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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나누기 7단계와 주일 복음 묵상
복음 나누기 7단계와 주일 복음 묵상


박광훈 신부, 윤주현 신부, 김창현 신부, 반 유딧 수녀

 

매주 하는 복음 나누기 7단계

 

1 주님을 초대한다.

“기도로 이 자리에 예수님을 초대해 주십시오.”

 

2 말씀을 듣는다.

“ ― 복음 ― 장을 펴 주십시오. 어느 분이 ― 절부터 ― 절까지 읽어 주십시오.”(다 읽고 난 후 잠시 침묵한다.) “다른 분이 본문을 다시 한 번 읽어 주십시오.”

 

3 복음말씀을 마음에 새긴다.

“각자 마음에 와 닿는 단어나 짧은 구절을 선택하여 큰 소리로, 기도하듯이 세 번씩 읽어 주십시오. 읽는 사이에는 잠시 침묵을 지켜 주십시오.” “어느 분이 본문을 다시 한 번 읽어 주십시오.”

 

4 침묵 중에 주님의 말씀을 듣는다.

“3분 동안 침묵 속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을 듣도록 합시다.”

 

5 마음 안에 들려온 말씀을 나눈다.

“이제 각자 주님께로부터 들려온 말씀을 함께 나눕시다. 왜 그 말씀이 내 마음에 와 닿았는지, 그 말씀을 통해 주님이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6 모임에서 해야 할 활동에 대하여 토의한다.

“지난 번 모임에서 결정했던 사항을 어떻게 실천했는지, 그 결과와 개선해야 할 사항에 대해 이야기합시다.” “이번에는 어떤 활동을 하는 것이 좋을까요?” “우리 주위에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이웃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7 자발적으로 함께 기도한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자유롭게 기도합시다.”

 

12월 3일 대림 제1주일 : 마르 13,33-37.

글 박광훈 안드레아 신부 | 대구가톨릭대학교 대신학원 양성자

33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그때가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34 그것은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의 경우와 같다. 그는 집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자에게 할 일을 맡기고, 문지기에게는 깨어 있으라고 분부한다.

35 그러니 깨어 있어라. 집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저녁일지, 한밤중일지, 닭이 울 때일지, 새벽일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36 주인이 갑자기 돌아와 너희가 잠자는 것을 보는 일이 없게 하여라.

37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깨어 있어라.”

 

전례력으로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는 대림 첫 주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성탄을 준비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시길 기다립니다. 오늘 복음은 이 기다림의 시기에 우리가 어떤 자세로 기다려야 하는지를 말해줍니다. 그것은 깨어 있으라는 것, 기다리되 깨어 기다리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우리에게 여러 차례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열 처녀의 비유에서도, 겟세마니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도 그러하셨습니다. 오늘도 문지기의 예를 들면서 깨어 있어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아마도 온갖 달콤한 잠의 유혹이 우리를 사로잡고 있고, 힘든 세상살이가 우리의 눈을 감게 만들기 때문일 것입니다. 깨어 있고 싶어도 수많은 잠의 유혹이 우리를 공격하고 있지요. 돈의 잠, 권력의 잠, 명예의 잠, 쾌락의 잠, 텔레비전의 잠, 걱정과 불안의 잠, 욕심의 잠, 안일함과 방심의 잠 등 이런 수많은 잠들이 우리의 깨어 있음을 자꾸 방해합니다.

