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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나누기 7단계와 주일 복음 묵상
복음 나누기 7단계와 주일 복음 묵상


박광훈 신부, 윤주현 신부, 김창현 신부, 반 유딧 수녀

 

매주 하는 복음 나누기 7단계

 

1 주님을 초대한다.

“기도로 이 자리에 예수님을 초대해 주십시오.”

 

2 말씀을 듣는다.

“ ― 복음 ― 장을 펴 주십시오. 어느 분이 ― 절부터 ― 절까지 읽어 주십시오.”(다 읽고 난 후 잠시 침묵한다.) “다른 분이 본문을 다시 한 번 읽어 주십시오.”

 

3 복음말씀을 마음에 새긴다.

“각자 마음에 와 닿는 단어나 짧은 구절을 선택하여 큰 소리로, 기도하듯이 세 번씩 읽어 주십시오. 읽는 사이에는 잠시 침묵을 지켜 주십시오.” “어느 분이 본문을 다시 한 번 읽어 주십시오.”

 

4 침묵 중에 주님의 말씀을 듣는다.

“3분 동안 침묵 속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을 듣도록 합시다.”

 

5 마음 안에 들려온 말씀을 나눈다.

“이제 각자 주님께로부터 들려온 말씀을 함께 나눕시다. 왜 그 말씀이 내 마음에 와 닿았는지, 그 말씀을 통해 주님이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6 모임에서 해야 할 활동에 대하여 토의한다.

“지난 번 모임에서 결정했던 사항을 어떻게 실천했는지, 그 결과와 개선해야 할 사항에 대해 이야기합시다.” “이번에는 어떤 활동을 하는 것이 좋을까요?” “우리 주위에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이웃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7 자발적으로 함께 기도한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자유롭게 기도합시다.”

 

 

 

6월 4일 성령 강림 대축일 : 요한 20,19-23.

글 박광훈 안드레아 신부 | 대구가톨릭대학교 대신학원 양성자

19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2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일상생활에 열정을 잃어버린 채 무기력하게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우리 안에 열정이 사라질 때 우리의 몸도 마음도 다 시들해지고 생기를 잃어버립니다. 우리 안에 열정이 사라질 때 우리의 삶은 창조적인 발전이나 영적인 성장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누구나 다 노력하면 되고 열정과 용기가 있으면 못할 일이 없음을 압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열정이 내 맘먹은 대로 생겨나는 게 아니란 사실입니다.

내가 열심히 살고 싶다고 맘먹은 대로 열심히 살아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요즈음 무기력하게 살고 계신다든지, 한 번 뜨겁게 온 힘을 다해 자신의 삶을 살고 싶다면 내 안에 열정을 불사르게 하는 원동력이 무엇인지, 그것을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를 먼저 생각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참된 열정은 객기나 만용도 아니고 잘난 체도 아니고 정말 말 그대로 열정일 뿐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성령을 받아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비참한 죽음으로 두려움에 사로잡혀 다락방에 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 성령께서는 뜨거운 열정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시고 변화시켜 주십니다. 어제까지는 슬픔에 잠겨 의욕을 상실하고 유다인들에게 붙잡혀 죽을까봐 갖은 걱정으로 떨었지만 오늘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문을 박차고 밖으로 뛰쳐나가 복음을 선포합니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아도 안 생기던 그 뜨거운 열정이 솟아난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배가 가라앉을 만큼 많은 고기도 잡아 봤고, 허허벌판에서 수천 명의 장정들이 배고파할 때 그 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인 빵의 기적도 봤고, 물 위를 걷는 예수님의 모습도 봤고, 가슴을 후벼 파는 가르침도 많이 들었지만 십자가의 고통이 찾아 왔을 땐 주님을 모른다고 했던 제자들입니다. 그것도 좋습니다. 그런 제자들을 찾아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위로해 주시고 못자국난 손과 옆구리까지 보여 주며 몇 번이나 나타나셨건만 그래도 늘 겁에 질려 문을 꼭 걸어 잠그고 숨어 지냈던 그들이었습니다. 제자들 자신도 얼마나 맘이 아팠겠습니까? 예수님한테 자기들이 받은 사랑을 생각하면 불효한 아들처럼 늘 마음이 걸리고 아팠지만 그래도 예수님처럼 그렇게 살 자신과 열정이 생기질 않으니 자기들도 죽을 맛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사실 나도 잘 살고 싶은데, 남들처럼 행복하게, 멋있게 잘 살고 싶은데, 안 좋은 버릇도 뜯어고치고 싶은데 그렇게 할 용기가 생기질 않으니 답답한 노릇입니다. 하지만 그런 제자들한테 오늘은 달랐습니다. 아니 오늘부터는 죽는 날까지 그렇게 살 수 있게 됩니다. 드디어 오늘에야 굳게 걸었던 빗장을 걷어치우고 문을 박차고 뛰쳐 나왔습니다. ‘죽기밖에 더 하겠나.’ 하는 그런 객기가 아니라 목숨을 내놓고서라도 이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열정과 용기가 솟아난 것입니다.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께서 부활하셨음을, 그분이 진짜 메시아였고 구세주였음을, 그래서 우리도 그분처럼 영원히 죽지 않고 살 것임을, 그분의 말씀이 곧 진리임을 아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그걸 아직도 모르고 사는 사람들에게 전할 용기와 열정이 솟았던 것입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겨났겠습니까? 그 많은 기적과 그 많은 가르침과 부활하신 예수님을 봤으면서도 생기지 않던 열정이 어디서 생겨나도록 했습니까? 성령이 임하셨기 때문입니다. 나이가 젊다고 해서 청춘이 아닙니다. 이상이 없고 열정이 사라질 때 나이는 젊지만 청춘은 시들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이 열정은 내 맘먹은 대로 생겨나는 것도 아님을 잘 압니다.

