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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치유의 해’
우리 다시는 만나지 맙시다!


글 이영승 아우구스티노 신부 | 통합의료진흥원 전인병원 원목 담당

“어유, 오랜만입니다! 또 오셨네요?” 병원에 온 지 반년이 조금 더 지났을 무렵, 병동에서 저와 자주 이야기를 나누던 한 환우 분께서 다시 입원을 하셨습니다. 퇴원하셔서 댁에 가신 지 두 달이 채 안 되었던 것 같은데 다시 병원 로고와 이름이 새겨진 흰 옷을 입고 저와 엘리베이터 홀 앞에서 만나게 된 것입니다. 저도 모르게 반가운 마음에 웃으며 인사를 드렸더니, 그분도 웃으면서 하시는 말씀이 저를 멍하게 만들었습니다. “다시는 신부님을 안 만나도 될 줄 알았는데, 또 왔네요.” 우리가 다시는 만나지 않아도 될, 아니 병원 안에서는 ‘다시는 만나지 말아야 더 좋은 사이’라는 것을 그 순간 깨달았습니다.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에게 반가움을 표현하고,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묻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사람의 도리인 것을, 병원 안에서는 그것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함께 있을 때는 애틋하다가도 퇴원하고 나면 다시는 서로 만나지 말아야 하는 사이, 그게 병원에서 근무하는 저와 환우분들과의 관계였던 것입니다.

대축일이나 한 해를 마무리하며 드리는 미사 때에 저는 종종 미사에 참석하신 분들에게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아이고, 우리 다시는 보지 맙시다. 다들 집에 좀 가세요.” 그 순간 함께 미사를 봉헌하시는 원장 신부님의 표정이 어떠했는지는 한 번도 확인해 본 적 없지만 매일매일 병원 운영을 걱정하시는 신부님의 마음과는 달리 저의 이 말은 진심이었습니다. 몸의 아픔이든, 마음의 아픔이든 하루 빨리 건강해져서 나에게 가장 익숙한 곳, 바로 집으로 가시라는 뜻이었지요. ‘특별한 의료 기술이 없는 제가 여러분에게 해드릴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은 여러분 모두를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이라는 말도 함께 덧붙여서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제 기도는 저희 병원을 위험에(?) 빠뜨리곤 합니다.

그런 말씀을 하시는 분들을 종종 만납니다. “집보다 여기가 더 편해요.” 라는 말씀이요. 어떤 의미인지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감사의 마음으로 그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으나, 그래도 저는 여기보다는 집이 더 편하실 수 있게 되길 바란다고 말씀드립니다. 병원은 거쳐 가는 곳이고 잠시 들르는 곳이 되어야지, 집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병원은 병원의 목적에 맞게 아픈 곳을 치료하는 곳이 되어야지 영원히 머물고픈 곳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요즘은 의료 기술이 발달하고 다양한 연구도 함께 더해져서 그런지, 예전처럼 내가 살던 곳, 내 집에서 눈을 감는 일이 드물다고 합니다. 마지막까지 어떻게든 아픔을 낫게 하려고 병원에 들렀다가 결국엔 눈을 감고 내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 더 많아졌지요. 물론 나의 마지막을 무조건 내 집에서 맞이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익숙한 곳에서 사랑하는 가족들 곁에서 마지막을 준비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무리 병원이 집 같이 편하다 하더라도, 병원이 집이 될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원목 사제로서 ‘우리 병원의 환우 분들을 댁으로 돌려 보내기’에 열심입니다. 물론 ‘건강하게’ 라는 조건과 함께 말이지요.

하지만 또 어쩔 수 없이 ‘반갑지 않은 반가움’을 나눠야 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분들에게 저는 다른 기도를 청하지요. 내 집보다 더 좋은 아버지의 집에 편안하게 도착할 수 있기를.

얼마 전, 원목 사제로 소임을 받고 처음 사용했던 노트 맨 뒤편을 살며시 펼쳐 보았습니다. 색깔도 다르고 굵기도 다른 펜으로 쓰여진 여러 이름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습니다. 소임을 처음 시작한 날부터 1년여 동안 ‘내 집보다 더 좋은 아버지의 집’으로 안내를 해드린 분들의 이름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름만 보아도 목소리가 생생할 정도이고, 또 어떤 분의 이름은 가물가물하기도 합니다. 그땐 어떤 생각으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분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소중하게 꾹꾹 눌러 노트 맨 뒷장에 적어 두었습니다. 언젠가 그분들을 위해 기도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던 것 같습니다.

요즘에는 그렇게 따로 한 분 한 분의 이름을 적는 일은 멈추었지만, 그래도 간혹 가다 생각나는 분들이 계십니다. 많은 이별을 가슴에 담아두고 사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지만 저의 바람대로 ‘다시는 볼 수 없는’ 사이가 되었기에 저는 오늘도 그분들을 위해 짧은 기도를 봉헌합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정말로 ‘다시 만나서 반가울 수 있길’ 바라면서 말이지요.

저는 병원에서 사제로 살아갑니다. 병원은 반가운 인사를 나누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곳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제가 있는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반가움을 나눌 수 있길 희망합니다. 건강하게, 건강하게 말이지요. 그리고 저의 기도가 여러분의 가정에도 닿길 바라봅니다. 여러분과 저는 ‘만나지 않아야 더 좋을 사이’가 되길 바랍니다.(물론 저는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 누구라도 저희 병원에서 저를 만나게 되신다면 반갑게 인사드릴 것을 약속드립니다.)

 

다사다난했던 올 한 해, <빛>잡지를 통해 여러분과 만날 수 있어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여전히 불편하게 마스크를 착용하며 지내야 하지만 저의 부족한 글이 여러분에게 작은 기쁨이 되셨길 바랍니다. 그리고 기도 중에 원목 사제로 살아가는 저의 지향에도 여러분의 기도를 보태어주시길 청해봅니다. 많은 분들이 우리 병원을 거쳐 가시되 오래 머무르지 않고 내 집, 내 안식처로 하루 빨리 복귀할 수 있길 말이지요. 여러분 가정에 하느님의 사랑이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아멘!

 

* 그동안 ‘2020년 치유의 해를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과 연재를 맡아주신 이영승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