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렉시오 디비나 영성 수련기 2
말씀에는 힘이 있다


글 전현규 바오로 |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대학원 2학년

‘대침묵’과 ‘거룩한 독서’, 두 가지는 신학교 생활에서 가장 자신 없는 부분이었다. 신학생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시간들임에도, 한편으로 내 안에서는 형식적으로 남아버린 규율로 메말라 가던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두 가지를 필요조건으로 갖춘 영신수련은 내게 부담을 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티에서의 한 달 동안 나는 걱정과 달리 내 얘기를 끊임없이 했고, 수없이 써내려갔다. 나를 제한하고 억누른다고 생각했던 침묵과 말씀이 그 무엇보다 나를 자유롭게 해주었다. 하느님과 한 달을 함께하며 말씀으로 채워진 새로운 나의 모습으로 내려와 이전의 나에게 말할 수 있었다. “내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요한 9,9)

 

‘내게 말씀은 무엇이었을까?’ 한참을 되뇌었다. 매일 성무일도를 하고 미사에 참여할 때마다 그 안에서 마주한 수많은 독서와 복음들은 그저 스쳐 지나갔었다. ‘거룩한 독서’는 다른 일들에 밀려 빨리 해치워야 할 것이 되었다. 익숙한 내용의 구절들은 한 단락만 보고서도 이미 머리 속에 있는 묵상을 꺼내 적게 되었고,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들은 피하게 되었다. 그렇게 말씀은 내 마음 안에서 생명력을 잃었고 내 관심 밖으로 벗어난 식상한 것이 되어갔다. 내 마음은 마치 돌밭이나 가시덤불(마태 13,1-9)과 같았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끊임없이 내 위에 말씀의 씨를 뿌리셨다. 말라버리고 숨이 막혀 자라지 못할 것 같았던 말씀들이 나를 건드리기 시작했다. 말씀들을 마주할 때마다 내 모습이 보이고 내 삶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럴수록 내 안에서 빛을 잃던 하느님의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말씀의 씨앗들이 자라나면서 주님은 점차 내게 말을 걸어오셨다. 나 또한 말씀 안에서 대답하기 시작했다. “저를 돌아가게 해 주소서. 제가 돌아가겠습니다. 당신은 주 저의 하느님이십니다. 저는 돌아오고 나서야 뉘우쳤고 깨닫고 나서야 제 가슴을 쳤습니다.”(예레 31,18-19)

그러던 중 피정의 사순시기가 찾아왔다. 다가오는 말씀들 앞에서 나의 부족함과 나약함이 너무나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 같았다. 특히 간음하다 잡힌 여인(요한 8,3-11)의 모습과 상황이 나와 그렇게 닮아있을 수가 없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는 말씀으로 여인을 포함한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의 죄가 예수님 앞에서 낱낱이 드러났다. 그 말씀은 내 삶의 기억들 또한 건드렸고 지금까지 숨기고 싶었던 부끄러운 모습들을 하나하나 찾아 당신 앞에 내세웠다. 자신의 못난 모습들이 드러날 때 사람들은 하나 둘씩 예수님 앞에서 떠나갔다. 나 또한 내 모든 것을 들추시는 말씀을 피하고 싶었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다.’며 돌아보지 않고 깊숙이 넣어두었던 것들을 꺼내 바라보시는 주님 앞에 무너지는 내 아집과 자존심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예수님만 남으시고 여인과 같이 ‘나’는 그대로 서 있었다. 더 이상 피할 곳도, 움켜쥘 것도 없이 주님 앞에 옷 하나 걸치지 않은 나의 존재만이 섰을 때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당신께 내 모든 것을 드렸을 때 주님은 나를 사랑한다고 대답하셨다. 그 후 하느님은 고해성사 신부님을 통해 다시 한번 말씀하셨다. “다 털어 놓으니 좀 시원하죠? 하느님도 이제 좀 시원하실 겁니다. 사람은 ‘되어가는 존재’이기에 실망하거나 멈추지 말고 끊임없이 주님께 자신을 알려 드리세요.”

