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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나누기 7단계와 주일 복음 묵상
복음 나누기 7단계와 주일 복음 묵상


박광훈 신부, 윤주현 신부, 김창현 신부, 반 유딧 수녀

 

 

매주 하는 복음 나누기 7단계

 

1 주님을 초대한다.

“기도로 이 자리에 예수님을 초대해 주십시오.”

 

2 말씀을 듣는다.

“ ― 복음 ― 장을 펴 주십시오. 어느 분이 ― 절부터 ― 절까지 읽어 주십시오.”(다 읽고 난 후 잠시 침묵한다.) “다른 분이 본문을 다시 한 번 읽어 주십시오.”

 

3 복음말씀을 마음에 새긴다.

“각자 마음에 와 닿는 단어나 짧은 구절을 선택하여 큰 소리로, 기도하듯이 세 번씩 읽어 주십시오. 읽는 사이에는 잠시 침묵을 지켜 주십시오.” “어느 분이 본문을 다시 한 번 읽어 주십시오.”

 

4 침묵 중에 주님의 말씀을 듣는다.

“3분 동안 침묵 속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을 듣도록 합시다.”

 

5 마음 안에 들려온 말씀을 나눈다.

“이제 각자 주님께로부터 들려온 말씀을 함께 나눕시다. 왜 그 말씀이 내 마음에 와 닿았는지, 그 말씀을 통해 주님이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6 모임에서 해야 할 활동에 대하여 토의한다.

“지난 번 모임에서 결정했던 사항을 어떻게 실천했는지, 그 결과와 개선해야 할 사항에 대해 이야기합시다.” “이번에는 어떤 활동을 하는 것이 좋을까요?” “우리 주위에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이웃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7 자발적으로 함께 기도한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자유롭게 기도합시다.”

 

 

8월 6일 연중 제18주일 : 마태 17,1-9.

글 박광훈 안드레아 신부 | 대구가톨릭대학교 대신학원 양성자

1 엿새 뒤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2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

3 그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4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5 베드로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었다. 그리고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6 이 소리를 들은 제자들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채 몹시 두려워하였다.

7 예수님께서 다가오시어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8 그들이 눈을 들어 보니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하고 명령하셨다.

 

요즈음 사는 것이 참 힘들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세상이 좀 변했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구조적 모순도, 경제도 변했으면 좋겠고 교육도 변해야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을 따르면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세상이 변할 것이다.’, ‘예수님은 세상을 뒤집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만들 새로운 세상에서 높은 자리 하나 차지하려고 다투기까지 했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런 제자들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습니다. 예수님 곁에 구약을 대표하는 두 사람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습니다. 모세와 엘리야 역시 세상을 바꾼 사람들이었습니다. 모세는 노예생활을 하던 사람들을 해방시킨 사람이고, 엘리야는 수소와 뱀을 섬기는 이단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살던 이스라엘 사람들을 하느님의 신앙으로 되돌려 놓은 사람입니다. 그렇게 세상을 바꾼 위대한 두 인물이 예수님께 나타나서 무엇인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정말 새 세상이 오는가 보다. 이제 시작되려는가 보다.’ 하고 제자들은 확신했습니다. 제자들의 희망대로 변화는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변화는 제자들이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무엇이었을까요? 세상이 변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변화하신 것입니다.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 예수님은 빛이 나기 시작했고, 주변에 있던 것이 그 빛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제자들은 이 세상이, 답답하고 암울한 이 세상이 변하기를 고대했습니다. 예수님이 한 번에 그렇게 만들어 주실 거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변하기는 변했는데 세상이 아니라 예수님이 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되었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우리가 들어야 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참으로 변해야 하는 것은 세상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자신이 변할 때 비로소 그 빛으로 세상이 변하는 것이지, ‘세상아! 제발 변해서 우리를 살려줘!’ 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변해야 하는 것은 세상이 아니라 우리 자신임을 예수님은 당신의 변화로 제자들에게 알려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이 세상이 변해서 우리 모두가 잘 되기를 학수고대하지만 자기 자신이 변해야만 그만큼 세상이 달라진다는 생각, 그런 각오는 좀처럼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세상을 변화시킬 생각들을 제법하지요. 또 바뀌어야 한다면서 울분을 토로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먼저 변화시킬 생각은 좀처럼 하지 않습니다.

