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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나누기 7단계와 주일 복음 묵상
복음 나누기 7단계와 주일 복음 묵상


박광훈 신부, 윤주현 신부, 김창현 신부, 반 유딧 수녀

 

매주 하는 복음 나누기 7단계

 

1 주님을 초대한다.

 

“기도로 이 자리에 예수님을 초대해 주십시오.”

 

 

2 말씀을 듣는다.

 

“ ― 복음 ― 장을 펴 주십시오. 어느 분이 ― 절부터 ― 절까지 읽어 주십시오.”(다 읽고 난 후 잠시 침묵한다.) “다른 분이 본문을 다시 한 번 읽어 주십시오.”

 

 

 

3 복음말씀을 마음에 새긴다.

 

“각자 마음에 와 닿는 단어나 짧은 구절을 선택하여 큰 소리로, 기도하듯이 세 번씩 읽어 주십시오. 읽는 사이에는 잠시 침묵을 지켜 주십시오.” “어느 분이 본문을 다시 한 번 읽어 주십시오.”

 

 

 

4 침묵 중에 주님의 말씀을 듣는다.

 

“3분 동안 침묵 속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을 듣도록 합시다.”

 

 

 

5 마음 안에 들려온 말씀을 나눈다.

 

“이제 각자 주님께로부터 들려온 말씀을 함께 나눕시다. 왜 그 말씀이 내 마음에 와 닿았는지, 그 말씀을 통해 주님이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6 모임에서 해야 할 활동에 대하여 토의한다.

 

“지난 번 모임에서 결정했던 사항을 어떻게 실천했는지, 그 결과와 개선해야 할 사항에 대해 이야기합시다.” “이번에는 어떤 활동을 하는 것이 좋을까요?” “우리 주위에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이웃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7 자발적으로 함께 기도한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자유롭게 기도합시다.”

 

 

10월 1일 연중 제26주일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학자(선교의 수호자) 대축일 : 마태 18,1-5

글 박광훈 안드레아 신부 | 대구가톨릭대학교 대신학원 양성자

1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하고 물었다.

2 그러자 예수님께서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에 세우시고

3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5 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어린이처럼 아주 자신을 낮추신 분, 스스로 아주 작은 사람으로 살아가신 분이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입니다.

데레사 성녀는 1873년에 프랑스 북부지방에서 태어났습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두 언니가 먼저 입회한 가르멜수녀원에 들어가기를 원했지만 나이가 너무 어려 거부당하자, 아버지와 함께 로마로 성지순례를 가서 교황님께 수녀원 입회를 허락해주시기를 청하기도 하였습니다. 15살에 수녀원에 입회한 데레사 성녀는 24살이라는 아주 젊은 나이에 삶을 마치게 되는데, 9년 정도의 수녀원 생활 동안 대단히 소박하고 단순하며 겸손한 삶을 살아갑니다. 그녀가 행한 것은 영웅적인 덕행도 아니었고 남들이 우러러 볼만큼 특출한 영성을 가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일은 주로 수녀원 안의 일을 돕는 지극히 단순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그녀에게 ‘선교의 수호자’라는 칭호를 부여하고 교회학자의 칭호까지 덧붙입니다. 또한 그녀는 수녀원 밖의 사람을 아무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녀는 선교의 수호자가 된 것입니다. 별다른 교육을 받지 못한 그녀는 그 어떤 훌륭한 학술서적도 남기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녀는 토마스 아퀴나스, 아우구스티노 주교같은 대학자가 받을 법한 교회학자의 칭호를 받습니다. 그 이유는 지독한 단순성에 있는데, 그녀 스스로 복음적 단순성이 무엇인지를 그대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녀는 영웅적인 일을 애써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극히 단순한 일상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일상을 살아냅니다. 그녀에게는 그것뿐입니다. 그러한 삶을 사는 그녀는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들녘의 아침이슬과 같습니다. 태양이 떠오르면 사람들에게 보여지지도 않고 곧장 사라지고 맙니다. 이슬을 보는 이는 하느님뿐, 하느님께만 보여지는 아침이슬처럼 되고 싶습니다. 저는 끝까지 작은 자이고 싶습니다.”

