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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지에서 온 편지 -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중앙아프리카공화국에서 1년을 지내며(7)
- 2015년 6월 23일부터 2016년 6월 23일까지


글 김형호 미카엘 신부 |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선교사목

 

생수와 생수통: 10월 6일

‘물’을 사는 이와 ‘물통’을 사는 이가 있다. ‘물’을 사 마시는 이는 빈 통을 버리고, ‘물통’이 필요한 이는 버려진 물통을 모아 파는 이에게 빈 물통을 산다. 특이한 풍경이다. 이 나라에는 중국에서 건설해 준 댐이 하나 있다. 그래서 수도 방기에 사는 사람들은 비교적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다. ‘비교적’ 이라는 말은 완전 흙탕물은 아니라는 말이다. 관로가 노후되고 소독-정수 시설이 미비하며 만만찮은 관리비용 때문에 열악하다. 그래서 수돗물은 거의 흐리고 빨래하기 불편할 때도 있으며 가끔 아주 깨끗한 물이 나올 때도 있다.

적어도 얼마 전까지 ‘방기(중아공 수도)에 사는 사람들은 수돗물을 먹는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큰 대로에서 조금만 골목으로 들어가 보면 사람들이 수돗물 대신 우물물을 사용하고 있다. 더 가난한 사람들이 골목 안에 사는데 골목 안까지 수도관이 설비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이들은 수돗물을 파는 곳(대로변에 많이 있다)에서 큰 물통으로 물을 사서 먹는다. 이 돈마저 없는 사람들은 오염된 마을 공동 우물물을 마신다.

  다행히 난 매주 교우들이 봉헌하는 생수 몇 병 덕분에 가끔 생수도 마실 수 있다. 실은 생수를 집안 가득 사놓고 먹을 수 있는 충분한 부자이나 미안해서 그러지 못하고 있다. 사실 사러가기 쉽지 않아 나름 뚜껑 있는 큰 통에 물을 받아 놓았다가 미세한 흙을 가라앉힌 후 깨끗해진 윗물을 마시거나 전기가 있는 시간에 조금 끓여 두었다가 마신다. 그래서인지 여태 큰 배앓이를 하지 않았다.

 가끔 시내 중심으로 나가보면 거리에서 생수통을 파는 사람들이 있다. 큰 자루에 넣거나 끈으로 주렁주렁 엮어서 들고 다니며 판다. 큰 통(1.5리터)은 50세파프랑(100원), 작은 통(500ml)은 25세파프랑(50원)이다. 거리에서 먹는 요깃거리가 100세파프랑 정도니 꽤나 비싼 편이다(참고로 생수 가격은 큰 통 기준 500세파프랑~1,000세파프랑이다.) 짐작하겠지만 생수를 사먹을 수 없는 이들에게 그 통은 참 유용하게 쓰인다. 수돗물을 담아 들고 다니며 마시기도 하고 식용기름, 액체류, 작은 곡식들을 담는 통으로 사용한다.

요즘 한 주에 두어 개 생기는 빈 생수통을 몰래 모으는 버릇이 생겼다. 팔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운 건기를 대비하여 미리 모으는 것이다. 큰 통으로 80여 개 정도면 테이핑하여 더운 여름밤을 시원하게 보낼 물침대를 만들 수 있다. 성공하면 특허등록(?)을 할 예정이다.

 생수를 사 마시는 몇몇 이들과 빈 생수통을 사는 많은 이들 안에서 난 그저 놀고 있다. 재밌게… 왠지 물침대에서 자게 될 그 날이 기다려진다.

 

배려와 합의: 10월 19일

프랑스 생활 중에 가끔 대형마트를 이용했다. 우리의 대형마트와 비슷한데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 계산원들이 의자에 앉아 근무한다. 우리처럼 지나친 친절인사도 없고 계산과정도 그리 날렵하지 않다. 계산 후에 인사는 누가 먼저라고 가늠할 수 없이 서로 마음껏 인사한다. 가끔은 계산중에 사적으로 느껴지는 전화(길게 통화하진 않았지만)도 받는다.

식당에 가도 우리와는 많이 달랐다. 자리에 마음대로 앉을 수 없다. 종업원이 안내해 주는 곳에 앉아야 한다. 고객이 종업원을 기다려야지 먼저 부르면 결례(큰 소리로 부르면 대단한 결례)가 된다. 식사 중에 서비스가 필요해도 테이블을 찾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고(최소한 눈이 마주칠 때까지 기다린다.) 물 한 잔이라도 청하면 “부탁합니다.”라는 말을 붙여야 한다. 음식이나 서비스에 불만이 있어도 예의를 갖춰 말해야 한다. 은행에서나 상점에서도 결코 고객이 왕이 아니다. 굳이 갑을을 따지자면 고객이 아니라 근무자가 갑인 셈이다.

