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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이야기


글 박경현 프란치스코 | 포항 오천고등학교 교장, 진량성당

행사는 엄숙하고 절도가 있다. 미국의 국기인 성조기와 미 해병대 깃발이 높이 달린 깃대를 품듯이 잡고 있는 기수의 양 옆에 M16 소총을 든 병사가 호위하는 4명의 기수단이 잔디가 푸른 행사장 한가운데에 당당하게 버티고 있다. 그 뒤로는 한 무리의 군인들이 얼룩무늬 제복을 입고 구호에 따라 일치된 동작으로 움직인다. 주변을 에워싼 미군 부대 특유의 옅은 황토색 벽과 주황색 지붕의 건물들 위로 5월의 따가운 햇볕이 내리쬐고 있다. 피부색은 다양하지만 미 해병대 깃발 아래 애국심으로 무장된 병사들의 늠름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국내 유일의 미 해병대 기지인 무적 캠프가 포항 오천 우리학교와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미 본토에서 온 원정군과 한국 해병대 간의 연합훈련과 각종 작전에 필요한 시설 및 보급품 지원을 담당하는 역할을 한다. 1년여 부대장으로 근무한 브래들리 W. 앤더슨 중령의 이임식과 후임자인 호러스 J. 블라이 중령의 취임식이 개최되고 있다.

 

우리학교는 이 캠프와 MOU를 체결하고 몇 가지 교류 사업을 3년째 해오고 있다. 일주일에 2회, 정해진 요일의 저녁에 10여 명의 병사들이 학교에 와서 아이들과 동아리 활동을 같이하고 분기별로 정규 영어시간에도 특별 수업을 진행해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주말에 부대를 개방하여 우리학교 학생들과 주둔 군인들이 각종 스포츠 활동도 한다. 덕분에 우리 아이들이 영국, 필리핀 학교와 학생 교류활동을 하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이런 인연으로 부대 내의 큰 행사에 나도 종종 초대되는데, 오늘도 그런 날 중 하나이다. 특별한 내용이 없는 의례적인 진행에 팸플릿을 뒤적이기도 하고 떠나는 사람과 다시 그 자리를 채우는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며 지루함을 달래고 있었다. 하지만 이임하는 부대장의 다소 지루한 인사말의 끝 부분을 듣는 순간 나는 찌릿함을 느꼈다.

 

“마지막으로 인터넷으로 이 장면을 보고 있을 가족에게 한 마디 하고 싶습니다. ‘아빠, 이제 집으로 돌아간다. 잠시만 기다려!’”

 

우리나라는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적정 연령이 되면 의무적으로 입대하여 일정기간을 채워야 한다. 그리고 남북한 간의 전쟁이 발발하지 않는 한 실제 전쟁 상황을 맞이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하지만 미국은 세계의 질서를 선도한다는 명분으로 지구 곳곳의 분쟁지역에 미군을 파견하기 때문에 전쟁을 경험한 군인들도 많고 언제든지 전쟁을 수행할 각오로 스스로 선택한 군인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오늘 이임식을 하는 부대장도 평생을 군인으로 살아오면서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등에서 전쟁을 치렀다.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위험한 직업으로 살아오면서 용맹스러움이 몸에 밴 그는 오늘 이임식을 끝으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마지막 한 마디가 평생 가슴에 품었던 고백처럼 들렸다. 제일 앞자리에 앉아 있던 나는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들었다. 흔들리지 않는 자세로 일정한 간격으로 말하고 있었지만 그의 음성은 가늘게 떨렸다. 그리고 깊게 눌러쓴 모자의 창으로 가려진 그의 두 눈이 붉어져 있는 것을 나는 보았다. 세계 여러 전장을 누빈 화려한 경력으로 고급 지휘관의 자리에 올랐지만 그의 마음은 언제나 집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했던 것이다. 언젠가 집으로 돌아갈 날을 생각하며 힘든 순간들을 견디며 살아온 그에게 오늘은 참으로 감격적인 날인 것이다. 그는 잔여 임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역을 선택하여 꿈에도 그리던 집으로 돌아갔다.

 

