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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이야기
작은 이야기의 힘


글 허찬욱 도미니코 신부 |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친한 친구가 서울에서 내려와 1박 2일을 머물다 갔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준비해 온 중요한 일이 마지막에 틀어져 버렸다고 했습니다.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는 낙심이 표정에 묻어났습니다. 어쩌다 그리되었는지 궁금했지만 더 묻지 않았습니다. 말하고 싶으면 먼저 말할 거라 생각했고, 말하고 싶지 않다면 내가 먼저 물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묻고 싶은 걸 참았습니다. 그는 함께한 이틀 동안 그 일에 대해서 자세히 말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그가 최근에 읽은 책에 대해서, 그가 본 영화와 듣고 있는 음악에 대해서, 그리고 요즘 만나는 재미있는 친구들에 대해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풀어놓았지요. 우리는 그런 이야기들에 흠뻑 빠져 들었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함께 먹었고, 한적한 산책길을 느긋하게 걸었습니다.

그렇게 이틀을 함께 지낸 후, 나는 그를 역으로 배웅해 주었습니다. 기차가 출발하기 전, 그는 내 손을 꼬옥 잡고는 ‘마음이 많이 풀렸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고맙다며 웃어 보였지요. 이틀 동안 나는 그가 겪었을 실망과 좌절에 대해서는 정작 거의 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제대로 된 위로의 말조차 건넬 수 없었지요. 다른 이야기만 실컷 나누다 갔는데, 그는 마음이 많이 풀렸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을 만납니다. 사람들은 저에게 무슨 말이든 풀어 놓습니다. 무슨 말이든 풀어놓는다는 말은, 그들이 저에게 모든 속사정을 속속들이 드러낸다는 뜻은 아닙니다. 말 그대로 무슨 말이든 한다는 의미지요. 그들의 말을 들으며, 저도 그들에게 무슨 말이든 하게 됩니다. 저는 그들과 주고받는 말이 진심으로 서로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아닐 거라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정말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지만, 우선은 이 말을 합니다’라는 느낌이 자주 듭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대화가 변죽만 울리는 거짓 대화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도직입이랄까, 거두절미랄까, 칼로 베고 자르는 식의 대화가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지요. 우리가 겉도는 이야기를 하면서 말의 가장자리를 멋쩍게 쓰다듬고 있다 해도, 우리가 무언가를 드러내면서 동시에 무언가를 감추고 있다 해도, 이 대화는 거짓이 아닙니다.

 

소설가 이승우는 드러냄과 감춤이라는 주제에 민감한 작가입니다. 그는 많은 작품에서 이 주제를 다룹니다. 그의 작품 『생의 이면』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글쓰기는 감춰진 것의 드러내기다. 그 드러내기는 그러나 감추기 보다 더 교묘하다. 그것은 전략적인 드러냄이다. 말을 바꾸면 그는 감추기 위해서 드러낸다.”(335) 무언가를 드러낸다는 말은 그 외의 다른 것은 드러내지 않기로 작정했다는 말입니다. 무언가에 대해 말하는 그 순간만큼은 적어도 다른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겠다는 말이지요. 이에 대한 이승우의 평가는 혹독합니다. “사람이 노출본능 때문에 글을 쓴다는 말은 거짓이다. 더 정확하게는 위장이다. 사람은 왜곡하기 위해서 글을 쓴다.”(24) 사람은 무언가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왜곡하기 위해서 쓰는 것이라고 이승우는 말합니다. 저는 드러냄과 감춤이라는 글쓰기의 양면성에는 오랫동안 공감해왔습니다. 하지만 이승우의 ‘왜곡’이라는 표현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나누는 말이 우리가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것을 왜곡의 의도라고 깎아내릴 필요는 없습니다. 아직 말을 찾지 못한 날 것의 경험에게는 말을 찾을 때까지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당분간 물색없이 딴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겠지만 이러한 딴 이야기가 말을 찾지 못한 경험에 말을 찾아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표현되지 못한 경험이 표현된 경험을 통해 서서히 말을 찾아갑니다. 말을 찾은 경험은 이제 조금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됩니다. 이틀 내내 딴 이야기만 하고 간 친구가 내 손을 꼭 잡으며 했던 ‘마음이 많이 풀렸다’는 말은 ‘이제 자신의 고통을 조금은 감당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겠지요. 말로 하지 못한 경험이 이제야 말을 찾았다는 뜻이며, 말을 찾은 경험은 이제 굳이 남에게 말로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그나 나나 어렴풋이 깨달았던 것이 아닐까요. 친구는 헤어지면서 제 손만 꼭 잡고 갔습니다. 저는 다행이라 여겼고, 진심으로 기뻤습니다.

 

<빛>잡지의 ‘작은 이야기’, 그 마지막 글을 적습니다. 저는 한 해 동안 써왔던 열두 편의 글이 정말 제가 쓰고 싶었던 글은 아니었다는 걸 매월 원고를 쓰면서 느꼈습니다. 정말 쓰고 싶었던 내용은 정작 쓸 수가 없었습니다. 아직 제대로 된 말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대신 어떻게든 쓸 수 있겠다 싶은 것만 썼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 글을 왜곡이나 악의적인 감춤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저의 글을 통해 아직 투박한 말밖에 갖추지 못한 제 경험들에 조금씩 말을 찾아주었습니다. 그 경험들은 조금씩 감당할 만한 것이 되었고, 얽혀있던 제 마음도 많이 풀렸습니다. ‘작은 이야기’를 읽는 분들의 마음에도 그런 작은 움직임이 함께 일어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길 바라며 썼습니다. 그냥 ‘마음이 많이 풀렸다’고 말하며 서로의 손을 꼬옥 잡을 수 있다면 그걸로 좋았습니다. 그런 흐릿한 공감의 순간이 말과 글이 가닿을 수 있는 최선의 지점이라고 믿었습니다. 공감을 만들어내는 작은 이야기의 힘을 믿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믿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그동안 작은 이야기를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과 연재를 맡아주신 허찬욱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