김유신 장군이 긴장을 풀고 말 위에서 잠든 사이, 한 나라 장수의 말은 기생집으로 향했다고 합니다. 미국의 호화 유람선 타이타닉 호의 침몰은 배 앞에 다가온 빙산을 안일함과 방심하는 자세로 보았던 선원들 탓이었습니다. 우리가 겪은 많은 어려움들과 문제들은 우리가 깨어 있지 못한 탓에서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깨어 있는 사람은 자기가 지금 무엇을, 어떻게, 왜 해야 하는지를 알면서 살아갑니다. 반대로 잠들어 있는 사람은 자신의 습관대로, 편한 대로 살아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잠들어 있는 사람에게서는 변화와 도전, 준비를 찾아보기 힘듭니다. 대림시기 기다림의 목표는 축제입니다. 사람 됨의 축제, 하느님과 인간의 하나 됨의 축제입니다. 이러한 축제는 깨어 있는 자세를 통해서 올바로 준비되고 또 살아있는 축제가 될 것입니다. 세상 잠의 유혹에서 벗어나 깨어서 기다리는 것, 이것은 기다림 끝에 있을 주님과 만남의 축제를 더욱 아름답게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경험에 의하면, 이런 삶의 방식이 우리에게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늘 깨어 있다는 것은 어떤 고정된 틀에 사로잡히지 않고, 매 순간 자신이 처한 상황을 있는 그대로 읽어내고, 주님의 뜻에 따라 선택하며, 그것을 실행에 옮길 것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약한 인간은 곧잘 스스로 만들어 놓은 틀 속에 갇혀 버립니다. 매 순간 식별하고 선택하는 것이 상당한 에너지를 소비하는 데다, 힘들고 귀찮기 때문에 과거의 체험에 바탕을 두고 규칙이나 규범의 틀을 만들어 놓고는 그 속에 안주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고는 안주하고 싶은 유혹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틀 속의 게임 규칙만 제대로 지키면 자기가 할 도리를 다했다는 안도감을 느끼며 때로는 규범을 잘 지켜내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 우월감을 느낄 뿐만 아니라 그들을 비판하고 무시하기조차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토록 꾸짖고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 싸우셨던 것이 바로 이것 때문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하나의 사실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한다는 사실입니다. 흐르는 물이 썩지 않는 것은 받아들인 것을 그때그때 흘려보내고 다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생명력을 갖는 것입니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이렇게 끊임없이 변화해야 하는데, 살아있는 생명체는 고정된 틀 안에서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의 고정된 습관과 행동, 가치관에 묶인 채로는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없고 더 이상 발전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자세가 바로 설 때 사랑하는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깨어 있는 복된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대림을 시작하는 우리의 자세입니다.

 

 

12월 10일 대림 제2주일 : 마르 1,1-8.

글 윤주현 베네딕토 신부|가르멜수도회 한국관구장

1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

2 이사야 예언자의 글에 “보라, 내가 네 앞에 내 사자를 보내니 그가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3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기록된 대로,

4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5 그리하여 온 유다 지방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모두 그에게 나아가,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6 요한은 낙타 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둘렀으며,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다.

7 그리고 이렇게 선포하였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오늘은 대림 제2주일입니다. 무엇보다도 대림은 기다림의 시기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가슴 조이며 기다리고 있고 또 만남을 준비한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답고 설레는 일입니다. 우리 모두는 설레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누군가를 기다려 본 기억들이 있습니다. 인생은 그 자체가 이런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어른이 되기를 기다리고, 학생들은 졸업을 해서 좋은 직장 얻기를 기다립니다. 그리고 선남선녀들은 좋은 배필을 만나 결혼해서 아들, 딸 낳고 오순도순 살기를 기다립니다. 남편을 직장에 보낸 아내는 맛있는 저녁식사를 준비해서 해가 뉘엿뉘엿 지는 것을 바라보며 남편이 오기를 애타게 기다립니다. 우리의 마음이 있는 곳, 우리가 사랑하고 바라는 그 대상을 향해 우리는 일생을 끊임없이 기다리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인간이야말로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존재, 끊임없이 갈구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 그 무엇도 또 그 누구도 우리의 기다림을 완전히 채워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다림의 마음을 궁극적으로 채워줄 누군가 절대적인 대상을 그리며 살아갑니다. 우리가 일생동안 기다려 온 것, 기나긴 기다림, 그 기다림의 대상들을 한 곳에 묶어보면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가리키는 하나의 이름이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이야말로 우리가 오랜 세월 동안 애타게 기다려 온 바로 그분입니다. 이제 우리는 대림 시기를 통해서 모든 우리 기다림의 실체가 바로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깨닫는 가운데, 우리 인생 최대의 손님이신 그분을 맞이하기 위해 정성껏 준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이렇듯 대림절은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시기입니다. 하지만 내용적으로 보면 이 시기는 주님께서 우리를 기다리시는 때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신께서 우리 안에 참으로 태어나실 수 있도록, 그리고 자라나실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정화하고 회개하는 시간, 그것이 바로 대림절입니다. 그래서 대림절은 결국 주님께서 우리의 회개를 기다리는 시간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인 마르코 1,1-8절은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앞서 그분의 길을 준비했던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요한은 그분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광야에 나가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며 회개하도록 촉구했습니다. 회개는 우리들의 신앙 여정에서 늘 요청되는 것이지만, 특별히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이 시기에는 그 어느 때보다 더 절실히 요청되는 숙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분께서 우리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실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 안에 그분을 맞이할 구유가 준비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우리는 마음 안에 우리의 광야를 마련해야겠습니다. 예로부터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광야’는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탈출해 가나안 복지로 나아가기 위해 거쳐야 했던 시련의 장소이자 그 과정에서 하느님의 사랑과 섭리를 체험함으로써 그분의 민족으로 거듭났던 그분과의 ‘첫 사랑’을 경험한 소중한 장소입니다. 우리의 여정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또한 그분과의 첫 사랑을 기억하며 우리의 광야로 나아가 그분을 새롭게 맞이해야 하겠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복음에 소개된 세례자 요한의 모습은 우리에게 그 길을 보여주는 좋은 안내자입니다. 그는 곧 오실 메시아, 즉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며 많은 사람들을 회개로 인도했지만 결코 그분의 자리를 차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선구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했고 그분이 오시자 주인공의 자리를 내어드렸습니다. 나아가 그는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고 겸손되이 말했던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대림시기를 보내며 세례자 요한의 모범을 따라 그분이 우리 안에서 커지실 수 있도록 우리 또한 점점 작아져야 하겠습니다. 그럼으로써 그분이 우리 존재의 주인이 되시어 우리 마음의 왕국을 다스리시는 가운데 하느님의 나라가 임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12월 17일 대림 제3주일 : 요한 1,6-8.19-28.