산에서 기도하는 중에 변화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은 단 하나입니다. “진정 변해야 하는 것은 세상이 아니라 너 자신이다. 너 자신이 변하지 않으면서 세상이 변하기를 기대하지 말라. 너 자신이 변하는 만큼 세상도 변할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세상을 변화시킬 것이라고 기대했으나 예수님은 세상이 아니라 자신이 변화되어야 함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8월 13일 연중 제19주일 : 마태 14,22-33.

글 윤주현 베네딕토 신부|가르멜수도회 한국관구장

22 예수님께서는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동안에 당신께서는 군중을 돌려보내셨다.

23 군중을 돌려보내신 뒤, 예수님께서는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저녁때가 되었는데도 혼자 거기에 계셨다.

24 배는 이미 뭍에서 여러 스타디온 떨어져 있었는데, 마침 맞바람이 불어 파도에 시달리고 있었다.

25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26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 하며 두려워 소리를 질러 댔다.

27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28 그러자 베드로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29 예수님께서 “오너라.” 하시자,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갔다.

30 그러나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두려워졌다. 그래서 물에 빠져 들기 시작하자,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하고 소리를 질렀다.

31 예수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고,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32 그러고 나서 그들이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쳤다.

33 그러자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분께 엎드려 절하며,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오늘은 연중 제19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두 가지 모습이 교차되어 드러나고 있습니다. 밤이 다 되어 호수를 건너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 그리고 그 제자들을 찾아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우선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 제자들은 예수님 없이 어스름한 저녁에 호수를 건너기 시작합니다. 호수, 바다는 성경에서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지만 주로 부정적인 의미의 악한 실재, 원수 등을 가리킵니다. 더구나 그들이 건너기 시작했던 시간은 ‘밤’이라고 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들은 역풍을 만나고 말았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만의 힘으로는 단 한 치도 나아갈 수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예수님은 산에서 혼자 기도하시다가 그들 곁으로 다가가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어려움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들 곁으로 가시기 위해 물 위를 걸어오셨습니다. 그런데 물 위를 걸어온 예수님을 본 제자들의 모습은 가관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유령이다.’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왜 그랬을까? 오늘 복음 바로 앞의 대목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를 가지고 오천 명을 먹인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자신들의 배를 불려주신 예수님을 보자 그들은 알았습니다. 정말 예수님은 그들이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메시아임을. 그러나 그들이 기다려왔던 메시아는 정치적인 메시아요 세속적인 왕이지, 있는 그대로의 예수님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의 진면목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봤던 메시아는 개인적, 민족적인 욕망이 투사된 그들만의 메시아였습니다. 군중들이 예수님을 쫓아다닌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기적을 일으키는 예수님의 능력을 이용해 자신들의 배를 불리고 권력도 쟁취해서 해방을 맞이하고 명예도 거머쥐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방식은 전혀 달랐습니다. 제자들 역시 그러한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불평에 차서 호수를 건너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 한밤중에 고초를 겪고 있는 상황에서 예수님이 예수님으로 보일 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자 그들은 외쳤습니다. “유령이다.” 그들은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다, 안심하여라, 두려워하지 말라.” 여기서 ‘나다.(ego eimi)’라는 표현은 탈출기 3장에 나오는 하느님의 이름이 지닌 의미와 일치합니다. 거기서 하느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을 탈출시킬 계획을 세우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당신의 이름을 가르쳐 주십니다. ‘야훼’라는 이름은 ‘나는 있는 자 그로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 우리들의 하느님은 ‘역사의 하느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분은 우리들의 과거, 현재, 미래에 함께 동반하시면서 우리들의 삶 가운데 현존하시며 함께 인생을 걷는 가운데 섭리로 인도해주시는 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나다.”라는 표현에는 이런 깊은 의미가 배어 있습니다.

