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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마당
여보게, 받아들이시게!


글 강찬중 바오로 대명성당 | 수필가

 

아무런 근심이나 고통 없이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 이 물음이 참 부담스럽다. 시간이 날 때면 문득 떠오르는 생각들이다. 요즘은 7~80대의 노인부부가 살아가는 집들도 적지 아니하리라. 부부가 다 건강하면 좋겠지만 만일 한 사람이라도 중환으로 투병하고 있다면 그 몫은 나머지가 질 수밖에 없다. 며칠이 아니고 여러 달이 이어질 때 성인(聖人)이라면 몰라도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 패턴은 흔들리기 마련이 아니랴. 『불평 없이 살아보기』(윌 보웬)에 이런 말이 있다. “당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바꾸어라. 그것을 바꿀 수 없다면 당신 마음을 바꾸어라. 불평하지 마라.”(마야 안젤루) 그게 어디 쉬운 일이랴.

집사람의 투병생활은 퍽 오래다. 류머티스 관절염과 골다공증으로 수십 년간 복약을 하고 있는데 겹쳐 암 수술도 받았고 흉추의 압박골절로 시술도 받았다. 두어 달 전에는 요추의 압박골절로 시술을 받았는데 나이 탓인지 좀처럼 회복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 때부터 집 안팎의 일은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내 차지다. 처음 몇 주일은 그런대로 견뎠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왜 내가 이런 짐을 져야 하지? 뭘 잘못했을까?’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였다. 사실 밥을 하고 설거지 하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건 별로 부담을 갖지 않는다. 혼자 사는 성직자나 수도자들은 모든 걸 자기 손으로 하면서 평생 동안 살아가지 않는가? 그래도 오랜 삶 동안 가사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고 편하게 살아왔다. 그때는 행복하다는 말도 하지 않다가 이제 조금 힘드는 일을 당하니까 쓸데없는 푸념을 하는 건가? 참 염치없는 일이라는 생각도 든다. 아서 애시의 말이 떠오른다. 내 인생에서 벌어진 좋은 일에 대해서도 ‘하필이면 왜 내가?’라고 말해야 한다는데…. 지금까지는 무관심했으니 이젠 정신 좀 차리라고 시련의 선물을 주는 것일까? 아마도 잘 모르지만 여러 가지 약의 부작용도 없지 않으리라. 밤에도 여러 번 깨우면 잠결에 일어나 눈을 비비며 ‘잠 좀 자게 해달라.’고 푸념해 보지만 그건 희망사항에 불과하다.

가끔 처음 해 보는 일들이 많다. 장보기도 그 중 하나다. 가급적 가까운 동네의 구멍가게를 선호한다. 도매시장에서 떼어온 필요한 채소나 과일 등은 그날로 거의 동이나 버리니 믿음이 간다. 오늘은 무와 미역을 사러 간다. 방법을 물어서 무국과 미역국을 끓이려고 한다. 이제는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체면불구다. 가끔은 장바구니를 숨기기도 하지만 죄지은 일이 아니니 좀 당당해지고 싶다. 어느 글에서 “인간의 마음은 정원과 같다.”고 했다. 아주 조화롭게 가꿀 수도 있고, 잡초가 웃자라도록 내버려둘 수도 있다. 거기에 유익한 씨앗을 뿌리지 않았다면 쓸데없는 잡초씨앗이 무수히 떨어질 것이고, 그러면 그런 종류만 생겨 날 것이다. 어떻게 가꿀까? 그건 각자의 몫이다. 메리엄 웹스터 사전에서는 ‘불평하다.’를 ‘슬픔, 고통, 불만을 표현하다.’로 정의하고 있다. 불평을 통해 다른 이들로부터 동정이나 인정 같은 특정한 대인 반응을 이끌어 내려는 의도가 숨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모든 일은 불평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일어날 때에도 복대를 채우고 부축하지만 10여 분이라도 앉을 수 있으니 감사하고, 잘못한다고 잔소리를 늘어놓으면 듣기는 거북하지만 정신이라도 맑으니 고마운 일이고, 어느 집이건 다르랴마는 가까이 사는 막내아들은 입원기간 내내 아버지가 힘들다며 간병생활을 도맡아 하고, 일요일은 엄마의 목욕이며 청소에 몸을 아끼지 않고 일한다. 며느리는 매주 맞춤처방으로 약을 지어오고, 퇴근 후 집으로 와 지성으로 건강을 챙기고 간병해 준다. 눈물겹도록 감사한 일이다. 외국에 나가 있는 맏아들 내외는 매일 아침에 국제전화로 안부를 물어온다. 대답은 늘 한 가지다. “엄마는 좋아지고 있다.”고. 어찌 보면 지금까지 이렇게라도 버티어 온 건 아들과 며느리의 정성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일상에서 누구나 낮은 자리에서 생각해 보면 감사할 일들이 하나둘이 아니다.

우리는 잊고 지내는 일이 많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고 했다. 고통이 나를 덮쳐올 때 이 말씀을 잊고 지내며 불평을 늘어놓았을까? 고통 없이 사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을까? 불평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지 않은가?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는 ‘저항과 수용’은 삶의 원칙 가운데 하나로 구약의 코헬렛을 주석하여 이 원칙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였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코헬 3,1) 투쟁해야만 할 때가 있는가 하면, 그 상황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할 때가 있다. 삶의 모습을 비추어보자. 십자가의 중심에는 평화가 있다고 한다. 즉 긴장된 상태를 견디어낼 때, 십자가를 자신의 삶에 받아들일 때 평화로울 수 있다고 한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그 십자가를 기꺼이 받아들이자. 그리고 그 안에서 평화를 찾자. 그게 우리가 바라는 일이 아니던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삶에는 누구나 겪는 일이고 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해결의 길이 아닌가? 아파트 마당에 꽃이 활짝 피어 향내를 피운다. 꽃비를 맞으며 걷는다. 이제 그 화사한 꽃의 아름다움이 가슴을 파고들며 웃으며 이른다. 여보게, 받아들이시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