글 김창현 베드로 신부 | 죽전성당 보좌

6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7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8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19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다.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을 때,

20 요한은 서슴지 않고 고백하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하고 고백한 것이다.

21 그들이 “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 하고 묻자, 요한은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그 예언자요?” 하고 물어도 다시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2 그래서 그들이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우리가 대답을 해야 하오.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오?”

23 요한이 말하였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24 그들은 바리사이들이 보낸 사람들이었다.

25 이들이 요한에게 물었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

26 그러자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27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28 이는 요한이 세례를 주던 요르단 강 건너편 베타니아에서 일어난 일이다.

 

무대의 주인공이 되어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한 번에 집중시킨다는 것은 얼마나 설레면서도 가슴 벅찬 일인지 모릅니다. 물론 성향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겠지만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는다는 일은 충분히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늘 틀에 박힌 일상을 벗어나 해보고 싶었던 일이나 미뤄 두었던 일들을 과감하게 시작하는 경우가 많아집니다. 내가 나로 살지 못하는 삶은 더욱 그러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내가 내 인생의 주인공”이라는 말이 이기적인 말보다는 오히려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가 되어 찾아오기도 합니다.

한편 많은 아이들은 무작정 “내가 주인공”이라는 말에 열광합니다.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며 사는 삶을 안타깝게 바라봅니다. 내가 주인공이라면 당연히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맞춰줘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앙을 갖고 있는 우리는 주인공이라는 말을 신중하게 잘 새겨들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인공이란 어떤 일에서 중심이 되거나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소중한 생명이 나를 통해 고유한 삶으로 세상에 드러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삶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삶의 주인공은 삶의 주인과는 다릅니다. 주인이란 그것을 소유한 사람 혹은 집안이나 단체를 책임감을 가지고 이끌어가는 사람을 뜻하지요. 그래서 말할 것도 없이 우리 삶의 주인은 생명을 주신 하느님이십니다. 꼭 맞는 표현은 아니지만 인생이라는 무대의 주인공은 우리 자신이지만 그 무대를 처음부터 기획하고 이끌어 가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가상의 무대와 현실의 인생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자유가 주어져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무대는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자가 의도된 대로만 이루어져야 하지만 인생은 우리의 의도에 따라 달라집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심을 준비하는 지혜로운 예언자인 세례자 요한에 대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삶은 앞에서 제가 언급한 삶의 주인과 주인공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생각합니다. 빛이 아니라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라고 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외치는 이의 소리라고 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합니다. 지나친 겸손이거나 지나친 공경일까요? 오히려 내 삶의 주인과 주인공을 잘 식별할 때 고백할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러운 표현일 것입니다. 요한을 추종하는 많은 제자들이 있었다는 성경의 기록만 보더라도, 그는 당대에 예수님 못지않은 명성을 떨쳤던 위대한 예언자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입에서 나온 고백은 더욱 분명하고 오늘날 우리에게 일침을 가하는 듯합니다.

성탄을 기다리는 대림시기입니다. 스스로 낮추시어 세상에 오시는 하느님을 맞아들이기 위해서는 먼저 주님께 우리 삶의 주인 자리를 내어드려야 합니다. 이와 더불어 세상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분께서 나를 중심으로 세상에 새롭게 태어나시도록 기도하고, 창조주요 주인에 대한 충실한 마음을 청해보면 더욱 좋겠습니다.

