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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글
안녕, 2020….


글 최성준 이냐시오 신부 | 월간 〈빛〉편집주간 겸 교구 문화홍보국장

마지막 달이 되었습니다. 2020년의 달력이 이제 한 장밖에 남지 않았네요. 12월은 항상 뭔가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보내는 것 같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달이라 그런지 마음만 바쁩니다. 다가오는 성탄도 준비해야 하고, 29일에는 부제·사제 서품식도 있습니다. 더군다나 올해는 코로나19로 인해서 마치 한 해를 잃어버린 느낌이 들어, 2020년을 보내는 마지막 달이 너무나 아쉽게 느껴집니다. 이런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마음을 다잡아 차분하게 성탄을 준비하고 한 해를 정리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져 봅니다.

 

최근 저는 교구청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헌책방에 자주 갑니다. 요즘은 헌책방을 중고서점이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저는 ‘헌책방’이라는 말이 훨씬 정감이 갑니다. 제가 가진 물건의 태반이 책인데, 사 모으기만 해서 쌓이고 쌓였습니다. 중국에서 한국에 들어온 후 몇 번 숙소를 옮기면서 책을 대량 정리한 적이 있지만 그 사이에 또 많이 쌓였습니다. 사실 책을 정리하는 속도는 책을 구입하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책은 점점 빠르게 불어나는 중입니다. 물론 그 많은 책을 모두 읽는다는 건 아닙니다. 읽고 싶어서 사고 필요하다 싶어서 구입하지만 못 읽고 쌓여 가는 책이 더 많습니다. 다 읽은 책, 다시 보지 않을 것 같은 책, 읽고 싶지만 시간이 없어 미뤄 둔 책, 몇 장 읽다가 재미없어 덮어둔 책 등등. 책장을 다 채우고, 책장 앞에 쌓이고, 책상 위를 점령하다가 이제는 저를 잡아먹을 정도로 늘어나는 책을 보면서 뭔가 대책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제목처럼 ‘신박한 정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다가 최근에 가까이 있는 헌책방을 발견했습니다. 책을 갖다 주면 상태에 따라 최상, 상, 중으로 등급을 매겨 가격을 책정해 줍니다. 컴퓨터에 제목만 입력하면 정해진 가격이 바로 책정되어 이용하기가 아주 수월합니다. 이제 책을 정리해서 다시 안 볼 책들은 헌책방에 갖다 줘야겠다고 생각하고 책장에서 매일 팔 책을 고릅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산책도 할 겸 가방에 작별을 고할 책을 골라 넣고는 헌책방으로 향합니다. 책을 판매한 돈은 꼭 현금으로 받아 봉투에 차곡차곡 모아둡니다. 왠지 현금으로 받으면 더 뿌듯하더라고요. 이렇게 모은 돈을 연말에 어떻게 쓸지 고민하는 즐거움은 덤으로 주어집니다. 책에 대한 집착이 많았고 책을 모으는 것은 좋은 습관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지만 이것도 어떤 면에서는 나의 욕망을 채우는 일이었고 지적 허영으로 빠지게 하는 유혹이었습니다. 책장의 책을 비워 나가면서 나의 마음도 많이 비워지고 정리되는 느낌이었습니다. 노자(老子)의 말이 떠오릅니다.

 

“배우는 일은 날마다 쌓아 나가는 것이고, 도를 행하는 것은 날마다 덜어 내는(비워 내는) 것이다. 비워 내고 또 비워 내어 무위(無爲, 하려고 하는 바가 없는 경지)에 이르니, 무위(無爲)하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다.”1)

 

12월입니다. 코로나19로 그냥 정신없이 흘려보낸 것 같은 2020년을 잘 보내 줍시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나의 삶을 돌아보고 정리하여 어수선한 마음을 가라앉혀야 하겠습니다. 내 마음에 비워진 공간만큼 주님께서 오셔서 채워 주실 것입니다. 텅 빈 마음으로 다가오는 성탄을 맞이하고 새로운 해를 맞이할 준비를 갖춥시다. 텅 빈 만큼 충만해질 것입니다.

 

오십시오, 주 예수님!”(묵시 22,20)

 

1) 노자, 『도덕경』, 48장. “爲學日益, 爲道日損, 損之又損, 以至於無爲, 無爲 而無不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