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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이야기
“얼음 깨기”


글 김윤식 안토니오 신부 | 하양성당 보좌

 

2019년도 어느덧 3월입니다. 새 학기가 시작된 학교에서는 가슴 설레는 첫 만남과 함께 새로운 ‘관계맺음’이 시작됩니다. 새로운 환경과 사람들 사이에서 보다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 소위 ‘OT’(오리엔테이션), ‘MT’(멤버십 트레이닝)와 같은 연례행사도 하나둘 시작되죠. 저도 그때마다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여했고 후에는 진행도 해봤는데, 다양한 프로그램 사이에서도 늘 앞자리를 차지하는 프로그램이 있으니 바로 ‘아이스 브레이킹’입니다.

 

‘아이스 브레이킹’이란 처음 만나는 프로그램의 참가자들 사이에 마치 얼음벽처럼 세워져 있는 어색함과 긴장감을 해소해 더 빠르게 친밀감을 형성하기 위한 사전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도 많은 사람들 앞에 서서 프로그램을 이끌어가야 할 때가 많은데, 간단한 게임이나 유머를 통해 진행자와 참가자 사이에 있는, 혹은 참가자 사이에 있는 그 ‘얼음’을 얼마나 빠르게 깨내는가가 향후 프로그램의 참여도와 분위기를 크게 좌우함을 수차례 체험했습니다.

이 ‘얼음’이란 비유 속에 뼈가 있는 듯합니다. 사람과의 사이에 있는 벽, 새로운 관계를 맺기 위해 반드시 깨거나 녹이고 들어가야만 하는 얼음벽, 독자들께서도 살면서 그 벽의 존재를 뼈저리게 체험해 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래도 같은 학교, 같은 반, 혹은 같은 과에서 만난 학생들에게서는 그 벽이 비교적 얇다는 것을 느낍니다. 약간의 공감대만 형성되면 어느새 팔짱을 끼고 어깨동무를 하며 언제 그랬냐는 듯 오랜 친구처럼 지내곤 하죠. 하지만 어떤 이해관계에서, 혹은 각자의 이익을 목적으로 모인 ‘어른들’ 앞에서 아이스 브레이킹을 해내기란 참 쉽지가 않습니다. 아마도 그 얼음벽이란 세월과 삶의 다양한 경험들, 상처가 쌓이면서 점점 더 높고 두꺼워지는가 봅니다.

 

이런 ‘어른들’의 ‘얼음벽’에 대해 무섭게 통찰해 냈던 ‘어린이들’이 있습니다. 모든 노래를 직접 작업하는 천재적인 남매그룹 악동뮤지션입니다. 5년 전 그들이 발표한 첫 앨범의 수록곡 ‘얼음들’의 뮤직비디오를 처음 보고 받았던 충격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얼음’처럼 차갑게 굳어 버린 ‘어른들’의 마음을 아름다운 선율 위에 그려낸 그 노래가사를 일부 옮겨봅니다. 노래와 함께 뮤직비디오를 꼭 한 번 보시길 추천해 드립니다.

 

“붉은 해가 세수하던 파란 바다 검게 물들고/ 구름 비바람 오가던 하얀 하늘 회색빛 들고 맘속에 찾아온 어둠을 그대로 두고/ 밤을 덮은 차가운 그림자마냥 굳어간다/ 얼음들이 녹아지면/ 조금 더 따뜻한 노래가 나올 텐데/ 얼음들은 왜 그렇게 차가울까/ 어른들 세상 추위도 풀렸으면 해/ 얼었던 사랑이 이젠 주위로 흘렀으면 해”

 

어쩌다 노래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가 버렸는데, 사실 이번호 단상의 출발은 작년 말 뛰어난 설정과 연출, 연기파 배우들의 열연으로 조용히 530만여 관객을 동원한 영화 ‘완벽한 타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지난호에서 ‘어른 됨’에 대한 성찰을 하며 가장 먼저 떠올랐던 이 영화는 이탈리아의 영화 ‘퍼펙트 스트레인저스’의 리메이크 작품입니다. 스마트폰 안에 많은 비밀을 넘어 자신의 인격마저 담고 살아가는 현대인의 상황과 심리를 꿰뚫는 뛰어난 설정으로, 일찍이 스페인과 프랑스에서도 리메이크 되었습니다. 저녁 만찬시간 동안 각자의 스마트폰을 식탁 위에 올려두고 각자에게 오는 모든 연락을 공유하는 게임을 시작한 그들은, 서로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공유하고 있다고 자신하던 40년 지기 ‘완벽한 친구들’이었습니다. 극적 재미를 위해 다소 작위적이고 지나친 상황설정이 있지만 전화 한 통, 메시지 하나에 서로 몰래 단단히 쌓아왔던 얼음벽이 하나씩 무너져 가는 과정은 가히 공포나 서스펜스 장르에 비견될 만합니다. 내 스마트폰에 담겨진 비밀이 많은 분일수록, 내 안에 쌓아온 얼음벽이 더 두껍고 높은 분일수록 손에 땀을 쥐고 영화를 보셨겠죠.

 

제가 이 작품을 통해 읽어낸 메시지는 그것입니다. 언제부턴가 스마트폰에 모든 것을 담기 시작한 우리들. 소통의 방법과 편의성은 날로 발전하지만 오히려 서로의 비밀은 점점 더 많아지고, 내게 오는 메시지도 필요에 따라 철저히 취사선택하는 가운데 마음속 얼음벽을 점점 더 두껍게 쌓아가는 우리들. 그 모습을 영화는 ‘완벽한 타인’이라는 역설적인 주제어로 담아내고 있습니다.(원작의 ‘퍼펙트 스트레인저스’와 다르게 ‘완벽한 타인’은 ‘친밀한’이란 뜻의 ‘인티메이트 스트레인저스’라는 제목을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화는 그만한 얼음벽은 적당한 관계유지를 위한 우리 모두의 ‘필요악’이라는 조금은 씁쓸한 메시지로 끝을 맺습니다.

 

무심코 지나쳤던 영화의 시작, 어린 시절 함께 두꺼운 얼음을 깨던 친구들의 모습에서 철없지만 순수했던 제 모습을 떠올려봅니다. 단지 함께함이 즐겁고, 함께할 때 무엇도 두렵지 않았던 그때의 어린이처럼 되기에는 저도 이제 나이가 많이 들었나봅니다. 때로는 새롭게 만난 사람을 속으로 빠르게 평가하고, 무심코 선을 긋는 모습에 스스로 놀라기도 합니다. 두꺼운 얼음은 날카로운 비수로 내리쳐 깰 수도 있지만 깨어진 얼음조각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더 큰 상처를 남기기도 합니다. 우리 사이의 얼음을 가장 확실히 녹여내는 것은 역시 서로를 가슴으로 품어주는 따뜻한 사랑과 관심이겠죠. 그리고 그것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일 때 우리는 다시 만나는 여러 줄기의 물처럼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달의 추천 영화>

굿 윌 헌팅(1998), 우리들(2015), 퍼펙트 스트레인저스(2016), 서치(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