 

 

12월 24일 대림 제4주일 : 루카 1,26-38.

글 반 유딧 수녀 | 툿찡포교베네딕도회 대구수녀원, 경산 베네딕도성경학교

26 여섯째 달에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27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28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29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30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31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32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33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34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자,

35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36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37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38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1,38)

어느덧 대림 4주간입니다. 대림은 ‘기다림’이란 여백을 주며, 기다림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기다리는 사람은 깨어서 준비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와 무엇을, 어떻게 기다려야 하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복음은 우리가 기다리는 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예시합니다. :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32-33절)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다윗의 후손으로 야곱의 집안, 곧 이스라엘을 영원히 다스릴 왕으로 오실 분이라고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전합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로마의 압제를 받고 있었을 뿐 아니라 유배를 거쳐 오랜 세월동안(참조, 2열왕 17장; 25장) 다윗과 같이 강력한 왕 메시아가 이스라엘을 구원할 것을 기다려 왔습니다. 제1독서에서 다윗에게 하신 하느님의 약속을 믿었고, 이스라엘은 그 믿음에 희망을 걸고 있었습니다.(2사무 7,1-5.8-16) 사람은 하느님께 불성실하고 신의를 지키지 않는다 해도 하느님께서는 한 번 하신 약속은 반드시 지키시는 신의의 하느님, 성실하신 하느님이심을 믿어왔기 때문입니다.

나자렛의 처녀 마리아도 다윗의 계약과 이스라엘이 메시아의 오심을 간절히 희망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가브리엘 천사가 전하는 말씀의 의미를 곧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장차 자신을 통해 태어날 아기가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해도 그녀는 다윗 집안의 요셉과 약혼한 처녀였습니다.(27절) 그런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34절) 이것은 마리아의 질문이기도 하지만 또한 우리의 의문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의문에 천사는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37절)라며 하느님의 권능을 한 마디로 압축하여 모든 의문을 일순간에 해결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매혹적이고 명쾌한 응답입니까? 그렇지만 다시 되묻고 싶어집니다. 왜 하느님은 굳이 ‘불가능한 일’을 통해 섭리하시는 걸까? 얼마든지 과학적이고, 논리적이며, 순리적이고도 이성적인 방법도 있는데, 그렇게 해서 모든 이들이 납득하고 하느님의 섭리를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인가?

우리는 ‘구세주의 오심’, ‘영원한 나라’ 같은 공동체적이고 객관적인 것은 누구나 수용하고 얼마든지 ‘예.’ 하고 응답하며 다가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희생과 극기를 요구할 때는 ‘글쎄요.’ 하며 뒤로 물러섭니다. 이는 우리 지역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쉽게 체험되는 일입니다. 구설수에 오를까봐, 개인의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길까봐, 다른 이들에 앞서 금전을 투자하고도 생색도 못내는(?) 이런저런 이유로 뒤에서 조용히 신앙생활을 하고 싶다고 합니다. 처녀 마리아가 구세주이신 아기를 갖는다는 것은 괜찮지만 내가 성령에 의해 아기 예수를 갖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입니다. 아무리 구세주가 오신다 해도 현실적으로 내가 희생의 아기(?)를 갖는다는 것은 스캔들일 뿐만 아니라 영육적인 죽음을 감수해야 하는 모험이기 때문입니다.(참조, 마태 1,19; 신명기 22,23-24)

이처럼 믿음은 과학적이거나 이성적인 절차를 통해 납득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불가능한 것을 받아들여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38ㄱ절) 하고 믿음의 순종으로 이끄는 하느님의 신비이며 하느님의 권능입니다.(참조, 로마 16,25) 하느님은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38ㄴ절) 하는 마리아의 자기 증여를 통해 잉태되시는 ‘메시아’이시며, 죽음을 각오하는 자기희생과 극기, 그리고 사랑의 실천 없이 아기 예수님은 오시지 않습니다. 아니, 아기 예수님은 오시겠지만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 아니라 주일에 한 번 성당에서 만나는 예수님이시겠지요.