매일 가정과 직장을 오고가는 우리와 같은 평범한 신앙인들이 데레사 성녀처럼 될 수 있는 길은 없을까요? 오늘 우리가 축일을 지내는 데레사 성녀는 우리에게 그 길을 보여주십니다. 그 길은 다름 아닌 작은 길입니다. 성녀께서는 어떤 특별한 업적을 남긴 것이 없습니다. 단지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사소한 일상생활을 통해서 성인이 되신 분이십니다. 선의를 가진 사람이라면 은총의 도움으로 이런 정도의 일이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가를 묻지 않으시고, 단지 내가 행하는 작은 행동 하나라도 그 일을 사랑으로 했는지를 보십니다. 매일 만나는 가족, 직장 동료, 나아가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으로 정성껏 대해 보지 않으렵니까? 작은 미소, 칭찬 한 마디, 가벼운 목례 한 번에 여러분의 사랑을 실어 보내지 않으렵니까? 이 작은 행동 하나하나를 통해 우리도 성인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신 분이 바로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이십니다.

복음적 단순성, 그리고 그로부터 나오는 겸손, 이것이 교회가 그녀를 성녀로 받드는 이유입니다. 수도원에서 9년 동안 밥하고 청소하고 빨래한 것이 전부인 24살의 수녀. 일상에서 무한한 기쁨을 느끼고 작은 희생 하나하나를 남을 위해 봉헌했던 작디작은 수녀. 현대인들이 잊고 있던 그런 모습을 그 작은 수녀가 몸소 보여주었기에 교회는 그녀에게 이런 특별한 위치를 마련해 준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일상, 그곳이 바로 우리가 성화될 수 있는 장소입니다.

 

 

 

10월 8일 연중 제27주일 : 마태 21,33-43.

글 윤주현 베네딕토 신부|가르멜수도회 한국관구장

33 “다른 비유를 들어 보아라. 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

34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그는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 오라고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냈다.

35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들을 붙잡아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였다.

36 주인이 다시 처음보다 더 많은 종을 보냈지만, 소작인들은 그들에게도 같은 짓을 하였다.

37 주인은 마침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38 그러나 소작인들은 아들을 보자,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39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

40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

느냐?”

41 “그렇게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없애 버리고,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 하고 그들이 대답하자,

4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오늘은 연중 제27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마태 21,33-43까지의 말씀으로, 예수님은 상당히 의미심장한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우선 여기서 우리가 염두에 둬야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누구에게 말씀하고 계신가 하는 점입니다. 오늘 복음이 담겨 있는 마태 21장을 보면, 예수님은 무교절 축제를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 다양한 말씀을 전하고 계십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은 그분이 선포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믿지도 않고, 율법을 빌미로 사람들에게 큰 짐을 지우며 기존의 종교 질서를

