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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글
삶 곁에 있는 죽음


글 최성준 이냐시오 신부 | 월간 〈빛〉편집주간 겸 교구 문화홍보실장

 

얼마 전 욕실에서 샤워를 하다가 미끄러져 넘어졌습니다.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넘어져서 한동안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였지요. 만약 머리라도 부딪혔다면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이후로 한동안 다리를 절룩거리며 죽음에 대해서 많은 묵상을 했습니다.

그리고 욕실에서 넘어진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 호철이 형(최호철 신부님)이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를 들었습니다. 심장마비였습니다. 관덕정에 찾아갔을 때도 만났고, 얼마 전 성유축성미사 때도 봤었는데…. 죽음은 예고 없이, 너무나 갑자기 찾아왔습니다. 장례식장에서 슬퍼하는 어머님과 수많은 문상객들을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삶은 참으로 허무하구나, 죽음의 힘은 너무나 크구나, 예고 없이 닥치는 죽음 앞에서 인간은 너무나 무력한 존재구나….’

 

 우리는 평소에는 특별히 죽음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죽음이 나와는 상관없다는 듯이 살아갑니다. 아니, 아예 죽음을 잊고 삽니다. 하지만 죽음은 의외로 우리 삶에 가까이 있습니다. 삶의 요소요소에서 죽음은 빈틈을 노리며 기다리고 있지요. 오스트리아의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의 「삶과 죽음」이라는 그림을 보면, 화려한 삶의 모습들 옆에서 해골 모습을 한 죽음이 망치를 들고 서서 삶을 노려보고 있습니다. 어린 아이를 안은 여인은 행복에 겨운 모습으로 눈을 지그시 감고 있습니다. 죽음이 언제 덮칠지 걱정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림에서 화가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처럼, 죽음은 우리의 삶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삶 안에서 늘 죽음을 묵상하며 살아야 합니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을 걱정하며 두려워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죽음을 묵상하는 이유는 삶에 더 충실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느 날 공자의 제자인 계로(자로)가 귀신을 섬기는 것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그러자 공자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직 사람을 섬기는 것도 못하는데 어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느냐?” 그러자 자로가 다시 죽음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그러자 공자께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직 삶도 다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1)

 

공자가 왜 죽음에 대해서 가르칠 말이 없었겠습니까? 하지만 사람들이 귀신같은 영적인 존재에 관심을 갖고, 죽음을 두려워하며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궁금해하는 것을 보고, 중요한 것은 사람이며 삶이라는 것을 가르치고자 하신 말씀이겠지요.

 

우리는 ‘지금, 여기’에 발 딛고 사는 존재들입니다. 현실의 삶이 중요하고, 지금 만나는,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이 소중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삶 너머, 죽음 이후를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지금, 여기’를 넘어 하느님 나라의 영원을 꿈꾸어야 합니다. 그래서 죽음과 영원이 현재의 삶을 방해해서도 안 되고, 현실의 삶이 죽음과 영원을 부정해서도 안 됩니다. 이것이 찬란한 생명의 계절을 살면서도 우리가 죽음을 묵상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1) 論語,先進, 12. “季路問事鬼神. 子曰, ‘未能事人, 焉能事鬼?’ , ‘敢問死.’ , ‘未知生, 焉知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