처음에는 뭔가 돈을 쓰고도 제대로 서비스를 못 받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추후에 이런 문화가 ‘사람에 대한 배려’와 ‘사회적 합의’를 통해 자리 잡았다는 걸 알았다. 누구나 사람이라는 이유로 충분히 존중받아야 한다는 당연한 생각과 어떤 경우든지 사람은 주종관계가 성립되지 않는 문화가 프랑스혁명 이후 더 굳건히 자리 잡았겠지만 ‘사람 위에 사람이 없고 모두가 존중받아야 한다.’는 사람에 대한 배려가 오랜 세월 사회 전반에 젖어 있다. 모든 근로자는 고객일 때보다 근무자일 때가 시간으로 따지면 훨씬 더 많다. 그래서 고객이 좀 불편하더라도 근무자가 무시되거나 지나치게 낮춰야 할 필요가 없는 ‘사회적 합의’를 한 것이다.

돈이 최고가 아닌, 고객이 최고가 아닌, ‘사람보다 앞서는 것은 없어야 한다.’는 사람에 대한 배려와 주고 받는 서비스에 대한 사회적 합의… 시간이 지날수록, 지난 삶을 곱씹을수록 참으로 배울 점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갑질논란’이 많은 우리네 현실, 돈과 권력이 사람보다 너무 우선일 때가 많은 우리 사회가 안타깝다.

‘사람에 대한 충분한 배려’ 없이 성장이 먼저라고 내달리기를 너무 강조하는 우리, ‘사회적 합의’보다 힘이 더 우선시되는 우리네 현실, 역사마저도 힘의 취향으로 재단(조종)하려는 요즘, 더 버는 사람이 당연히 세금을 더 내고 약자를 먼저 챙기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사회, 모두가 살 만한 나라를 위해 ‘사람을 먼저 챙기며 이를 위해 제반 정책을 수립하는 문화’가 부러워진다.

 예전보다 많이 좋아진 우리 대한민국이지만 좀 더 사람 살기 좋은 나라가 되어가기를 간절히 바라며, 사람이 사람에게 갑질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서로 ‘갑대우’하는 현실을 꿈꾸며… 멀리, 중아공의 현실을 보고 느끼고 배우며 오늘을 살아간다.

 

원 포인트 레슨: 10월 24일

‘원 포인트 레슨.’ 한 분야의 전문인이 웬만큼 기본기를 익힌 이에게 행하는 적재적소의 짧은 가르침을 두고 하는 말이다. 스포츠 용어나 전자의 보는 눈과 후자의 충실한 기본기가 만나는 접점에서 ‘아하!’ 하는 깨우침으로 도약이 이루어지듯 살면서 그런 사람을 만나는 것은 행운이요 행복이다.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했다.

 오늘 참 아름다운 원 포인트 레슨을 보았다. 미사 중 음악적 감각이 뛰어난 이가 어떤 이에게 아버지 같은 자상함으로 뭔가를 가르치는 것이었다. 이곳 미사는 아주 경쾌하고 신난다. 내가 있는 성당도 ‘땀땀(아프리카 북)’과 어우러지는 미사는 신명 그 자체다. 그 중간에 철 조각(젓가락 길이의 철근으로 ㄱ자 철 앵글)을 두들기며 장단을 맞추는 이가 있다. 그는 경계선상의 지적 장애를 갖고 있다. 그는 아침 미사에서 신명난 두들김으로 하루를 충분히 즐기며 시작한다. 바로 그를 한동안 연민의 눈빛으로 바라봤을 장인(성가대 지휘자)이 다가가 더 맑은 음을 낼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 단 한 번의 가르침으로 그는 종전보다 더 맑게 경쾌한 리듬을 탔다. 오늘 그가 가르침을 주는 이를 바라보는 ‘그 고마움의 눈빛’을 보았다.

 우리 후배들에겐 이런 삶의 지혜를 가르쳐 주는 스승(장인)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내 세대까지는 이런 장인이 그리 귀하지 않았다. 빡빡한 학업 성취보다는 즐기는 삶을 가르쳐 주는 선생님이 많았고, 꿈을 안내해 주는 스승이 적지 않았다. 공부만 하라고 강요하지 않고 따뜻한 사랑으로 품어준 부모님이 계셨다. 넌지시 다가와 부모와는 다른 견지에서 원 포인트 레슨(가르침, 충고, 지혜)을 해주는 누나(언니), 형(오빠), 삼촌, 이모가 있었다. 이런 분들 덕분으로 나(우리)는 그리 모나지 않게, 어울리며 나누는, 그래도 도전하며 성취하는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 후배들에겐 이런 기회가 적절히 주어지지 못하는 아쉬움과 미안함이 있다. 자상한 가르침이 아닌 잔소리, 필요한(필요로 하는) 가르침이 아닌 원하는 강요가 많다는 우려가 든다. 원하는 이는 많은데 채워주는 이가 부족한 세대, 꼭 필요치 않은 것을 너무 많이 강요해서 원하는 것을 포기한 이들이 많아진 세대가 안타까울 뿐이다.

나에게 필요한, 적재적소에 우리에게 주어진 원 포인트 레슨, 나는 얼마나 그것을 부여잡고 누리며 살았던가?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마태 9,37)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마르 10,21)

“나를 따라오너라.” (마르 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