제자들이 그 어두운 밤에 위험한 호수를 건널 때, 비록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하시지 않았지만 산에 올라가셔서 그들을 위해 기도로 동반하셨습니다. 그분은 보이지 않았지만 언제나 그들의 여정에 함께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보이지 않게 자신들과 동반하시는 예수님을 향한 믿음입니다. 우리들의 인생 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은 분명 당신의 이름처럼, 인생의 바다를 건너는 우리들과 매 순간 동반하십니다. 심지어 가장 절망적인 순간마저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며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건네시며 우리가 타고 있는 배에 올라 친히 험난한 바다를 뚫고 가시며 폭풍과 바람을 잠재우십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항구에 안전하게 다다를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분의 현존을 볼 줄 아는 눈을 지녀야 하며 우리들의 배에 오르시도록 초대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 눈이 바로 ‘믿음’입니다. 오늘 복음 묵상을 마무리하며 우리 인생 여정에 함께하시는 주님을 향한 믿음의 눈을 허락하시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

 

8월 20일 연중 제20주일 : 마태 15,21-28.

글 김창현 베드로 신부 | 죽전성당 보좌

21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다.

22 그런데 그 고장에서 어떤 가나안 부인이 나와,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23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제자들이 다가와 말하였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24 그제야 예수님께서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25 그러나 그 여자는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26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8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이방인’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 ‘유다인이 선민의식에서 그들 이외의 여러 민족을 얕잡아 이르던 말’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첫 번째 의미는 일반적인 외국인을 뜻하지만 두 번째 의미는 철저히 유다인 중심적입니다. 다른 나라이기 때문이라는 지리적인 측면을 벗어나 종교와 사상 사이의 경계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래서 ‘이방인’이라는 말 안에는 이미 소외됨과 배제됨의 분위기가 짙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나 오늘날 우리 사회나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입니다. 하느님께 선택받은 민족임을 자부하는 선민의식은 자칫 영적 교만으로 번져 나갈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한편 다른 민족과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음에 목숨 걸고 자신을 끝까지 지키려는 우리의 모습도 수많은 외국인들을 더욱 이방인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세상의 흐름은 갈수록 다양함의 가치를 발견하고 드높여 나가는데, 우리는 또 다른 부류의 이방인을 만들어내며 그들을 거부하려고 합니다. 혼자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압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가나안 여인도 예수님 시대의 전형적인 이방인이었습니다. 자신의 딸을 고치려고 예수님께 달려온 여인은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매달립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여인이 이방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있느냐가 중요했습니다. 믿지 않는다면 강아지의 입장에서 배는 부르겠지만 빵으로 받아들이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에 대한 여인의 대답은 명료하다 못해 현명하기까지 합니다.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라 자부심의 문제였습니다. 여인이 예수님의 말씀을 접했을 때 느꼈을 수치심과 실망감은 자존심이 무너지는 일이었으나, 말씀에 응답하는 여인의 자세는 믿음에 관한 자부심을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작은 빵 부스러기라도 하느님을 믿는 자에게는 큰 징표가 될 수 있음을 여인은 몸소 보여주었고,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크게 칭찬하십니다. 여인의 믿음은 외적인 경계선을 무너뜨렸고, ‘다름’을 인정하는 것은 경직되어 있는 믿음의 경계선을 무너뜨렸습니다.

너와 내가 얼마나 다른지, 우리와 저들이 얼마나 다른지에 관한 생각은 지극히 인간적인 판단에 불과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 안에서 너와 내가, 그리고 우리와 저들이 얼마나 일치할 수 있는지에 더 관심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과 부활로 분리와 배제를 일치와 포용으로 바꿔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보며 생각해봅니다. 내 주변의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해와 신뢰가 모든 이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대한 믿음을 보여주는 소중한 증거임을. 그리고 다짐해봅니다. ‘다른 것’을 ‘멀리 있는 것’으로 착각하지 않기를.

