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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이야기
소명


글 박경현 프란치스코 | 포항 오천고등학교 교장, 진량성당

 

‘직업’을 뜻하는 영어단어 ‘vocation’은 ‘소명’ 혹은 ‘사명’을 의미한다. 직업은 단순히 생계를 위한 수단만이 아니라 하느님이 나에게 부여한 사명을 세상에 드러내도록 실천하는 현장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직업뿐만 아니라 우리가 세상에 존재하는 매순간도 같은 의미를 지닌다. 자식으로, 형제로, 신앙인으로, 교사로, 남편으로, 아버지로 살아가는 것도 그 역할을 통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내야 할 소명이 있기 때문이다. 교장실의 내 책상 뒤 게시판에 붙여둔 글귀가 있다. 우리 법인에서 교사, 교감, 교장으로 임용될 때 성경에 손을 얹고 교구장님께 서약하는 선서문이다. 직접 선서를 하고, 매년 임용식이 있을 때마다 곁에서 듣던 글귀이지만 하나의 통과 의례로 무심했는데, 지난 8월 임용식에서 선서문의 내용이 마음에 확 와 닿았다. 뒤늦게 찬찬히 다시 들여다보고는 부끄럽고 두려웠다. 그래서 남은 임기 동안이라도 내가 서약한 내용을 조금이나마 실현하기 위해 눈에 잘 띄는 곳에 붙여두었다.

“저는 교장직을 맡으면서 말과 행동에 있어서 언제나 가톨릭교회와 일치할 것을 서약합니다. 저는 교회법 규정에 따라 맡겨진 봉사를 다하기 위하여 부름을 받았으므로 가톨릭교회와 공통된 규율을 따르고 교회법을 준수하며 교회가 저에게 부여한 의무에 따라 교장직을 충실히 수행할 것을 다짐합니다. 이 직무를 성실히 수행할 수 있도록 제가 손을 얹은 이 거룩한 성경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저를 도와주시기를 청합니다.”

어느 수학자의 말처럼 나도 증명 가능한 것을 믿고, 실천 가능한 것만을 약속하고, 옳다고 인정된 행동을 하면서 살아가야 한다고 다짐하곤 했다. 가톨릭에서 운영하는 학교에서 근무한 지 33년, 그동안 나에게 주어진 길에 대한 엄중함을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너무도 긴 시간을 보낸 것이다. 안정된 직장의 기회가 주어진 것에 취해 있었고, 모교에서 근무하면서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어느 날 갑자기 관리자가 되었을 때에도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듯 그냥 그렇게 살아오다 경력만 높아져 버린 것이다. 다행히 내가 교사로 살아온 대부분의 시간 동안 교육은 단순했다. 지식을 전달하고 반복학습으로 문제의 풀이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대학입시에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유능한 교사로 인정받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교육의 현장에서도 큰 변화의 파도가 몰려오고 있다. 지식을 저장하고 재생하는 능력뿐만 아니라 지식을 재구성하는 능력까지도 인공지능을 장착한 컴퓨터가 대신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어쩌면 이제 우리는 ‘유능한 인간’으로서의 가치보다 새로운 시각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입증해야 하는 교육의 변화에 직면해 있다. 이런 변화의 시대에 가톨릭 신자로서, 그리고 가톨릭교회가 운영하는 학교의 관리자로서 교회의 기대와 일치하는 나에게 주어진 소명은 무엇인가? 이런 의문에 대한 대답은 이미 2,000년 전 예수님께서 너무도 명료하게 제시해 놓으셨다는 것은 어쩌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사랑〉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 하더라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1코린 13,2)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7) 예수님께서는 사랑이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하는 위대한 가치가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루카 10,27)는 말씀은 세상에 사랑을 드러내라는 엄중한 명령인 것이다. 교육에 관한 온갖 이론들이 넘쳐나고 있지만 사랑이 바탕이 되지 않는다면 요란한 소음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버림받고 소외받은 학생을 예수님을 영접하듯이’ 교사는 제자들 한 명 한 명에게 ‘네가 나에게 참으로 소중한 존재’라는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즈음 학생들이 인권에 대하여 말도 많고 탈도 많지만 결국은 ‘사랑받고 싶다.’는 절규이다. 어떤 선생님에게는 심하다 싶을 만큼 벌을 받아도 기분 좋게 수긍하고 어떤 선생님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일을 트집 잡아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이유는 자신이 그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의 크기가 가늠자가 되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사랑의 대상이라는 마음으로 작은 변화의 모습도 발견해 주고 정확하고 구체적인 칭찬과 충고가 있을 때 사랑받고 있다고 느낀다. 내 앞에 있는 아이들에게 진심어린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면 그 사랑은 언젠가 세상으로 번져갈 것이다.