그 순간에야 비로소 내가 절실히 의지해야 할 분이 예수님 한분뿐임을 느꼈다. ‘잘 사는’ 신학생이 되기 위해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다. 하지만 잘 산다는 기준은 세상, 그리고 마주하는 사람들의 눈에 보기 좋도록 맞춰져 있었다. 그 와중에 ‘잘 살지 못하는’ 내 모습과 나약함을 들키지 않으려 많은 힘이 들어갔다. ‘내가 원하는 나’를 쌓아갈수록,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는 데서 오는 답답함과 괴리감은 커졌다. 나는 하느님께 “당신을 따르는 길이 어찌 이리 복잡하고 무겁습니까?”하며 대들기도 했다. 나만을 바라보는 데서 ‘주님을 향한 눈’은 멀어버렸고, 내 목소리를 내는 데서 ‘주님을 향한 귀’가 닫혔으며, 보고 듣지 못하는데서 ‘주님을 부를 입’도 닫혀버렸다. 그런 내 위에 주님이 손을 얹으실 때 특히 아픈 부분을 어루만지실 때마다 쓰라린 느낌이 들었고,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며 하느님을 원망하고 미워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를 ‘소금’(마태 5,13)으로 만드신 분이 누구이신지를 이제야 알았다. 나를 ‘나’이게 하는 알맞는 짠맛을 주시고, 그 짠맛이 쓸모있게 쓰이도록 필요한 자리로 이끄시는 분도 주님이시다.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그 순간을 충실히 살아내는 것뿐이다. 나는 등경 위에 올려놓은 등불로부터 보내지는 ‘빛’이다.(마태 5,14) 내가 원하는 방향대로 갈 수도 없고 내가 원하는 곳에서 멈출 수도 없이, 단지 보내지는 곳으로 가서 그 빛이 어디에서 왔는지 돌아보게 만들 뿐이다. 그렇게 나는 하느님께 주도권을 내어 드렸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큰 일을 하실 수 있고 나를 더 좋은 길로 이끌어 주실 수 있는 분께 모든 것을 맡기는 삶이 얼마나 자유로운가를 알았기 때문이다. 그 내맡김의 시작은 바오로 사도의 말씀과 함께 시작되었다. “하느님이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당신의 친 아드님마저 아끼지 않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주시지 않겠습니까?”(로마 8,31-32) 또한 그 내맡김의 확신은 나와 함께하실 분이 죽음을 이기는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하심을 믿는 데서 시작되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영원히 함께하실 주님의 이끄심에 나를 맡기는 것은 내게 곧 ‘구원’이었다.

아쉽게도 나는 주어진 시간 동안 어느 동기들처럼 멈추지 않는 눈물을 흘리지도 못했고, 강렬한 기쁨이나 전율을 느끼지도 못했다. 하지만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는 물음에 나는 분명히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요한 21,16) 하고 대답했다. 나는 내가 전할 ‘복음’을 확실히 찾았다. 복음은 나와 함께하시는 하느님과의 만남에 대한 솔직한 전달이다.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가진다. 각 사람 위에 내려 앉으시는 성령이 그 사람을 가득 채울 때 그 삶의 자리에서 말씀은 항상 새롭게 태어난다.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사도들(사도 2,1-11)의 입에서 나온 각기 다른 말들은 듣는 이에게 필요한 언어로 하느님의 위업을 알려주었다. 내가 전할 복음은 듣는 이들의 구미에 맞는 언어가 아니다. 멀어져 가던 내 이름을 따뜻이 불러 당신을 따르라 하셨던 분, 나의 부족함을 용서하시고 사랑해주셨던 분, 영원히 내 곁을 떠나지 않으실 분을 만났다고 진솔히 고백할 때 내 마음의 구유에서 예수님

이 탄생하신다. 그리고 또다시 듣는 이의 마음속에 있는 다른 구유와 십자가를 찾아 가신다. 내가 할 것은 단지 자리를 비워 예수님께 내어 드리는 게 전부다. 그 행위 하나만으로 내 믿음은 온전히 충만해진다. 단순하고 자유로운 나를 찾게 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