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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글
시간의 속도


글 최성준 이냐시오 신부 | 월간 〈빛〉편집주간 겸 교구 문화홍보국장

아름다운 가을은 빨리 지나갑니다. 올해 봉헌 백주년을 맞은 성모당은 10월 묵주기도 성월 동안 치러진 화려한 행사들을 뒤로 하고 조용히 위령 성월을 맞았습니다. 아름답게 물든 단풍잎도 하나둘씩 떨어지고 나무도 겨울을 맞을 준비를 합니다. 어느덧 11월입니다. 해마다 이맘때면 항상 여름은 너무 길고 가을은 참 짧다는 생각을 합니다. 지구온난화의 영향도 있겠지만, 좋은 계절을 느끼는 시간은 상대적으로 빨리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시간은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똑같이 흐르지만 시간을 보내는 사람의 상황에 따라 시간은 다르게 느껴집니다. 황금연휴, 군 입대 후 첫 휴가, 방학, 사랑하는 이와의 데이트, 이런 시간은 상대적으로 빨리 갑니다. 반면에 긴 연휴 끝의 월요일 근무 시간, 맛집 앞에서 줄서서 기다리는 시간, 출퇴근길의 정체된 도로에서 보내는 시간, 강의 때 졸음을 참으면서 종치기를 기다리는 시간은 너무나 느리게 흘러갑니다.

이렇듯 가을은, 엄청난 무더위가 지난 후 하늘은 높고 푸르며 바람이 선선해지고 단풍은 아름답게 물든 찬란한 계절, 가을은 쏜살같이 지나가 버립니다. 그리고 곧 겨울이 오겠지요. 우리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름답고 찬란한 삶은 가을처럼 빨리 지나가 버립니다. 때로는 고통과 슬픔이 삶을 뒤흔들지만, ‘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속담처럼 죽음 앞에 서면 회한과 아쉬움이 남아 조금이라도 더 살고 싶은 게 우리네 인생입니다. 그래서 죽음은 피하고만 싶고, 죽음에 대해서 미리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죽음을 묵상하는 이유는 삶의 의미를 깨닫고, 삶에 더 충실하기 위해서입니다. 『논어』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계로(자로)가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감히 죽음에 대해서 묻고자 합니다.” 그러자 공자께서 대답했습니다. “아직 삶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1)

 

우리는 죽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것은 압니다.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으며, 죽음 앞에서 삶은 너무나 나약할 뿐입니다. 그렇다고 죽음을 두려워하며 절망 속에서 삶을 이어 나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죽음은 피할 수 없지만 누구에게나 찾아오기에 오히려 살아 있는 동안의 시간에 더 충실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위령 성월입니다. 세상을 떠난 이들을 기억하고 기도해 주는 날들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죽음을 생각하며 남은 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묵상해 보는 시기입니다. 좀 더 사는 것, 누구보다 오래 사는 것이 과연 중요할까요? 그보다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가 더 의미있는 고민일 것입니다. 시간은 상대적이기 때문입니다. 『논어』에는 이런 이야기도 나옵니다. “아침에 도(道)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2) 성인은 살아있는 동안 도를 듣고 깨달을 수 있다면 죽어도 좋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살면서 도를 들으면, 진리를 접하면, 주님을 만나 영원한 삶이 펼쳐진 구원을 깨닫는다면, ‘죽어도 좋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요한 5,24)

 

1) 『논어(論語)』 선진(先進), 11장. “敢問死.” 曰, “未知生, 焉知死.”

2) 『논어(論語)』 이인(里仁), 8장. 子曰, “朝聞道, 夕死可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