좌지우지하던 당시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향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에 시비를 걸며 끊임없이 예수님의 앞길을 막아 세웠던 당사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체계화한 율법 속에 갇혀 사람들을 판단하고 옥죄었으며, 결국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고 다양한 기적을 통해 소외되고 병든 이들을 위로하시던 예수님께 끊임없이 시비를 걸었던 사람들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런 그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따끔한 질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포도밭 비유에서도 드러나듯이 구원 역사를 보면 하느님을 가로막아 세웠던 사람들은 그 시대만 있었던 게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을 잊고 배반의 길로 접어들 때, 하느님은 끊임없이 그들의 회심을 바라며 시대마다 여러 예언자들을 보내 그들을 야단치며 당신께 돌아오도록 독려하셨습니다. 또한 하느님의 진정한 뜻은 찾지 않은 채 외적인 제사에만 몰두하던 종교 지도자들, 당신을 잊은 채 국가의 세속적인 발전만을 추구하던 정치 지도자들에 맞서 하느님은 당신의 뜻을 전할 예언자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이스라엘의 정치와 종교를 좌지우지하던 지도자들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았을 뿐더러 그들을 붙잡아 가두기도 하고 심지어 무참히 죽이는 만행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의 비유에 나온, 포도원을 관리하던 소작인들은 이스라엘의 기득권 세력을 대표하는 정치·종교 지도자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대부분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들을 그렇게 홀대하고 죽였습니다. 그것은 곧 그들을 보내신 하느님을 그렇게 대한 것과 진배없었습니다. 이제 역사의 정점에서 하느님은 마지막으로 당신 아드님을 보내어 그들의 최종적인 회심과 구원을 이루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포도원의 비유에서처럼 이스라엘의 기득권층은 이때다 싶어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을 붙잡아 무참히 고문하고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는 그런 그들의 사악함을 훨씬 뛰어넘었습니다. 그들의 사악함에 직면해서 하느님은 그들을 벌하고 멸하는 대신, 당신 아드님을 통해 그들에게 새로운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 주셨습니다. 물론 비유에 나온 마지막은 포도원 주인이 와서 소작인들을 붙잡아 죽이고 제때에 소출을 내는 소작인들에게 그 포도밭을 준다고 하며 끝맺습니다. 새로운 소작인은 다름 아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를 믿고 따르는 새로운 하느님 백성, 곧 그리스도교 신자들로 구성된 교회 공동체를 일컫습니다. 하느님은 유다인들의 거부 앞에서 그들을 붙잡아 죽이는 대신, 그들을 대신할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세우시고 이 교회를 통해 이스라엘을 포함해서 모든 인류의 구원이라고 하는 원대한 그림을 그리셨습니다. 하느님은 악에서도 선을 끌어내시고 이를 바탕으로 모든 이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전능한 분이십니다. 그분의 전능은 우리를 향한 사랑과 자비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새로운 백성으로 거듭난 우리 또한 그분의 마음을 닮아 자비로운 자가 되어야겠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포도밭을 잘 일구어 제때에 소출을 내어드리는 그분의 충실한 일꾼이 되어야겠습니다.

 

 

 

10월 15일 연중 제28주일 : 마태 22,1-14 또는 22,1-10.

글 김창현 베드로 신부 | 죽전성당 보좌

1 예수님께서는 또 여러 가지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 “하늘 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3 그는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

4 그래서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렇게 일렀다. ‘초대받은 이들에게,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어서 혼인 잔치에 오시오.′ 하고 말하여라.’

5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

6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

7 임금은 진노하였다. 그래서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없애고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 버렸다.

8 그러고 나서 종들에게 말하였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9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 오너라.’

10 그래서 그 종들은 거리에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다.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

11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려고 들어왔다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를 보고,

12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 하고 물으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13 그러자 임금이 하인들에게 말하였다. ‘이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14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지난 7월 중순, 3대리구 2지역 연합으로 청년여름신앙학교를 준비하면서 참 많은 고민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과연 청년들에게 어떤 주제를 가지고 어떤 메시지를 전달해야 할지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러다 이르게 된 결론이 ‘미사’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본당이나 교구 차원의 많은 행사들은 분명 그들을 위한 잔치이지만 청년들이 진정 뿌리를 내리고 자라야 할 곳은 ‘미사’라는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땅 위에 성체의 삶을 열매 맺는 ‘말씀’이라는 씨앗이 특히 중요했습니다. 늘 봉헌하는 미사의 소중함을 지나치지 말자는 권고와 다짐의 자리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푸는 임금의 이야기를 들어 하늘나라를 설명하십니다. 이 비유는 성경 전반에 걸쳐 하느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고 또 사랑하고 계시는지를 보여주는 구원의 역사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혼인잔치는 우리 각자의 구원의 날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혼인잔치는 우리가 봉헌하는 미사와도 너무나 닮아 있습니다. 미사는 하느님께 올리는 제사의 성격을 갖지만 동시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심을 감사드리고 기억하며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만남을 희망하는 잔치이기도 합니다.