내가 성령으로 충만해질 때 꼭꼭 걸어 잠갔던 빗장 문을 열고 세상 속으로 뛰어 들어 갈 수 있습니다. 요즘 너무 무기력하게 낙담 속에서 마지못해 사신다거나 혹은 열심히 제대로 한 번 살아 보고 싶은데 도무지 용기와 열정이 생기질 않는다면 성령이 내 안에 충만히 임하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성령과 함께 뜨거운 열정으로 새로운 출발을 해야겠습니다.

 

 

 

6월 11일 삼위일체 대축일 : 요한 3,16-18.

글 윤주현 베네딕토 신부|가르멜수도회 한국관구장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18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그리스도교에서만 드러나는 독특한 신(神) 체험입니다. 하느님께서 세 분이며 동시에 한 분이시라는 신비는 무엇보다도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구원 역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계시됐으며, 우선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통해 드러났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구해내신 하느님, 그들과 더불어 계약을 맺고 당신의 백성이라 부르신 하느님, 그 하느님은 다름 아닌 성부(父)이셨습니다.

성부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를 구원하고자 메시아를 보내셨으며 그분이 바로 우리가 주님으로 고백하는 성자(聖子)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선포하신 새로운 메시지 가운데 하나는 너무도 지고하고 거룩해서 감히 입에 올릴 수조차 없던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며 받아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분은 당신 자신을 성부의 유일한 아드님으로 계시하셨습니다. 그분은 공생활을 마치고 죽음과 부활이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을 통해 인류를 향한 새로운 구원의 문을 열어젖히셨습니다. 그리고 승천하시며 성령을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이렇게 해서 성부와 성자께서는 인류 구원이라는 지상 최대의 사명을 이어받은 교회에 성령을 파견해 주셨습니다. 구원 역사에서 성령(聖靈)이 계시되는 순간입니다. 성령께서는 교회에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현존케 하심으로써 생명을 불어넣어주시고 성화하시며 인류를 향한 성부의 구원 계획을 완성으로 인도하십니다. 이렇듯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하느님은 구원 역사를 통해 점진적으로 성부, 성자, 성령으로 계시되셨습니다. 초대 교회의 여러 교부들을 비롯해 여러 보편 공의회에 참석한 교회 지도자들은 여러 이단에 맞서 한 분이면서 동시에 세 분이신 하느님을 고백하고 이를 ‘위격’, ‘본질’, ‘본체’ 같은 철학 개념들을 차용해서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핵심적인 신앙 고백을 후대의 모든 신자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장엄한 ‘신경(信經)’에 담았습니다. 그러므로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우리는 사도신경을 통해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변함없는 신앙을 고백하며 살고 있습니다.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교 신자가 된 우리들의 영혼 안에는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은총을 통해 머물기 시작하십니다. 물론 하느님은 온 우주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존재의 근원이시므로 모든 곳에 현존하십니다. 그러나 그분이 우리 영혼에 내주하시는 것은 조력(助力) 은총을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면서부터입니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분께서 건네시는 사랑의 관계에 명시적으로 응답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비로소 하느님께서 은총을 통해 우리 안에 거하기 시작하십니다. 