2002년 개봉되어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 이정향 감독의 작품 ‘집으로’라는 영화는 죽기 전에 꼭 보아야 할 영화로 추천되어 있다. 흐린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다시 영화를 보면서 혼자서 눈물을 훔쳤다. 개구쟁이 7세 도시 아이 상우가 첩첩산골의 외가에 맡겨져 지내는 1년여의 시간을 그리고 있다. 말도 못하고 글도 못 읽는 77세의 꼬부랑 외할머니와 철딱서니 없는 어린 아이의 애정과 투정이 장식되지 않은 영상으로 그려진다.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산간 오지에 버려진 듯이 살게 된 상우는 게임과 롤러브레이드를 즐기고 치킨과 인스턴트 식품에 익숙하다. 그러나 재래식 화장실을 이용해야 하고 벌레들이 우글거리는 열악한 산골에서 자신의 몸을 가누는 것도 벅찬 할머니와 함께 생활하는 것은 상우에게는 결코 적응 가능한 환경이 아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철부지 상우는 자신의 욕구불만을 외할머니에게 직설적으로 드러낸다. “병신”이라고 비난하고, 외할머니의 하나뿐인 낡은 검정 고무신에 오줌을 누는가 하면 바느질을 하는 외할머니 옆에서 게임을 하며 고함을 지르거나 방바닥이 꺼져라 롤러블레이드를 타기도 한다. 산간 생활의 필수품으로 할머니가 애지중지하는 요강을 발로 차 깨트리기까지 하더니 급기야는 장난감의 배터리를 사기 위해 할머니가 잠든 틈을 이용해 머리에 꽂힌 은비녀를 훔치기도 한다. 그리고 산간 오지에서 치킨이 먹고 싶다고 하는 등 할머니의 능력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요구들을 쏟아내며 떼를 쓰는 등 미운 짓만 골라서 한다. 결코 조화가 안 될 것 같은 관계가 시간이 지나면서 소통되어 가는 과정이 마치 무성영화처럼 잔잔히 마음을 적신다. 할머니는 한마디의 질책이나 서운함도 드러내지 않은 채 철없는 외손자의 투정을 바다와 같은 마음으로 받아준다. 티끌만큼의 부정적인 감정도 없는 사람처럼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하여 사랑을 표현하지만 넘치거나 서두르지 않는다. 조건 없는 한결같은 사랑은 ‘기다림’과 ‘수용’으로 나타나고 있다. 할머니의 대응은 그 자체가 위대한 기도가 되어 철들 것 같지 않은 상우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고 그 모습은 아프도록 아름답다. 상우가 할머니의 사랑을 깨닫게 될 즈음 다가온 이별의 순간 두 사람은 아무런 대사가 없다. 상우는 흙먼지를 날리며 무심히 달리는 버스에 올라 그토록 기다리던 도시에 있는 집으로 향하면서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낀다. 그리고 상우의 뒤편 차창 밖에서 지팡이에 의지한 채 물끄러미 차가 사라지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외할머니의 얼굴에 수많은 대사들이 묻어 있다. 사랑이란 계산하지 않는 것, 받으려고 하지 않는 것, 사랑하는 사람이 상처를 주더라도 원망하지 않는 것, 꾸준히 주지만 지나치지 않는 것이라고. 그리고 이런 사랑이 존재하는 곳이 집이라는 뜨거운 메

시지를 던진다. 상우가 탄 버스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할머니는 천천히 몸을 돌려 갈지자의 비탈길을 따라 한 걸음씩 천천히 평생을 살아온 낡은 집으로 향한다.

 

고등학교 학생들의 하루 일과는 살인적이다. 아침 7시가 다가오면 아이들은 하나둘 학교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어깨가 늘어지도록 무겁게 채운 가방을 매고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정해진 일과에 몸을 맡기듯이 무표정한 얼굴로 교실로 향한다. 배움의 즐거움 같은 말은 사치스럽다. 전쟁과 같은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절규와 같은 몸짓이 애처롭다. 아직도 어제의 고단함이 고스란히 묻어 있지만 또다시 오늘의 일과가 벅차게 다가온다.

대부분의 일반계 고등학교들은 아침 8시 전후로 수업을 시작하여 7시간의 정규수업과 2시간 정도의 방과 후 수업이 진행되어 오후 6시쯤 마무리된다. 아이들이 유일하게 기다리는 식사시간의 풍경도 너무 삭막하다. 교내 식당에서 수백 명의 아이들이 도열하여 차례로 음식을 담아 먹는 모습은 고갈된 에너지를 보충하기 위한 주유소나 충전소와 같은 모양이다. 의무감에 가까운 식사가 끝나자마자 이어지는 촘촘한 일정으로 아이들의 고단한 숨소리가 웅장한 콘크리트 건물들 틈 사이로 불빛과 함께 새어 나온다. 저 높은 곳에서 한꺼번에 내려온 어둠과 적막이 학교를 에워싸고 있는 동안 책을 향한 눈빛과 최소한의 몸짓으로 정지된 듯 보이지만 아이들의 머릿속은 소리 없이 요란한 작동을 잠시도 멈추지 못한다. 각종 특별수업이며 자율학습으로 밤 10시, 11시가 되어서야 마침 벨이 울린다. 그 순간 새장을 탈출하는 새처럼 아이들은 모두 일시에 자리를 박차며 일어나 순식간에 사라진다, 각자의 집으로 향하여.

 

집을 나타내는 영어 단어인 House(하우스)는 ‘굴’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위험이나 자연환경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장소나 시설을 의미하는 것이다. 집은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고 보호와 사랑을 받으며 자라게 하는 보금자리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 8,20) 집은 단순히 육신의 휴식만을 위한 곳만이 아니라 머리를 기댈 곳이어야 한다. 아무리 완벽한 편리함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사랑과 이해보다는 불화와 다툼이, 기다림과 격려보다는 강요와 상처가, 칭찬과 지지보다는 경쟁과 비난이, 듣기와 공감보다는 훈계와 요구가 빈번하다면 그곳은 머리 둘 곳이 못 된다. 집은 공감과 지지가 필요한 곳이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몸과 마음과 영혼을 기대고 싶은 곳이어야 한다. 집은 사랑과 용서를 보고 듣고 체험하고 결심하는 장소이다. 우리 주변에 우후죽순처럼 수많은 집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육신의 휴식을 위한 모든 편리함이 갖추어졌다. 하지만 육신의 휴식보다 더 절실한 것은 영혼의 안식이다. 집의 구성원인 가족들이 머리를 기댈 곳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