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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글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글 최성준 이냐시오 신부 | 월간〈빛〉 편집주간 겸 교구 문화홍보국장

어느 책 제목처럼 코로나19 사태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멈추게 되었고, 비로소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요즘 ‘포스트 코로나(코로나 이후의 세계)’에 대해 많은 학자들이 이야기합니다. 앞으로는 화상으로 이루어지는 회의, 인터넷을 이용한 쇼핑 등 사회 전반에 비대면(untact) 문화가 일상이 될 것이라고 진단합니다. 우리는 이미 실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계속 그렇게 만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관계’를 맺으며 인정받고 사랑받아야 살 수 있는 우리가 아닌가요? ‘비대면’의 상황 아래서 오히려 ‘대면’의 중요성을 더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2023년이면 지구상의 인구는 80억 명을 돌파한다고 합니다. 80억의 인구가 비대면으로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인류학자인 제인 구달이나 최재천 교수 같은 생태·환경학자들은 ‘재앙 끝의 희망’을 조심스럽게 이야기합니다. 코로나 사태라는 위기가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무분별한 환경 파괴가 야생동물과 인간이 접촉할 기회를 만들었고,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와 같은 전에 없던 감염병이 발생한 것입니다. 오늘날 환경 파괴의 심각성과 환경 보호의 중요성을 모두 알고는 있지만 인류는 잘 실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당장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이제 우리는 피부에 와 닿게 실감하게 되었고, 뭔가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는 데 공감합니다. 생태·환경학자들은 이제 ‘자연과의 거리두기’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이것만 잘 이루어진다면 인간 사이의 거리두기는 굳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지요.

 

“배움을 행하면 날로 더해지고(쌓이고), 도를 행하면 날로 덜어진다.(비워진다) 덜어내고 또 덜어내 무위(無爲)에 이르니, 무위(無爲)하면 하지 못하는 것이 없게 된다.”1)

 

제가 참 좋아하는 구절입니다. ‘배움을 행한다.(爲學)’는 것은 무언가를 쌓아 나가는 행위입니다. 지식을 쌓고 더 쌓고, 돈을 더 벌고, 욕망을 충족시키고, 더 발전하고 더 나아가고 더 높아지는 것. 어쩌면 오늘날 우리가 추구하는 삶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인간은 더욱더 많이 쌓기 위해서 자연을 정복하고 파괴합니다. 반면에 ‘도를 행한다(爲道)’는 것은 덜어 내고 비워 나가는 행위입니다. 덜어 내고 덜어 내어 자신을 비웁니다. 욕망을 절제함으로써 나의 마음을 비웁니다. 빈자리에 타인을 위한 공간을 내어 주고, 하느님의 뜻이 들어올 공간도 확보합니다. 멈추고, 더 낮아지고, 더 느려집니다. 도를 행한다는 것은 어쩌면 인류가 자연과 공존할 수 있는 삶이고,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복음적인 삶입니다. 비우고 비우면, 그래서 억지로 무언가를 하려 하지 않고 이루려 하지 않는 ‘무위(無爲)’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못 이룰 것이 없을 것입니다.(無不爲) 무위(無爲)하면 무불위(無不爲)하게 된다는 역설의 경지는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 23,12)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떠오르게 합니다.

 

코로나 시대를 보내며 우리는 모두 멈췄습니다. 멈춘 김에 주위를 둘러보고, 나 자신을 둘러보고, 내가 살아 온 삶을 둘러봅니다. 그리고 생각해 봅니다. 삶에서 덜어낸다는 것, 비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말입니다. 나는 무언가를 바라고 욕망했으며, 더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어 했으며, 더 높아지고 더 발전하려고만 했지 주님께서 말씀하신 더 낮아지고 더 비우는 삶을 실천할 생각은 없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제가 육류를 먹지 않은 지 7년이 지났습니다. 지난 사순시기부터는 어류와 유제품, 달걀도 끊었습니다. 그리고 절제와 욕망 사이에서 방황하는 저의 마음을 들여다봅니다. 아직 마음을 비울 경지에는 이르지 못해 애꿎은 음식만 조절해 봅니다. 자꾸만 내 안에 무언가를 채우고 쌓으려는 유혹을 떨쳐 버리고자 오늘도 무엇을 비울까 고민해 봅니다.

 

1) 노자, 『도덕경』, 48장. “爲學日益, 爲道日損. 損之又損, 以至於無爲, 無爲而 無不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