이것을 ‘내주(內住) 은총’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이 세 분과 각각 고유한 인격적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서로 자신을 다른 위격에게 온전히 내어주고 받는 상호간 사랑과 생명의 친교에 우리 또한 참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는 우리가 죽은 후 천상에 가서 본격적으로 누리게 될 지복입니다만, 우리는 기도를 통해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우리 영혼 안에 거하시며 이미 이 세상에서부터 우리와 깊은 사랑의 친교를 나누길 원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그분께 응답하며 이승의 삶을 살아갈 때, 이미 우리는 이 현세에서부터 천국의 지복을 미리 앞당겨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 대축일을 맞아, 창조주이신 성부 하느님, 당신의 죽음과 부활로 인류 구원의 주춧돌이 되신 성자 예수님, 두 분 사이의 사랑의 고리이자 우리의 성화를 위해 선사된 두 분 사랑의 영이신 성령을 기억하며, 우리들의 삶을 통해 세 분을 더욱 더 사랑하고 그분들의 부르심에 새롭게 응답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하기로 합시다.

 

 

 

6월 18일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 요한 6,51-58.

글 김창현 베드로 신부 | 죽전성당 보좌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52 그러자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5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54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58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부제 서품식을 앞두고 있던 어느 날, 평소에 알고 지내던 한 수녀님께서 신학교로 선물을 보내주셨습니다. 작고 얇은 상자를 뜯어보니, 정성을 담아 쓰신 카드 한 장과 낯선 책 한 권이 들어 있었습니다. 떼이야르 드 샤르댕 신부님께서 쓰신 『세계 위에서 드리는 미사』라는 책이었습니다. 천천히 책장을 넘기며 읽었던 도입부는 제가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해주었습니다. 그것은 성찬례에 관한 아름다운 내용이었습니다.

“당신의 사제로서, 저는 온 땅덩이를 제단으로 삼고, 그 위에 세상의 온갖 노동과 수고를 당신께 봉헌하겠습니다. … 오 하느님, 저는 새로운 노력이 이루어 낼 소출들을 저의 이 성반에 담겠습니다. 또 오늘 하루 이 땅이 산출해 낼 열매들에서 짜낼 액즙을 이 성작에 담겠습니다. … 저희의 노동인 이 빵이 그 자체로서는 너무나 보잘것없는 부스러기일 뿐임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저희의 고통인 이 술 역시 다음 순간에 사라질 하찮은 것임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볼품없는 물질 덩어리 그 깊이에 당신께서는 거룩함을 향한 어떤 억누를 수 는 갈망을 숨겨 두셨습니다.”

아시아의 대초원에서 하느님께 올리신, 신부님의 주옥같은 이 기도에 한참을 감탄했었습니다. 매일 봉헌하는 성찬례 안에 이와 같은 엄청난 의미가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어 아쉽기도 했지만 그때라도 알게 되었다는 것에 감사하기도 했습니다. 오늘 예수님 말씀에 주목해봅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 인간의 노력으로 얻게 된 빵과 포도주를 통해 당신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실 음식으로 내어주십니다. 이 사랑의 신비를 천천히, 그리고 깊이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영원한 생명을 위한 우리 영혼의 양식입니다. 성찬례 거행을 통해 우리의 힘으로 이룬 노력과 노동이라는 빵은 주님의 몸으로 변화되고, 우리가 겪는 걱정과 고통이라는 포도주는 주님의 피로 변화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받아 모시는 성체와 성혈은 그 자체로 감히 형언할 수 없는 신비를 담고 있는, 눈에 보이는 하느님의 가장 큰 선물입니다. 남들은 알지 못하는 ‘나’라는 존재를 주님께서는 당신의 것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그러므로 나 자신과 내 안에 담겨 있는 모든 것(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심지어 부족함과 나약함까지도 봉헌해야 합니다.