임금은 종들을 보내어 사람들을 부르지만 미리 초대받은 사람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습니다. 심지어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때리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금은 준비된 혼인잔치에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대로 불러오게 하지요. 아들을 향한 사랑으로 임금은 많은 사람들을 초대해 아들을 축하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를 미사에 초대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우리가 미사에 참례하지만 실제로 미사를 봉헌하는 주체는 하느님의 아드님,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이 중심이 되고, 예수님을 통해 기쁨과 활기를 얻게 되는 미사에 우리가 찾아오기를 바라십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혼인예복입니다. 그 예복이란 초대받은 이들 각자에게 꼭 맞는 옷일 것입니다. 초대받은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과 생각, 각자가 처해 있는 환경, 살아온 날들이 모두 예복을 만드는 소중한 재료들입니다. 미사를 봉헌하기 위해 예복을 입는다는 것은 결국 우리 삶을 말씀에 비춰본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많은 것을 하려 들기보다 한 주간의 삶을 봉헌하고 말씀에 귀 기울이려는 마음만은 챙기면 좋겠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예수님의 잔치에 참석하면서 말씀을 미리 알고 간다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면 잔치의 주인공이신 예수님께로 좀 더 집중할 수 있을 것이고, 예수님의 거룩한 몸을 받아 모시면서 성체의 삶, 나눔의 삶에 대한 울림도 더 깊게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때로는 하느님 말씀이 나에게 와 닿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준비와 마음가짐은 우리의 발걸음을 가볍게 하고 새롭게 내디딜 힘을 줍니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선택은 말씀에 대한 우리의 준비와 응답에 달려 있지 않을까요?

 

 

 

10월 22일 연중 제29주일 : 마태 28,16-20.

글 반 유딧 수녀 | 툿찡포교베네딕도회 대구수녀원, 경산 베네딕도성경학교

16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17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18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20)

어느 날 아침, 한 수녀님께서 “수녀님 오늘따라 굉장히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하며 인사를 건넸습니다. “어젯밤 꿈에 예수님을 만났거든요.”하고 경쾌하게 대답을 하자 “예수님인 줄 어떻게 아셨어요?”하고 수녀님이 되물었습니다. ‘그러네, 예수님인 줄 어떻게 알았지?’ 잠시 혼돈에 빠져 감실 속의 예수님을 찾아가 여쭈었습니다. ‘제가 어떻게 예수님인 줄 알았지요?’ 얼마를 지났을까? ‘우리가 만나는 그 순간, 즉시 알아볼 수 없다면 그는 예수가 아니겠지?’ 그렇습니다. ‘안다’는 것은 설명과 자기소개를 필요로 하는 이론적 지식이 아니라 체험적인 지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안다’고 해도 그것은 온전한 ‘앎’이 아닙니다. 우리는 불완전한 존재인지라 ‘믿음과 의심’이라는 양면 안에서 그분을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며 그분의 말씀과 기적을 보았고 수난과 죽음을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면서도 “더러는 의심하는 제자들이 있었던 것”(17ㄴ절)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두 마음을 지닌다 해도 부활하신 주님은 먼저 “다가”오시는 분,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지닌 하느님”으로서 믿음의 확신을 부여하시는 분이십니다.(18절) 그리고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먼저 약속해 주십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20절) 이 얼마나 놀라운 초대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나의 ‘앎’은 나의 믿음에서가 아니라 그분께서 열어놓으신 자비에서 비롯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조건 없는 초대이며 사랑이고 구원의 보증입니다.

때때로 내가 얻은 것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그래서 모든 것을 내어주시고 보여주시는 주님 앞에 의혹과 불신밖에는 드릴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19-20ㄴ절) 이 명령은 사랑의 의무이자 우리의 권리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조건 없이 베푸시는 구원의 초대를 위한 전령으로의 부르심이며 동시에 가난한 사람들에게 구원을 전하라는 직무부여입니다. 이런 주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에 대한 유일한 갚음은 우리의 응답일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도 우리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때가 되면 오겠지요.”, “종교만큼은 자신들이 선택하도록 하는 게 사랑이 아닌가요?”, “가톨릭 신자들은 신앙을 강요하지 않아서 좋대요.”, “꼭 그렇게까지 하면서 성당에 오라고 강권해야 하나요?”