〈모범을 통한 감화〉 “여러분에게 맡겨진 이들을 위에서 지배하려고 하지 말고, 양 떼의 모범이 되십시오.”(1베드 5,3)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우리는 교훈적인 말들이 아이들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잘못된 신념을 가지고 있다. 원하지 않는 충고는 오히려 반감을 키울 뿐 교육적 가치가 없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아이들은 가르치는 대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본 대로 배우기 때문이다. ‘흥미는 몰입하게 하고 감동은 변화하게 한다.’는 말처럼 행동의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감동’이다.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어 주시고 ‘너희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교육자들의 소명을 가장 명료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결혼을 기피하고, 출산율이 떨어지고 세계에서 최고 수준의 생활을 누리면서도 우리나라의 행복지수가 낮은 것은 우리 기성세대들의 책임이다. 행복하고 감사하는 삶의 방식을 우리 아이들에게 보여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과 경쟁에서 이겨야 행복하다는 오랜 경쟁교육의 부작용이기도 하다. 부부가 서로 화목하지 못하면서 자녀에게 “너희들은 혼인하여 행복하게 살아라.”고 말하는 것은 공염불에 불과하다. 자식을 키우면서 행복해하고 감사하기는 커녕 마치 피임에 실패하여 원하지 않는 일이 일어난 것처럼 “너 때문에 힘들다.”고 짜증내면서 자식들의 행복한 삶을 기대할 수 있을까! “내 자식으로 태어나 주어서 너무나 고맙다.”, “너를 잉태하기 위해 100일 기도를 드렸단다.”라는 말만큼 자녀들의 자존감을 높여줄 말은 없을 것이다. “너희들을 만난 것은 행운이다.”, “내가 교사가 된 것은 축복이다.”라는 마음으로 선생님들이 매순간 즐겁게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행복교육이다. 평범하지만 행복한 삶은 하느님의 사랑을 세상에 드러내는 위대한 소명의 실현이다.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하고 말하여라.’”(루카 17, 10)라는 말씀처럼 때로는 겸손하게,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마태 5, 37) 하신 말씀처럼 때로는 용기와 단호함도 드러내야 할 덕목이다.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각자의 능력이 있다. 이것은 살아가는 동안 이 세상에서 해야 할 각자의 고유한 소명이 있다는 뜻이다. 러셀 로버츠의 말처럼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드는 최고의 방법은 최고의 엄마, 최고의 남편, 최고의 이웃이 되는 것이다. 세상에 널리 퍼진 사랑은 역사적으로 그리 중요하지 않은 작은 사랑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성인들의 몫만이 아니다. 보잘 것 없는 우리들의 겨자씨보다 작은 믿음과 사랑이 주변의 사람을 바꾸고 결국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거룩한 소명이라 하더라도 강요하기 보다는 스스로 결심할 수 있도록 인내와 사랑으로 기다리고 기도해야 하는 것도 부모와 교사가 지금부터 실천해야 할 위대한 소명이다. 이 소명을 성실히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도와주시기를 청합니다. 아멘.

지난 2년 동안 귀한 지면을 허락해 주신 월간 〈빛〉에 감사드립니다. ‘학교이야기’를 통하여 2013년 우리 교구에서 인수한 오천고등학교를 알리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욕심에서 시작했지만, 게으르고 부족함으로 인하여 저의 넋두리에 불과한 잡담이나 늘어놓은 듯하여 부끄럽고 송구합니다. 그동안 사랑의 마음으로 글을 읽어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저의 장황했던 이야기를 끝맺을까 합니다. 감사합니다.

 

* 학교이야기는 이번 호로 끝맺습니다. 그동안 연재해주신 박경현 선생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