선물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합당하게 맞아들이기 위해 ‘있는 그대로의 나’를 봉헌하는 것이 얼마나 거룩한 일인지요! 하느님 은총의 보물창고인 성사는 얼마나 정성을 다해 준비하느냐에 따라 더욱 풍성해집니다. 따라서 우리를 위한 주님의 수난과 죽음에 감사드리며, 우리의 구체적인 삶에 동행하시는 주님의 현존을 의식하는 것이 준비의 기도가 되면 좋겠습니다. 결국 주님을 함께 나누는 우리는 한 가족이 되어 더욱 자라날 것이며 주님을 살아갈 것입니다.

 

 

 

6월 25일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 마태 18,19-22.

글 반 유딧 수녀 | 툿찡포교베네딕도회 대구수녀원, 대구가톨릭어버이성경학교

19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20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6.25를 기억하는 오늘, 우리는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을 지내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부족한 탓일까? 너무나 긴 세월을 분단의 민족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죄는 어디에서 누구에게 용서를 구하며 머리를 숙여야 할까?

오늘의 복음말씀을 묵상하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참된 용서와 화해는 무엇을 의미하며, 어떤 것일까를 생각해 봅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21절) 베드로 사도는 용서에 ‘∼까지’라는 한계를 지으며 이성적이고 분별력 있는 용서를 추구합니다. 일곱은 완전한 숫자로서 이 이상 얼마나 더 용서가 필요한 건가? 거듭되는 잘못을 얼마나 인내하고 참아주며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반문입니다. 우리도 그러했습니다. 크게는 남북관계에서 작게는 우리 이웃, 친지, 형제.자매들과의 관계 안에서 ‘이 만큼이면 충분하지, 더 이상은 안 된다.’라고 하며 선을 긋고, 베푼 아량에 유세(?)를 부렸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22절) 하고 말씀하십니다. 용서는 ‘내가 원하는 조건을 네가 채울 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흔일곱’ 번은 그 만큼만 하면 되는 용서의 횟수가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무한한, 무조건의 용서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용서했다고 말하면서도 용서하지 못한 채 상대의 잘못이나 죄를 가슴 속에 품고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어떤 상황에 직면하면 과거의 잘못까지 끄집어내어 곱씹으며 분노에 분노를 쌓고 상처에 상처를 더 합니다. 이렇게 나는 이웃에 대하여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용서를 하지 못한 채 살아가면서도 나 자신에게는 얼마나 관대하고 너그러웠는가?

나와 이웃과의 관계는 곧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오늘 내가 용서하지 못한 내 이웃의 잘못은 오늘 용서받지 못하는 나의 죄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용서는 어떤 변명이나 해명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용서할 때, 또는 용서받고자 할 때 오히려 화해로 내민 나의 언어가 더 많은 상처와 오해를 증폭시키기 때문입니다. 조건 없는 용서와 화해는 내가 받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인 동시에 나의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는 기본 전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많은 경험에서 배웠듯이 용서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닌, 신적인 영역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마음을 모아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19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용서와 화해를 이루기 위해 얼마나 너와 나 자신, 그리고 공동체를 위하여 기도를 하였습니까?

문득 성주성당의 뜨락, 커다란 바위에 새겨진 “용서는 사랑의 시작이다.”라는 글귀가 생각납니다. 서로에게 소원(疎遠)했던 너와 내가, 일상의 분노와 상처에도 불구하고 화해를 이루기 위해 우리 자신을 내려놓고 주님 앞에 설 수 있다면 우리는 서로에 대하여 겸손해질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용서의 힘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은 인간적인 실패로 말미암아 지고 있는 우리의 짐을 극복할 수 있도록 격려하시고 위로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직무는 누군가의 잘못을 규명해 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랑의 시작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용서로 너의 죄의 올가미를 풀어주고, 내 마음의 응어리를 풀어낼 때 비로소 우리의 사랑은 시작될 것임을 믿으며, 제2독서의 말씀을 가만히 되뇌어 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 놓으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에페 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