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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 온 편지
콜마르에서 1억 5천만 뷰의 중국 먹방에 출연하다


글 심탁 클레멘스 신부 | 프랑스 스트라스부르교구 선교사목

 

오 선생님의 문자가 도착합니다. “신부님, 우리가 중국방송에서 1억 5천만 뷰를 찍었답니다!” 콜마르에서 선교활동을 한 지 만 3년이 되어가던 2018년 봄이었습니다. 첫 해(2016. 9~2017.8)를 성요셉성당 협력사제 겸 2천 배드 정도의 파스터(가톨릭)병원의 원목이었다면 그 다음 두 해 동안은 청소년담당겸 주교좌 중·고등학교의 교목으로 활동했습니다. 2018년 어느 봄날, 콜마르에서 처음으로 한국 여류 화가를 만났습니다. 유창한 불어 실력에 파리 그랑팔래에서 정기적인 초대전을 가질 정도의 실력을 가진 그런 분이었습니다. 어느 전시장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첫 만남에서 저녁 초대를 하셨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 화가의 종교는 불교, 남편은 가톨릭 집안의 알자스 사람으로 농업관련 박사학위를 가진 옥수수 농사를 짓는 고급 농사꾼입니다. 두 한국인들이 서로 놀란 것은 콜마르에서 한국 사람을 만나기도 어려운데 그분은 대구 수성동 출신이고 저는 대봉동 출신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웃이었던 것입니다.

 

첫 초대에는 일본 서예가 여성과 그의 동반자 프랑스 사업가, 중국 남자 화가(종교는 개신교)가 동시에 초대되어 있었습니다. 종교적으로는 불교, 개신교, 천주교, 신토이즘, 국적으로는 한·중·일, 그리고 프랑스 사람들이 모인 것입니다. 우리를 초대한 오 선생님의 개방적이고 쾌활한 성품과 기백이 분위기를 첫 순간부터 진취적이고 즐겁게 만들었습니다. 불어 실력으로 치면 오 선생님이 최고, 그 다음 저, 일본 서예가, 그리고 신참인 중국 화가 순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소통에는 별문제가 없었습니다. 사소한 말이나 제스처에도 서로 웃고 눈을 반짝이면서 경청해 주었습니다. 아페리티프로 샴페인(알자스산은 ‘크레망’으로 명명)과 치즈, 올리브, 멜론, 장봉 등과 전식은 군만두, 잡채, 샐러드, 호박 요리에다 다 기억나진 않지만 압권은 본식으로 한국식 나물비빔밥에 된장국과 미역국, 그리고 직접 담근 김치 등이었습니다.

인상적인 것은 중국 화가가 식사 전 기도를 하라고 큰소리로 강조하는 바람에 초종교적 모임에서 신부가 축복기도를 했습니다. 모두가 너무 자연스럽게 잘 받아들이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신참인 중국 화가가 가장 적극적으로 함께 아시아팀 전시회를 하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분위기상 반론을 제기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저는 속으로 너무 빠르다고 느꼈지만 이 느낌은 저와의 세대차이 때문인가 싶기도 했습니다. 중국과 일본은 40대 초반, 두 한국인과 두 프랑스 사람들은 50대 중·후반이었으니까요. 반짝 아이디어로 팀 이름을 제가 지었습니다. ‘한국 화가 씨, 일본 서예가 케이슈, 중국 화가 씨! 합쳐서 오-케이-고 가자!’ 고 외치자, 프랑스 남자들은 박장대소를 하며 너무 멋지다고 환호를 했습니다. 날이 갈수록 마치 기다려 온 사람들처럼 급속도로 친해졌고, 서로의 안부를 궁금해 하는 사이로 발전했습니다. 오 선생님의 적극성으로 식당에서도 가정에서도 식사 모임이 몇 차례 더 있었고, 등산도 같이 하고 전시회에도 같이 가기도 하면서 각자의 전시회에 서로가 참석해 주었습니다. 저에게는 참신하고 기쁜 사교모임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 문화적이고 사교적 활동이 저에게는 나름 선교적인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곳에 가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대화와 더불어 새로운 세계를 만나고 새로운 인간관계도 맺는 등 예전에 알지 못했던 예술적 감상의 즐거움과 기발한 아이디어와 개성들을 만나는 기쁨도 선물처럼 넘쳤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신참 중국 화가(한국식으로는 ‘곽’씨, 자신의 발음으로는 ‘고’씨)가 중국 배우들의 초대를 받았는데 같이 가자고 합니다.(갑자기 중국 유명 배우들의 초대를 받아 식당에 간다고? 무슨 말인지?) 그들에게 그림 하나를 2000유로(4000유로일 수도 있음)를 받았다고 하면서 다소 흥분해 있었습니다. 사실 그 친구의 발음이 어려운 데다 문장 구성도 잘 안 되고 상황 이해도 잘 안 돼서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채 저는 더 알고자 하지도 않았습니다. 다소 우여곡절 끝에 며칠 후, 아시아 사총사는 각자 음식을 하나씩 준비해서 콜마르 중심에 있는 곽씨 화실에서 만나 근처 약속장소로 이동했습니다. 중국인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이 인해전술이 콜마르 주변 식당들과 슈퍼마켓들을 초토화시키는 바람에 콜마르에서 살고 일하고 있는 저 마저도 문전박대를 당하는 일이 있었지만 정작 왜 그런지는 몰랐었습니다.

