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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당 봉헌 100주년의 해(1918~2018)
성모신심의 시작


글 이찬우 타대오 신부 | 교구 사료실 담당 겸 관덕정순교기념관장

저는 지난해 8월까지 2년 반 남짓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동안 성모당에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눈발이 날리는 추운 날에도, 땀이 비오듯 흐르는 더운 날에도 늘 미사를 봉헌해야 했습니다. 때로는 추위와 더위 때문에 성모당에서 미사하는 게 지긋지긋하다고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래! 내가 보속할 것이 많아서 이렇게 여기에 있는구나!’라고 스스로 위로하며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그렇게 성모당에서 미사를 봉헌하면서 많은 모습의 신자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때로는 눈물을 흘리면서 성모님 앞에서 기도하는 신자를 만날 수 있었고, 조용히 홀로 장궤를 하고 묵주기도를 하는 신자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성모당 잔디밭을 운동장이라고 생각하고 뛰어노는 어린이부터 성모당의 의미를 알고 찾아온 어른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성모당을 찾아왔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성모당에서 미사를 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습니다. 발령이 났습니다. 한편으로는 ‘추위와 더위에 지치지 않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쉽고 ‘더 이상 하늘을 보면서 성모님 그늘 아래에서 미사를 드릴 수 없겠구나!’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마음 한구석에서 아쉬움이 밀려왔습니다. ‘2018년이 성모당 백주년인데, 백주년은 준비를 하고 가야 하는데’라는 생각이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뜻밖의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성모당 백주년을 준비하면서 성모당에 대해 교구 잡지인 『빛』에 연재를 하지 않겠냐는 말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반갑고 설레면서 부담이 되었습니다. 아는 것도 없고, 성모당에 대해 잘 모르는데 글을 써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이었습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신자들이 부담감 없이 읽을 수 있는 글, 수필처럼 한 번 써 봐야지!’ 라고 생각하면서 요청에 응했습니다.

대구대목구가 설정되고 얼마 되지 않아 성모당이 만들어졌습니다. 교구가 설립된 지 10년도 되지 않아서 말입니다. 또한 이상하게도 우리나라의 신자들은 성모신심이 강한 것 같습니다. 물론 다른 나라도 성모신심이 강하기는 하지만 ‘왜 그럴까?’라는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번 호에서는 성모당이 생겨나게 된 배경과 옛날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1784년 한국천주교회가 자생적으로 생겨난 후, 한국천주교회는 오랫동안 박해를 겪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한국천주교회는 시작부터 박해의 연속이었습니다. 또한 한국천주교회는 신자들만으로 꾸려가던 교회였습니다. 주문모 신부님 6년, 여항덕 신부님 2년, 그리고 1836년 서양 선교사가 들어올 때까지 당시 신자들은 40년 가까운 세월을 성직자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신앙을 지켜왔습니다. 그렇게 신앙을 지켜나가던 신자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우리가 알 수 있는 내용은 신앙의 선조들이 남긴 서한 몇 개, 그리고 순교자들에 대한 이야기뿐입니다. 어떤 기도를 했고, 어떻게 신앙생활을 했는지 단편적인 이야기만 우리에게 남겨져 있을 따름입니다.

긴 박해기간, 그리고 성직자 없는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수많은 신앙인들이 관가에 붙잡혀 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때로는 죽음으로 신앙을 증거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기록에 남겨진 순교자들과 배교자들을 살펴보면 배교자가 훨씬 많았습니다. 붙잡힌 신자들 가운데 20% 정도만 순교를 했고 나머지는 배교를 했습니다. 삶이 그리워서, 사랑하는 가족을 버리지 못해서, 무섭고 떨려서 배교를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배교자라고 해서 신앙을 버리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용서를 청하고 교회에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교회에 돌아올 때 어머니의 존재, 엄한 아버지보다는 자신들의 잘못과 실수를 감싸주는 어머니 같은 존재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이신 성모님을 통해서 하느님 아버지에게로 향한 신앙이 더 깊어진 것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성 유진길 아우구스티노에 의해 쓰여진 ‘유진길 서한’이라는 짤막한 글이 1827년 교황청에 전달됩니다. 선교사를 보내달라고 간곡하게 표현한 이 글 때문에 1831년 조선대목구가 설립되고 조선대목구 초대 교구장으로 브뤼기에르 주교님이 선택됩니다. 하지만 브뤼기에르 주교님은 4년 간의 노력 끝에 조선 국경에 다다르기는 하지만 입국하지는 못합니다. 이후 그분의 뜻을 이어받아 모방 신부님, 샤스탕 신부님, 앵베르 주교님이 조선에 입국합니다. 앵베르 주교님은 1838년 12월 교황청에 한국천주교회의 주보성인으로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를 청합니다. 하지만 앵베르 주교님의 서신이 교황청에 도착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지납니다. 그 와중에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났고, 세 분의 성직자와 많은 신자들이 순교했습니다.

앵베르 주교님의 서신은 배를 타고 오랜 세월이 지난 후, 1840년 말이 되어서야 교황청에 도착했고, 1841년 2월 앵베르 주교님께서 청하신 대로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가 한국천주교회의 주보성인으로 선포됩니다. 그때는 한국천주교회 내에 성직자가 존재하지 않았는데도 말입니다. 어쩌면 성직자가 없는 한국천주교회를 가슴 아프게 여긴 성모님이 한국의 신자들과 함께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주보로 선포된 것은 1854년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 교의가 선포되기 이전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성모당의 주보성인도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이십니다. (역사적 사실이 가미되기는 했지만 성모신심에 대한 이야기는 필자 개인의 의견임을 밝혀둡니다.)

 

* 이번 호부터 새로 연재되는 성모당 봉헌 100주년의 해(1918~2018)’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이찬우 신부님은 현재 교구 사료실 담당과 관덕정순교기념관 관장으로 사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