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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당 봉헌 100주년 기념 루르드문학미술제 문학부문 〈동상〉 신앙수기 ①
“엄마, 그 가모 따시나?”


글 남두현 시몬|도원성당

 

11월 중순 즈음,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일주일 정도가 지났다. 우리집은 아궁이에 불을 때는 집으로, 마당 한가운데는 마른 소나무 가지와 잎을 쌓아 둔 것이 겨우내 불을 때기에 충분한 양이었지만 그래도 아침에 일어날 때면 항상 추운 느낌이 가슴 속으로 파고든다. 아마 새벽 5시 반 정도였을 것이다. 막내로 가장 게으른 나를 어머니가 그 시간에 깨운다. “태욱(집에서 부르는 이름)아, 성당에 가자.” 일어나기 싫어서 온 몸을 뒤척이던 내가 묻는다. “엄마, 그 가모 따시나?” 어머니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응, 따시다.” 하셨지만 그 대답이 나를 유혹한 것인지 게으름의 극치였던 나를 일어나게 만들었다.

일어나니 누나 둘, 작은 형까지 모두 일어났고 옷을 주섬주섬 입었다. 두꺼운 빵모자까지 푸욱 눌러쓰고 촐랑촐랑 따라 나섰다. 너무 멀다는 느낌이 들 즈음 도착한 곳은 내가 다니던 학교의 강당보다 더 큰 건물이었다. “속았다!”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그 분위기에 압도되었는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건물 안 정면 제일 위에는 십자가, 양쪽 옆에는 알 수 없는 석고상들이 있었고, 어린 눈에 매우 으리으리하게 보이는 그곳에 세 개의 연탄난로가 난방시설의 전체였다. 그 중에서 제일 앞에 있는 난로 하나만 불이 켜져 있었던 것 같았는데 나는 왜 여기에 온지 몰랐다. 아무튼 막내는 가장 따뜻한 난로 옆에 자리를 잡고 꾸벅꾸벅 졸고 있는 모습으로 하느님과의 첫 만남이 시작되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에 친척 할머니의 권유에 따라 몸이 나으면 성당에 다니겠다는 조건으로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많지 않은 나이에 돌아가셨다. 그리고 성당에서 나오신 분들의 도움으로 아버지는 천주교 예절의 장례식을 치렀고 우리는 그 후로부터 성당을 나가기로 약속을 하였고 그렇게 다니게 되었다는 것을 내가 한참 자란 후에 알게 되었다.

그 날 이후 온 집안 식구들이 같이 예비신자 교리반에 가기도 하고, 놀기 좋아하던 나도 어머니와의 조건부에 따라 매주일이면 성당을 다니곤 했다. 아침에 20원을 받아서 성당에 가면 읽지도 않는 주보를 곱게 접어 주머니에 넣고서는 주일학교를 마치고 미사를 드리면서 10원을 봉헌금(그 당시에는 ‘연봇돈’이라고 했다.)으로 내고 미사를 마치고 나면 바로 놀기에 바빴다. 나머지 10원은 용돈으로 쓰면서 그렇게 놀다가 어둑해지는 밤이 되어서야 집에 들어가서 주머니 속에서 너덜너덜해진 주보를 꺼내 놓으면 어머니께서는 다시 10원을 용돈으로 주셨다.

다음 해 부활절을 맞이할 즈음 세례를 받게 되었는데 외할머니와 이모님의 가족, 그리고 어머니와 우리 사남매가 세례를 받는 날이었다. 너무 늦게까지 놀다가 세례식이 끝날 즈음에 성당에 도착을 하였는데도 신부님께서는 그 자리에서 세례를 주셨고 “본명을 ‘시몬’이라 해라.”고 하셨다. 그리고 “너는 아직 어리니 첫영성체 교리를 다시 배우고 영성체를 하여라.”고 하셨다. 내가 다니던 성당에는 두 분의 수녀님이 계셨는데 그 중 ‘똑순이 수녀’라는 별명을 가진 젊은 수녀님이 계셨다. 그 수녀님은 잔디가 깔린 사제관 앞을 지날 때는 신부님께서 기도하시니 방해가 되지 않도록 뒤꿈치를 들고 걸으라고 하셨다. 술래잡기를 하면서 뛰어 놀다가도 사제관 앞에서는 뒤꿈치를 들고 조심스럽게 걸어갔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어린 시절 성당 마당에서 뛰어 놀던 모습은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게으르고 방황하면서 깊은 냉담의 길을 달렸다.

나는 어린 시절에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 어린 4남매를 키우느라 시장에서 힘들게 장사를 하신 어머니께 효자는 아니었던 것 같다. 어린 나이에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가 하면 학교에서는 음성 집단을 만들고 어울리며 힘을 과시하기 위해 다른 학생들과 싸우기도 하고, 극장에서 일하는 사람들, 구두 닦는 사람들과 어울리기도 하는 등 아주 위험한 상태에 까지 가는 사고를 치기도 하였다. 군 입대를 앞둔 어느 날에는 술을 마시고 고성방가를 하고 돌아다니다 주변 사람과 사소한 싸움으로 경찰에 잡혀갔다. 유치장에 갇히게 되었는데 당시 악명 높은 ‘삼청교육대’가 시작되던 시기로 나와 친구들은 곧 군대를 가야한다면서 주머니에 넣고 있던 군 입대 영장을 경찰에게 보여 주고서야 나올 수 있었고, 며칠 후 나는 입대를 하게 되었다.