그렇게 콜마르의 ‘작은 베네치아’ 옆 ‘검은 여섯 산봉우리 광장’에 도착! 사람들은 많고 바리케이드까지 쳐져 있었으나 ‘오케이고’ 일행은 검문을 통과했습니다. 순간 엄청난 조명 세례 속에 수십 개의 촬영 카메라들이 배치된 식당 입구로 들어서야 했습니다. ‘앗, 이건 뭐지? (…) 돌아가 버릴까?’ 숨겨진 내성적 본능이 꿈틀했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몇 걸음 앞에 중국 영화배우 자오웨이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합니다. ‘탁아, 웬일이니?’라고 누가 제 속에서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영화에서 보던 것보다 다소 늙은 것 같고 피부탄력도 없어 보이고 주름살도 보이고 화장을 하긴 한 것 같은데, 건성건성 대하는 게 너무 피곤해 보였습니다.

그 옆에는 또 다른 여배우 서기. 또 그 옆에 이름 모를 남자 배우, 중국 아이돌 남자 가수 17세(왕쥔가이)와 25세(이름 모름), 나중에 합류한 자오웨이 남편과 중국인 사업가…. 가끔 왔다갔다하며 뭔가를 주문하는 여성 PD, 저는 요리를 못해 월남만두를 십여 명이 먹을 수 있는 양을 사갔고, 두 한·일 여성도 각자 준비한 뭔가를 이 배우들에게 건넸습니다. 저는 ‘아뿔사! 이게 아닌데….’ 했습니다. 식당에 초대받아 가면서 음식을 사들고 갔으니…. 우리 셋은 중국 고씨를 쳐다보며 궁시렁거렸습니다.

알고 보니 중국 배우들이 콜마르 시내 한가운데 어느 식당을 빌려서 몇 주 동안 촬영을 했고, 우리가 초대받은 날은 모든 촬영을 마치고 마지막 종방파티겸 촬영을 하는 날이었던 것입니다. 고 화가는 중국말로 우리를 소개했습니다. 짧은 영어로 우리는 약간의 대화를 주고 받았지만 그저 들러리였습니다. 사진을 찍을까 하고 휴대폰을 만지려는 순간, 안 된다고 그 남자 배우가 정색을 해서 저는 멈추었습니다. 그런데 식탁에 앉은 다른 사람들이 찍는 것은 말리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제가 좀 찍혔습니다. 분명 뭘 먹으러 갔는데 먹는 것은 형식이고 여러 방향의 카메라들에 둘러싸여 무엇을 먹는지 마시는지 감각도 없었고 사실 뭘 먹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습니다. 자기들끼리 중국어로 대화하는 바람에 소통부재의 상태가 지속되기도 했고…. 어쨌든 우리 사총사는 뒤풀이를 하다가 자오웨이 남편과 사업가와 사진을 찍기도 했습니다.

  

다음날 학교 근무를 갔습니다. 저는 그들(200여 명의 교사들, 1600여 명의 중·고생) 가운데 이미 스타가 되어 있었습니다. 다만 한 가지, 약간 흐뭇했던 것은 항상 저의 인사를 무시하는 듯한 키 큰 중국계 중학생이 한 명 있는데, 이날따라 스스로 다가와서(물론 인사는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어제 저녁 거기서 보고 너무 놀랐다.”며 뭔가 신기해하는 표정을 짓는 것입니다. 그날 이후로 이 친구는 교목실을 마치 자기 방처럼 들락날락거렸습니다. 이 점이 저에게는 가장 기쁜 일로 남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