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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글
잊어야 할 것과 잊지 말아야 할 것


글 최성준 이냐시오 신부 | 월간 〈빛〉편집주간 겸 교구 문화홍보국장

 

살아가면서 깜빡깜빡 잘 잊어버려 곤혹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단순히 건망증이라고 무시하고 넘기기에는 자신이 바보 같을 때가 있지요. 휴대폰을 손에 들고 찾는다거나 머리 위에 꽂아 둔 안경을 찾아 헤매는 건 웃어넘길 수 있지만 중요한 약속을 깜빡해서 지키지 못했다거나 사랑하는 이와의 특별한 날(생일, 결혼기념일 같은)을 잊어버리는 결정적인 실수는 돌이키기가 힘듭니다.

사람들은 잊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해 왔습니다. 문자를 발명해 기록해 두기도 하고, 그림이나 사진으로 남겨 오래도록 기억해 두려고 애씁니다. 과거의 왕들은 왕좌의 오른쪽에 경구를 적어 놓고 의자에 앉을 때마다 그 말씀을 되새기며 자신의 행동을 경계했습니다. 그게 바로 ‘좌우명(座右銘)’입니다.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이야기처럼 아버지의 원수를 잊지 않기 위해 장작더미 위에서 잠을 자기도 하고, 치욕적인 패배를 잊지 않으려고 날마다 쓸개를 핥으며 고통스러웠던 날들을 기억하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은 이집트 노예살이의 고통과 거기서 해방시켜 주신 주님의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 해마다 파스카(過越節) 축제를 지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지는 기억을 붙잡기 위해 사람들은 끊임없이 노력합니다.

 

반면에 잊어야 할 것을 잊지 못해 괴로워하기도 하지요. 고통스러웠던 과거의 기억, 가슴 아픈 상처들, 부끄러운 과거의 실수들은 기억에서 빨리 털어 버리고 잊히기를 바랍니다. “망각은 신이 주신 선물”이라는 말도 있듯이, 아프고 고통스러운 기억이 시간이 지나면서 옅어지고 잊힌다는 사실은 중요합니다. ‘과잉 기억 증후군’이라는 증상이 있습니다.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자신이 보고 들은 모든 것을 기억하는 병리현상입니다. 과거의 날짜만 대면 그날 있었던 일과 먹은 음식뿐만 아니라 자신이 느꼈던 감정과 분위기까지 모두 기억합니다. 기억력이 너무 좋아 살아가는 데 훨씬 편리하고 유리할 것 같지만 아픈 기억과 부끄러운 과거, 쓸데없는 일들을 잊지 못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지옥 같은 고통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쉽게 용서하지 못하는 것도 쉽게 잊지 못해서이기도 합니다. 내가 받은 상처의 아픔, 그때 느꼈던 모욕감, 그 이후 힘겹게 살아온 날들이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기에 용서하기 어렵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상처가 아물고 기억이 희미해지면 용서할 용기도 생기게 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잊어야 할 것은 쉽게 잊지 못해 힘들어하면서 정작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잊어버리고 살 때가 많습니다. 이달 1일은 삼일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백년이 되는 날입니다. 일제 식민지 시절의 아픈 기억과 선조들의 독립운동의 정신은 시대의 흐름 속에 퇴색되어 버린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제 사순시기가 시작됩니다. 해마다 교회력의 사순시기와 부활시기를 보내는 것은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어 세상에 오셨다가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그 사랑을 잊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 희생적인 사랑을 닮아 우리도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고, 우리 십자가를 지고 사랑의 길을 따라가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