군 생활은 나의 삶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 사단에서 가장 힘들다는 수색대의 말단 소총수로 가게 되었다. 어느 날 지뢰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한 번씩은 북한의 군인들도 만날 수 있는 곳, 바로 비무장지대(DMZ)의 수색작전을 마치고 지친 몸을 가누며 돌아오는 날이었는데 숙식을 하던 야영지가 매우 어수선했다. 사단 본부에서 의무대 차량이 와 있었고 부대원들의 분주한 모습에 심상치 않은 사고가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같이 근무를 하던 한 사람이 수류탄 투척 훈련을 하던 중 불발탄이었는지 투척병의 실수였는지 부대에서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는 큰 사고가 났다. 그 사고로 한 사람이 죽고, 한 사람은 실명했다. 그 사고가 있고 난 뒤 며칠 후에야 알 수 있었다. 그 일이 발생한 후 우리는 깊은 침묵의 시간을 보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 슬픈 기억이 우리를 오랫동안 잡아 두지는 않았다. 그동안 기억 속에서 그렇게 친하게 지냈던 두 사람은 우리 주변에서 사라졌다. 같은 식탁에서 밥을 먹고 취침 시간에 주번 사관 몰래 침상 밑에 숨겨두었던 술을 꺼내어 같이 마시던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은 죽음으로, 또 한 사람은 실명으로 인해 부대를 떠났다. 그 엄청난 사건의 충격과 슬픔이 부대에 남아 근무하던 나머지 병사들에게는 불과 일주일 정도 지나자 모두 사라진 채 기억에서 없어지고 있었다. 그 일에 대하여 아무도 말하는 이가 없이 그렇게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 일을 겪으면서 내가 없어져도 지금 나의 옆에 있는 이 전우들도 머지않은 시간에 나를 기억 속에서 지울 것이라는 사실에 너무나 슬펐고 나 자신이 무력하게만 느껴졌다. 이런 나의 모습을 보는 것조차 싫어지려고 할 때 나는 기댈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았던 것일까? 주일이 되자 스스로 군부대의 성당을 찾아갔다. 거의 6년이 넘는 냉담의 늪을 벗어나기 위하여 고해성사를 볼 때 회한의 눈물을 흘렸던 기억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주님, 어찌 저를 용서하십니까?’

결혼을 하고 미국으로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아들을 낳았다. 아들이 말을 하기 시작하자 아내의 세뇌 교육이 시작되었다. 매일 아침마다 아이가 일어나면 집안의 중앙에 높이 달려 계신 십자고상을 보고 “예수님, 아멘.” 하고, 그 아래에 계신 성모상 앞에서는 “성모님, 아멘.” 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게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외출을 하고 돌아오니 사고가 난 것이었다. 우리가 살던 아파트는 3층 건물로 1층에 살고 있었지만 반지하의 주차장 위에 있었기 때문에 창문에서 바닥까지 거의 2.5m 정도 되었다. 그 높이에서 방충망을 타고 아이가 떨어진 것이다. 그런데 그 당시 차를 타고 주차장으로 들어오면서 아이가 떨어지는 것을 본 목격자의 말에 따르면 참으로 신기할 정도였다. 아이가 떨어지는 순간 누군가 밑에서 아이를 받아주는 것 같이 사뿐하게 떨어졌다는 것이다. 어른들은 많이 놀랐지만 다행히 아이는 아무렇지도 않고 무사했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우리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 아침마다 인사하는 예쁜 아이를 받아 주셨다고….

그렇게 지내던 나는 세례를 받고 22년이 지나 한국도 아닌 미국이라는 곳에서 늦깎이 견진성사를 받게 되면서 다시 한 번 특별한 은총을 경험했다. 어릴 적 내게 세례를 주신 신부님께서 주교님이 되시고 교구장이 되셨는데, 마침 해외에서 사목하시는 교구 소속 사제들을 방문하러 오셨다가 견진성사를 주례하신 것이다. 그래서 나의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를 같은 분이 주신 것이다.

나는 이 신앙생활을 통하여 ‘지금까지도 하느님께서는 그 옛날 춥다고 엄살을 떨며 난로 옆에서 그렇게 졸고 있던 어린 아이를 보살펴 주셨구나. 그리고 항상 함께하셨구나.’ 하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어머니께서 “응, 따시다.” 라고 대답하셨던 것이 거짓이 아니라 참으로 따스한 하느님의 사랑을 대답하신 것이다.

나는 이 따스한 하느님의 사랑을 나의 아들에게 영원한 유산으로 남기려 한다. 참으로 따스한 하느님의 온기가 넘치고 성모님의 사랑이 가득한, 세상에서 가장 큰 유산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