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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의 독서 일기
말맛과 생김, 그리고 엉터리 이야기


글 전형천 미카엘 신부 | 국내연학

 

책을 읽다보면 눈이 확 뜨이는 순간이 있습니다. 대개는 오랫동안 궁금했던 것이지만 누구도 설명하지 못하던 것을 설득력 있게 쓰고 있다거나, 어렴풋이 생각만 할 뿐 표현을 찾지 못하던 것을 누군가 간명하게 표현을 할 때 그러합니다. 그런데 가끔은 사고방식이나 다른 영역의 감각을 여는 글을 읽을 때도 있습니다.

 

“그녀가 가장 아꼈던 것은 ‘숲’이었다. 옛날의 탑을 닮은 조형적인 글자였다. ㅍ은 기단, ㅜ은 탑신. ㅅ은 탑의 상단. ㅅ-ㅜ-ㅍ 이라고 발음할 때 먼저 입술이 오므라들고, 그 다음으로 바람이 천천히, 조심스럽게 새어나오는 느낌을 그녀는 좋아했다. 그리고는 닫히는 입술. 침묵으로 완성되는 말. 발음과 뜻, 형상이 모두 정적에 둘러싸인 그 단어에 이끌려 그녀는 썼다. 숲. 숲.” - 한강, 『희랍어시간』, p14

 

읽고 가슴이 뛰었습니다. 어찌나 좋았던지 소설책을 꼭 끌어안고 잤습니다. 글자는 그저 종이 위에 말라붙어서 자음과 모음이 기계적으로 조립되어 그 소리를 알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글자마다 그 생김이 있고 글자를 일으켜 소리 내면 말맛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이 생경하고 놀라웠습니다. 그때부터 때로는 작은 공책에 단어를 또박또박 쓰고, 한참을 소리 내어 읽다가 짧은 생각을 덧붙이기도 했습니다.

 

이를테면 이러합니다. ‘비’라는 말소리는 길게 떨어지는 것이 비 내리는 모습을 닮았습니다. ‘바다’라는 글자는 모두 바다 끝을 향해 서서 ‘아~’ 하고 소리치는 모습을 닮아있어서, 그렇게 ‘바다’하고 소리 내면 멀리 내다보게 되어 마음이 시원하게 열릴 것만 같이 생겼습니다. ‘바람’이라는 말을 소리 내면 입이 열리면서 바람이 일기 시작하다가 입안에 공간을 만들면서 굳게 닫히는데, 그래서 바람이라는 말은 그렇게 바람을 담아냅니다. ‘풀’이라는 말소리는 땅에 푸르게 맺힌 생명들이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입을 내밀면서 ‘물’을 외치는 것처럼 생겼습니다.

 

물론 언어학적으로는 아주 엉터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언어’는 생물과 같아서 장소에 따라 다르고 시간이 흐르면서 변하기 때문에 말소리는 한결같을 수 없고, 우리의 ‘글자’는 소리에 맞추어 조립된 것이므로 그 생김은 결국 우연의 결과이겠지요. 하지만 끊임없이 변하는 소리에 따라 조립된 글자를 보고 불현듯 떠오른 생각과 감정이 조금은 즐겁습니다. 그렇게 말마디의 의미에 기대지 않고, 소리와 생김에 마음을 걸어놓는 사람을 만나면 정말이지 반갑습니다.

 

제가 책을 읽으며, 연신 ‘ㅅ-ㅜ-ㅍ’했던 것처럼, 혹시 당신도 ‘비’와 ‘바다’, ‘바람’과 ‘풀’ 소리를 내셨을까요? 제가 한강의 말을 빌려 여러분에게 말을 건네는 것처럼 혹여 어떤 대화에서 ‘비’와 ‘바다’, ‘바람’과 ‘풀’이라는 단어가 나온다면, 이 엉터리 이야기를 떠올리실까요? ‘숲’이라는 한 음절의 단어 위에 작가는 이야기의 집을 짓고 저와 같은 사람은 그곳에서 잠시 쉬어갈 수 있다는 것, 그 이야기를 가지고 또 다른 대화를 시도할 수 있다는 것, 그렇다면 좀 엉터리라도 상관없지 않을까요?

2020. 08. 12.

 

어쩌다가 앓았습니다. 그러다가 책 읽는 시간이 점점 늘었습니다. 사람들이 책을 좋아한다, 공부를 좋아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선생님은 ‘글자 뒤에 숨어 산다.’고 표현해주셨습니다. 그 정확한 표현이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여전히 앓으면서 골방에 앉아 듣고 읽으며 배우는 일을 합니다. 어쩌다 발굴한 문장을 헤집으며 누군가의 생각을 엿보고 말 조각을 빌려 옹알이하듯 써보기도 합니다.

 

* 이번 호부터 전형천(미카엘, 2018년 사제서품) 신부님의 연재 글 신부님의 독서 일기가 애독자 여러분 곁을 찾아갑니다.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