전교 주일을 지내면서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다시 새겨 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로마 10,15) 제1독서의 말씀을 따라 우리 가족과 이웃, 그리고 우리 공동체가 다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 만나는 ‘앎’의 길을 따라 갈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 이는 시온에서 가르침이 나오고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말씀이 나오기 때문이다.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이사 2,3.5)

 

 

 

10월 29일 연중 제30주일 : 마태 22,34-40.

글 박광훈 안드레아 신부 | 대구가톨릭대학교 대신학원 양성자

34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의 말문을 막아 버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바리사이들이 한데 모였다.

35 그들 가운데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다.

36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37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8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39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40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라고 하십니다. 하느님 사랑, 이웃사랑은 사랑의 이중계명으로 정말 많이 듣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놓치기 쉬운 부분이 있는데 이 두 가지 계명에 한 가지 계명이 더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자세히 보시면 찾아낼 수 있습니다. 뭐겠습니까? 힌트를 드리면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설명하는 부분에 숨어있습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 풀어볼까요? 네가 너 자신을 사랑하듯이 너의 이웃을 사랑하라. “스스로를 사랑하라는 요구”가 숨어있습니다. 말장난 같지요? 절대 아닙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남도 사랑하지 못합니다. 내가 내 삶을 사랑하지 않고 스스로를 증오하고 포기해버리는데 남에 대한 사랑이 가능할까요? 불가능합니다. 나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그래서 사랑받을 가치도 없고 사랑할 능력도 없다고 스스로를 포기해버린 사람이 남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좋은 면보다 나쁜 면들이 더 잘 발견됩니다. 계획한 일은 우리의 나태함 때문에 잘 되지 않고, 주변상황도 언제나 걱정이 끊이지 않습니다. 과거에 대한 후회도 미래에 대한 불안도 떠나지 않습니다. 내가 가는 길이 옳은 길인지, 옳은 길이라 하더라도 잘 가고 있는지 언제나 불안합니다. 또 피곤합니다. 포기하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삶의 여유도 없어지고 괜히 작은 일에도 예민해집니다. 하루하루 사는 것에 허덕이다 보니 하느님 사랑, 이웃사랑이라는 계명도 그냥 성당에 가면 듣게 되는 그저 그런 말들일 뿐, ‘그래서 나보고 더 이상 어쩌란 말이냐?’는 식이 되기 쉽습니다. 사막 같이 메마른 일상에서 하루하루 겨우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나는데 ‘하느님 사랑, 이웃사랑,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 죄 안 짓고 살면 됐지. 나보고 더 이상 뭘 하란 말이냐?’는 식이 되고 맙니다. 보십시오.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하느님 사랑, 이웃사랑”이라고 말해 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그럼 “이런 상황에서 어쩌란 말이냐? 나보고 더 이상 뭘 하라는 말이냐?”라고 묻는다면 “자신부터 사랑하십시오.”라고 대답해드리고 싶습니다. 스스로를 잘 이해할 줄 알고, 스스로를 용서할 줄 알고, 스스로를 잘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먼저 자신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시선으로 우리 자신을 봅시다.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를 용서하고 또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함께하시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감당해낼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한 마디로 우리는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사랑의 이중계명은 바로 여기서 시작합니다.

하느님이 주신 사랑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내 안에 있는 이 사랑을 하느님께 되돌려드리고 이웃에게 전해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막 같이 메마른 세상을 살아가면서 흙먼지에 뒤덮일지라도, 희망이 보이지 않아 좌절하고 싶을지라도 여러분이 정말 소중한 존재라는 것, 사랑받고 사랑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잊지 마시고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딱딱한 계명이 아니라, 여러분이 하느님도 사랑할 수 있고, 이웃도 사랑할 수 있는 귀한 존재라는 기쁜 소식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