 공수교육을 받던 일들이 가끔 생각난다. 후반기 교육을 마치고 자대로 오자마자 11월 초에 훈련장에 투입되었다. 착지훈련, 산개검사, 점프연습 훈련 중에도 선착순 구보, 피티 체조 등을 수없이 했고 정신통일이라는 명목으로 살얼음이 언 큰 웅덩이에 중대 병력이 들어가 뒹굴기도 했다. 11m 높이의 막타워 탑에 올라가 뛰어 내리기를 수차례, 교관이 합격할 때까지 무한 반복을 하다가 마침내 주 낙하산과 보조 장비 등을 갖추고 수송기에 탑승했다. 이 수송기를 타기 위해 신물 나는 기합을 얼마나 받았던가? 오래되어 기종은 잊었지만 수송기가 730m 상공을 두 번 선회하더니 낙하지점이 멀리 보이자 교관의 지시대로 점프하기 위해 안전 고리를 걸고 문에 섰을 때, 신물 나는 훈련이 왜 필요했는지 비로소 깨달았다. 편하게 훈련을 받고 이 자리에 섰더라면 오금이 저려 주저앉고 말았을 것이다. 훈련을 받을 때는 힘들고 고통스러웠지만 지금은 활력이 된 것이다. 눈 앞에 펼쳐진 맑은 하늘과 구름의 사이사이를 뚫고 비추고 있는 햇빛으로 눈이 부셨고, 마치 별천지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날의 점프는 경관에 도취해 예상했던 것보다 잘했고 그 추억은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런 기억 때문인지 필자는 지구촌 전체가 커다란 여객기(旅客機) 안에 들어와 있는 그런 느낌을 받고 상상의 나래를 펼칠 때가 있다. 우리는 모두 갓난아기로 세상에 태어났는데, 몇 날 몇 시에 어느 나라 어떤 부모한테서 태어나야지 하며 계획을 갖고, 계획대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또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겠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겠지만 죽는 날 역시 모르고 산다. 이것을 여객기 안으로 그대로 옮겨와 표현하자면 우리 각자가 여객기에 탄 시간대는 다 다르지만 탔으니 내려야 하는 것은 다 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내리는 결정을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문 앞을 지키고 있는 마스터인 교관이 한다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모든 것은 여객기의 주인이요 우주 만물의 주재자이신 하느님의 권한에서 나오지만 아직 하느님을 뵌 승객은 아무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워낙 안이 크고 넓다 보니 여객기에 타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뿐더러, 지금 비행을 하고 있는지조차 가늠하기 어렵지만, 여전히 비행을 하는 것은 확실하다. 승객이 많으니 내리기 좋도록 문이 띄엄띄엄 있고 문마다 교관이 서 있다. 문을 나가기 위해 대기 중인 승객들의 줄이 끊어지지 않으나 잠시 잠깐 한적할 때가 있는데 이때는 교관의 휴식시간이기도 하다. 그런데 교관이 방심한 틈을 타서 무단으로 문밖으로 몸을 던지는 승객이 자주 있다. 이곳은 낙하지점이 아니기에 위험천만하고 무모한 짓이다. 주의를 주지만 이런 불상사는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교관의 부름을 받고 문에 서는 승객은 남녀노소 구별이 없고 몸이 불편한 어르신들도 눈에 띈다. 그런데 안타까울 때가 종종 있다. 부모 곁에 더 있어야 할 어린아이와 청소년을 볼 때가 그렇다. 어린애가 불안을 느꼈는지 갑자기 울음보를 터트렸고 앳된 여학생은 문에 서기가 무서워 무릎을 꿇으며 교관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매달린다. 연세 드신 분은 그래도 오래 살았으니 쉽게 나갈 줄 알았는데, 교관한테 온갖 욕을 퍼부으며 버티다가, 결국 등 떠밀려 문밖으로 사라졌다. 또 어떤 부부는 상황 파악이 안 되는지 금은보화가 가득 담긴 가방을 끌고 나가다가 망신을 당했다. 그렇다고 모두가 준비 없이 떠나는 것은 아니다. 드물지만 교관이 호명하자 편한 모습으로 문에 서는 승객이 있는가 하면, 주변의 승객들과 일일이 포옹과 악수를 한 다음 교관한테도 다정한 미소를 보내며 마지막을 장식하는 승객도 있다. 순교자들은 고통이 끝날 날을 지루하게 기다렸고 처형의 날이 오자 기뻐했다! 우리도 미구(未久)에 문(門)에 설 것인데 어떻게 마지막을 장식할 것인가?

 

평소에 잘하기 또는 결정적일 때 잘하기

순례자들은 주로 외딴곳에 있는 ‘성지와 묘를 찾아다니며 순교자와 증거자들의 믿음과 삶, 그리고 죽음을 묵상’하는 여정이기에 누가 필자에게 성지순례를 왜 하느냐고 묻는다면 ‘순교자들처럼 비록 피는 흘리지 못할지라도 순교 정신을 이어받아 잘 살다가 잘 죽기 위해서’라고 답할 것이다. 그런데 잘 죽자고 해서 하루아침에 죽는 것도 아니고 잘 죽기 위해서는 ‘지금’을 잘 살아야 하는 책임이 따라온다. 책임에는 부담이 따르지만 그렇다고 마냥 어려운 것은 아니라고 본다. 많은 순교자 가운데 일상을 잘 준비한 선조들도 있지만 결정적일 때 잘한 순교자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 예를 먼저 성경에서 찾을 수 있는데 바로 베드로와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강력히 부인했으나 결정적일 때 슬피 울며 통회했기에 교회의 반석이 되었다. 하지만 유다 이스카리옷은 결정적일 때 용서를 청하지 않고 스스로 멸망의 길을 갔다. 잘하다가도 결정적일 때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반대로 평소에 좀 부족하고 잘못한 것이 있어도 결정적일 때 잘하면 빛이 나기 마련이다. 그런데 결정적인 기회가 언제 올지 모르니 이 또한 깨어있을 수밖에 없다. 바쁘게 살다 보니 우리가 깨닫지 못할 뿐이지 죽음은 늘 곁에 있고,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기에 언제든 뒤집힐 수 있다. 그럼 어떻게 준비를 해야 할까? 잘 죽기 위해서 여러 방법이 있겠으나 필자는 이런 제안을 하고 싶다. ‘지금 이 시각에도 여러 형태로 세상을 떠나는 모든 임종자를 잠시라도 기억하고 기도하는 일이다. 임종의 순간은 그 사람의 인생이 총정리 되는 시간이며 구원과 멸망의 갈림길에서 사투를 벌이는 절체절명의 순간이기에 누군가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때다. 다음은 연옥에서 정화되고 있는 영혼들이 하루속히 천국에 들어가도록 생각날 때가 아니라 매일 지향을 두고 기도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혼들은 우리보다 앞서 생을 마감한 선배이고 우리도 조만간에 그 길을 갈 것이니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지복직관을 누리는 성인들께 도움을 청하고, 자구책(自救策)이 없는 임종자들과 연옥영혼을 내 형제 내 자매처럼 기도와 희생으로 돕다 보면 우리가 문(門)에 섰을 때 보은(報恩)을 입는 것은 분명하다. 이것이 신앙고백에 나오는 천상교회와 지상교회, 단련교회를 아우르는 ‘통공’이다.

독자들께 감사드리며 지난해보다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2017년 새해를 새롭게 시작했으면 한다.

* 치명자산 성지 :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낙수정2길 103-88

 

● “함께 가는 성지”는 이번 호로 끝맺습니다. 글을 써주신 박정길 님과 애독자 여러분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