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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선교 신앙수기
하느님의 자녀로 살기까지


글 이정민 유스티나 | 중리성당

가을빛이 절정을 이루며 씻어낸 듯 맑은 하얀 구름에 마음까지 두둥실 가벼워진다. 한 뼘도 안 되는 사람의 마음도 저토록 가볍게 만들지 못하는데 하느님의 놀라운 은총으로 마음이 채워지는 날이다. 여유롭게 핸들을 잡고 넓은 시골길을 달리는 동안 처음 가톨릭에 입문해 세례를 받던 기억이 나서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어릴 적 우리 집안은 불교가 매우 강한 가정이었다. 무녀독남 우리 아버지의 사촌 형님이 출가하셔서 큰 암자(불교 태고종)를 짓자, 우리 자매들은 어릴 때부터 엄마 손을 잡고 절에서 불공을 드리며 절밥을 먹고, 집안에 큰 일이 생기면 늘 고사를 지내는 모습을 보며 자랐다. 그런데 우연인지 필연인지 우리 자매 셋 모두가 개신교 집안으로 시집을 가게 되었는데, 특히 나의 시댁은 순복음교회의 성도 가정이었다. 시어머니의 강력하고도 반 강제적인 권유로 나 역시 순복음교회에 다녀야 했는데, 한편으로는 젊은 시절이어서 그랬는지 종교를 가져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어서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그렇게 3년 넘게 교회를 다니며 신앙을 키워보고 싶었지만 좀처럼 내 마음속에서는 신앙심이 자라나지 않았고, 날이 갈수록 교회의 교리와 방법이 나와는 맞지 않는다는 생각만 들었다. 서서히 교회에서 발을 빼기 시작했고 결국 남편과 나는 교회와의 인연을 끊게 되었다.

그 무렵 친정 엄마가 당뇨합병증에 의한 신부전증으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병세에 시달리고 계셨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경으로 누군가에게 기도를 하고 싶었고, 무언가 절실한 대상이 간절하던 때에 어릴 때부터 관심이 많았던 성당(어린 시절 우리 집 아래에 성당이 있었는데 그곳을 바라보며 수녀님들과 성당에서 흘러나오던 성가를 들은 적이 있었다.)에 나가보면 어떻겠느냐며 조심스레 남편에게 제안을 했다. 나의 간절함이 전해졌는지 남편도 좋다고 해서 집에서 가까운 성당에서 교리를 받고 1995년 3월 우리 가족 셋은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열심히 미사에 다니며 하느님 아버지께 간절히 기도드렸고 레지오에도 입단하여 묵주기도도 열심히 바쳤다.

그러던 중 구미 쪽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는데 큰 성당에서 따로 성당이 분가될 즈음이라 우리는 새로 분가된 성당으로 옮겨야 했다. 그 당시에는 땅만 매입해서 우리 힘으로 성전을 지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비닐하우스에서 시작된 새 성전에는 해야 할 일도 봉사 할 일도 엄청 많았다. 미사해설은 물론이고 주일학교 교사에 성가대에 주일미사를 마치면 이웃 성당을 찾아가는 묵주판매까지…. 정말 기도를 많이 바쳤고 매일 미사도 드리며 은혜로운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키워가면서 하느님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는 내가 되어가고 있었다. 본당공동체에서도 나를 많이 아껴 주셨고 가족 같은 따뜻한 분위기 안에서 나의 신앙이 7년을 조금 넘을 무렵 작지만 멋진 우리 성당이 지어졌고 우리는 새 성전에서 꿈에 그리던 미사를 드릴 수 있었다. 미사해설 봉사를 맡고 있던 나는 서울 말씨를 쓰고 있어서 본당의 크고 작은 행사에서 해설을 도맡아 하게 되었는데, 그로 인해 뜻하지 않은 구설수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점점 성당에 가는 것이 불편해졌고 결국 냉담으로까지 이어졌다. 30대의 젊은 나로서는 혼자 감당하기에는 힘겹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내가 성당에 나가지 않으니 남편과 딸아이도 덩달아 냉담자가 되고 말았다.

 

냉담의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8년여의 시간을 보내고 다시 마음을 가다듬어 성당에 나갔을 때는 본당 신부님이 세 번이나 바뀐 뒤였다. 어린 딸아이와 나는 그렇게 성당에 다시 나가게 되었지만 남편은 계속 냉담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다툼 한번 하지 않고 잔소리 한번 하지 않은 채 묵묵히 늘 친절하고 상냥하게 매사에 감사하며 기도하는 모습으로 살았다.

또 몇 년이 흘렀을까? 대략 6~7년을 남편은 더 냉담했던 것 같다. 그리고 4년 전쯤 부활을 앞둔 어느 봄날, 집 앞 중국집에서 남편과 나는 가볍게 저녁을 먹으며 술을 한 잔 하고 있었다. 그때 남편이 불쑥 “다음 주일이 부활대축일이지? 당신에게 줄 선물이 있는데….”, “선물? 뭔데?”, “나, 다음주부터 다시 성당에 가려고.” 세상에! 나는 너무 놀라서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남편은 나에게 “늘 당신 보면서 생각했어. 어쩌면 항상 밝고 긍정적으로 살 수 있을까? 같이 성당에 가자고 재촉할 만도 한데 한번도 채근하지도 않고 늘 웃으며 대하고…. 그런 당신 보면서 하느님이 진짜 계신가 보다, 하고 생각했어. 기도의 힘이 아니면 도저히 그럴 수 없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우리 가족 지금까지 이렇게 무탈하게 지내 온 것도 모두 당신 기도 덕분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고…. 그래서 나도 이제 성당에 열심히 다녀 보려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그러면서 남편은 “다음주에 가서 고해성사 볼 거야.”라고 했다. “고마워, 여보! 진짜진짜 고마워.” 그렇게 우리 가족은 다시 다함께 미사에 참례하게 되었다.

 

가끔 생각한다. 진정한 신앙인의 삶이란 어떤 것일까? 매일 미사를 드리고 제단체에 가입하여 열심히 기도드리고 봉사를 하면서도 자신의 삶에 욕심이 많고 이기적이고 원망하는 삶을 산다면 그 많은 기도와 봉사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비록 매일 미사를 드릴 수는 없다 하더라도 늘 마음속에 하느님을 모시고 사는 삶, 그래서 남에게 상처 주는 일이 없도록 노력하고 배려하며 어려운 이웃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언제나 진심으로 친절과 사랑을 베풀 줄 아는 모습이야말로 하느님이 원하시는 하느님 자녀의 모습이 아닐까? 이웃에게 성당에 가자고 굳이 힘들게 권유하지 않아도 세상 사람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모범적으로 행동한다면 그 모습을 보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싶은 것 또한 선교활동이 되지 않을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작년에 혼인을 하고 우리 가족이 된 사위는 아직 하느님의 자녀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천천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기다릴 것이다. 절대로 재촉하지 않을 것이며 하느님의 자녀가 되면 어떻게 삶이 변화되어 살아갈 수 있는지를 직접 행동으로 보일 참이다. 나의 남편이 스스로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왔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