 

8월 27일 연중 제21주일 : 마태 16,13-20.

글 반 유딧 수녀 | 툿찡포교베네딕도회 대구수녀원, 경산 베네딕도성경학교

13 예수님께서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다다르시자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14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15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16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18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19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20 그런 다음 제자들에게,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16,15)

인격적인 만남에는 반드시 ‘어떤 관계인가’ 하는 관계설정이 중요합니다. 너와 내가 어떤 사이인가에 따라 가족, 우정, 사랑, 종속, 평등 등의 관계가 형성될 뿐 아니라 그 사람의 사회적 신분도 증명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적인 문서에는 ‘가족관계’ 또는 ‘친우관계’를 적는 난이 있습니다. 이런 관계설정은 사회적인 인격만이 아니라 신앙인으로서의 가치와 정체성을 확립해 주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예수님은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다다르자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13절) 하고 질문을 하십니다. 그러나 정작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다른 누군가가 예수님을 어떤 분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오늘 신앙인이라 자처하는 ‘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 하고 물으시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너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가질 때만이 나의 삶을 규정짓고, 나의 모든 것을 바쳐 투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예수님과 제자들의 목적지인 예루살렘은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이 이루어지는 곳이며,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을 받아들이고 감내해야만 할 장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리고 나에게 “그러면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15절) 하고 오늘 다시 묻고 계십니다.

나는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고 있는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 구세주, 전능하신 하느님, 주님, 이런 단어는 배워서 아는 것이지 나와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 얻어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단순히 매일의 미사, 기도, 성경공부, 봉사로 충분한 신앙의 요건을 채웠다고 생각하며 열심한 신자로 자화자찬하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알기보다 나의 희로애락과 청원이 충족되면 그것으로 만족한 기복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예수님께서 누구신가를 아는 것은 곧 나의 신앙의 정체와 가치를 아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16절) 하고 고백하자 예수님께서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주셨기 때문이다.”(17절)라고 하십니다. 신앙이란 내가 배워서 알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친히 알려 주실 때 깨닫고 체득해 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참으로 나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깊이 묵상하며 이렇게 기도를 드려 봅니다.

“예수님, 저에게 당신을 알려 주십시오. 저는 예수님을 잘 알지 못하면서도 어려움에 봉착하면 당신께 무조건의 도움을 청합니다. 때때로 억울하거나 속상하거나 갈등, 불평이 생기면 당신께 투정을 하고, 하느님은 무엇을 하고 계시느냐고 화를 내기도 합니다. 그런가하면 이 수많은 사람들 한가운데서 제가 겪는 고통을 당신께서는 아시기나 하겠느냐고 당신의 권능에 도전을 합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하느님께서 살아계신 분이시라면 이 세상에 정의는 어디에 있으며, 악은 어찌 이리 범람하고 있느냐고 하늘을 향해 삿대질을 해도 당신은 변함없이 제 곁에 계셨습니다. 하느님을 떠나 먼 길을 헤매다 돌아와 섰을 때, 그 자리에서 저를 반기시는 분은 당신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누구신지 당신의 이름을 규정하라 하시면 저는 아직도 당신이 누구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또 다른 이름이 무엇인지 모른다 해

도 예수님은 가장 위험한 순간에 저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라는 확고한 신뢰 속에서 오늘을 살아갑니다.

이렇게 당신을 향한 저의 사랑이 이기적일 수밖에 없고 미진하다 해도 당신은 나의 하느님, 저는 당신의 자녀임을 믿습니다. 어느 날 제가 죽음을 겪으시는 당신을 닮아, 당신과 당신 부활의 힘을 알고 당신 고난에 동참하는 법을 알게 될 때(필리 3,10) 저에게 이렇게 말씀해 주십시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18-19절) 그러면 저는 또 다른 베드로가 되어 교회와 하늘나라를 위한 증인이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