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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이야기
작년 여름의 야구장


글 허찬욱 도미니코 신부 |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3루 내야 응원석(3층 블루존)

라이온즈 파크에서는 홈팀인 삼성 라이온즈가 3루쪽 덕 아웃을 씁니다. 덕아웃과 가까운 곳에 응원단상이 있고, 그 앞에 내야 응원석이 자리하고 있지요. 내야 응원석에는 충성도 높은 팬들이 각자가 응원하는 선수의 유니폼을 입고 모여 있습니다. 응원석에 앉은 사람들은 응원단장의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응원가를 부르고, 치어리더들의 율동도 곧잘 따라 합니다.

선수마다 응원가가 있고, 율동이 있습니다. 이학주 선수의 응원가를 부를 때 야구장은 온통 들썩입니다. “오오오, 삼성의 이학주!” 두 팔을 그러안고 발을 구르는 응원은 라이온즈 파크에서만 볼 수 있는 장관이지요. 홈팀 내야 응원석은 팬들의 힘을 응집하는 장소이고, 응집된 힘을 표출하는 장소입니다. 공 하나하나에 응원석이 들썩입니다. 세상을 다 가진 듯 환호했다가, 방금 가졌던 세상이 아주 사라졌기라도 하듯 장탄식이 이어집니다. 이런 몰입 때문에 홈팀 내야 응원석을 좋아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1루 외야 자유석(5층 SKY석)

1루쪽에는 원정팀 응원석이 있습니다. 열성적인 팬들은 멀리서도 원정 응원을 오지요. 서울에서건, 광주에서건 자신의 팀을 응원하기 위해 대구까지 찾아옵니다. 숫자는 비교가 되지 않지만 응원의 열정만큼은 홈팀 못지 않습니다. 그들은 1루 원정 응원석(3층)을 당당하게 차지하고 목청을 높여 자신들의 팀을 응원합니다.

관람석의 가장 변방은 5층에 있는 1루 외야 자유석입니다. 너무 높은 곳에 있어, 선수들이 잘 보이지도 않습니다. 이곳에는 혼자 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남들처럼 무언가를 먹거나 마시지도 않고, 거의 부동의 자세로 앉아서 경기를 봅니다. 안타나 홈런이 나와도 손뼉을 치거나 환호성을 지르지 않습니다. 특정 팀의 유니폼을 입지 않으니, 그들이 어느 팀을 응원하는지 알 수도 없지요. 1루쪽에 앉아 있으니 원정 팀 팬 아니겠냐 하시겠지만, 저는 압니다. 그들이 1루쪽 자유석을 택하는 이유는 1루쪽이 3루쪽보다 훨씬 조용하기 때문입니다.

야구장에 혼자 와서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들, 긴장되는 승부처에서도 미동조차 하지 않는 이 사람들을 저는 관조하는 인간들이라 부릅니다. 관람이 아니라 관조입니다. 응원하는 팀이 큰 점수 차로 지고 있으면, 많은 관중들이 7-8회 정도가 되면 자리를 뜹니다. 하지만 1루 자유석의 사람들은 거의 끝까지 자리를 지킵니다. 애초부터 승부 따위를 보자고 온 것이 아니라는 듯, 그들의 표정에는 흔들림이 없습니다. 이들은 중계 카메라에도 잡히지 않지요. 경기 내내 무표정하니, 쓸 만한 중계화면이 나오지 않는 겁니다.

그렇게 밋밋하게 야구를 볼 거면 왜 야구장에 오느냐 하겠지만, 어쨌든 그들은 거의 매일 야구장에 옵니다. 거의 매일 오는 그들은 거의 같은 자리에 앉습니다. 자유석이라서 자유롭게 앉으면 되는데, 그들 각자에겐 좋아하는 자리가 있나 봅니다. 그들끼리는 모종의 공감대가 있어, 남이 즐겨 앉는 자리는 알아서 피해 줍니다. 남의 자리를 탐하지 않고, 서로 멀찍이 떨어져 앉습니다. 3루 홈팀 응원석에서 느껴지는 강한 응집력은 1루 외야 자유석에는 없습니다. 적당한 거리가 만들어내는 느슨한 배려만이 있을 뿐이지요.

저는 그들이 경기를 보고 있는지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눈은 경기장을 향해 있으니 그들에게 무언가가 보이긴 보일 겁니다. 하지만 저는 그들이 꼭 야구를 보는 것은 아닐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즈넉한 구석자리에 앉아서 야구와는 관련 없는 어떤 것을 보고 있거나, 혹은 겉으로만 응시하는 것처럼 보일 뿐 실제로는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을 수도 있지요. 그 속을 누가 알겠습니까.

나는 야구장의 흥분에서 멀찍이 비켜서 있는 그들을 가만히 바라봅니다. 나는 그들이 결코 이상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태도가 야구를 대하는 다수의 방식은 아닐지라도, 야구를 대하는 가능한 방식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3루 응원석의 일사불란한 응원을 보는 것보다 중심에서 약간씩 비켜나 있는 1루 자유석의 사람들을 보는 게 저는 조금 더 즐겁습니다. 공 하나하나에 환호하거나 탄식하지 않고, 한 걸음 물러나 야구를 관조하는 사람들 말이지요.

인간이 세상을 대하는 방식이 이렇게나 다양합니다. 중심으로 내달리는 사람이 있고, 중심에서 한 발짝 물러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몰입하는 사람이 있고, 느슨하게 지켜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의 외연은 중심에서 조금씩 벗어나 있는 사람들로 인해 넓어져 간다는 생각을 하면, 그들에게 감사함마저 느끼게 됩니다. 저는 오늘도 1루 자유석의 표를 삽니다. 시원한 저녁 바람을 맞으며 막 붉어 오는 노을을 봅니다. 저 아래에서 사람들이 무언가를 하는군요. 무엇을 하는가 봤더니, 마침 야구입니다. 고작 야구이고, 심지어 야구입니다.

(2019년 여름, 대구 삼성라이온즈 파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