기다리는 사람은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하고 믿음의 순명에로 준비된 사람입니다. 언제 어느 곳에서든지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고 응답하는 사람입니다. 오늘은 나 자신과 신앙의 이웃들에게 이렇게 여쭈어보고 싶습니다. “아기 예수님께서 당신 안에 잉태되실 순명의 구유는 강건합니까?” 그리고 내 마음에 두 손을 모으며 기도합니다. 마라나타! “ 오십시오, 주 예수님!”(묵시 22,20)

 

 

12월 31일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 루카 2,22-40.

글 박광훈 안드레아 신부 | 대구가톨릭대학교 대신학원 양성자

22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그들은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23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24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

25 그런데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26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

27 그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기에 관한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들어오자,

28 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29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30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31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32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33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에 놀라워하였다.

34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35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36 한나라는 예언자도 있었는데,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37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38 그런데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39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그들은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40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오늘은 예수님과 마리아, 요셉이 이루신 거룩한 가정을 기념하는 성가정 축일입니다. 성가정, 성스럽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에서 “성스러움”의 의미는 “하느님을 위해 다른 것과 구별해놓다, 따로 떼어 바치다, 봉헌하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 반대말은 “속되다”라는 말이죠. 그 자체로 거룩한 것도 없고, 그 자체로 속된 것도 없습니다. 자신이 그것을 거룩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하느님을 위해 따로 떼어 바칠 때 그것은 거룩한 것이 됩니다. 반대로 아무리 거룩하게 보는 것이라도 자신만을 위한 것으로 바라볼 때 그것은 속된 것이 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성가정의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가정은 그 자체로 거룩한 가정은 아닙니다. 거룩한 일로 가득 찬 가정이라서 성가정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성가정이 겪어왔던 일들을 보면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마리아가 처녀의 몸으로 잉태한 일도 그렇고, 마구간에서 아기를 낳아야 했던 일, 헤로데를 피해 이집트로 온가족이 피신 갔던 일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일찍 아버지 요셉을 여윈 일이나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아들을 바라보던 어머니 마리아의 고통도 그렇습니다.

그 일들은 우리가 “거룩함”이라 부르는 것과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우환이 끊이질 않는, 잠시도 “바람 잘 날 없었던” 그런 가정입니다. 하지만 성가정은 그 모든 어려움을 거룩하게 받아들였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가족 구성원들을 성스럽게 받아들였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아들 예수를 하느님께 바쳐진 사람으로 존중했습니다. 또한 예수님도 부모를 하느님의 은총을 가득히 받는 사람으로 존중했습니다. 가족들 서로에게서 하느님을 발견하는 것, 바로 이 존중심이 성가정의 가장 큰 힘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성가정의 모범은 바로 이것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도 가족 서로가 서로를 자신의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고 하느님의 사람, 하느님께 바친 사람으로 생각한다면 가족들은 모두 거룩해질 것입니다. 부엌일을 하시는 어머니의 뒷모습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시는 아버지의 지친 어깨에서, 또 짓궂게 장난을 걸어오는 형제의 얼굴에서 하느님의 모습이 비춰질 것입니다. 가족들을 하느님께 떼어 바치도록 합시다. 그리하여 내 자식, 내 부모, 나의 혈육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하느님의 사람으로 생각합시다. 하느님이 제게 주신 하느님의 사람으로 대하도록 합시다. 그리하여 가정이 서로를 존중하는 법을 배우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화해와 용서, 사랑과 평화, 믿음과 희망이 무엇인지를 배우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쉽지 않습니다. 가정이 겪는 모든 어려움들, 여러 처지들을 생각하면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각자 몸담은 가정, 바로 그것이 아니라면 다른 출발점은 없습니다. 어렵더라도, 힘들더라도 여러분이 몸담은 가정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가족들을 하느님의 사람으로 바라보는 일부터, 하느님의 사람으로 존중하는 일에서부터 우리가 변화되고 세상이 변화될 것입니다.

2017년 한 해의 마지막 날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수많은 순간을 우리에게 허락하셨고 이제 한 해를 마무리하도록 해주셨습니다. 이 한 해를 이제 하느님께서 거두어 가시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이 한 해를 거두어 가시는 것은 또 다른 한 해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새로운 한 해, 새로운 365일을 하느님은 이제 우리에게 주시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낡은 것을 거두어 가시고 새로운 것을 주시려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지나간 것을 가져가시고 더 좋은 것을 주시려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제까지보다 더 가까이 우리와 함께 지내시려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이름은 임마누엘, 그분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십니다.

 

* 1년 동안 주일복음묵상글을 써 주신 박광훈 신부님, 윤주현 신부님, 김창현 신부님, 반 유딧 수녀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