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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의 독서 일기
문장에 담은 바다, 바다를 닮은 문장.


글 전형천 미카엘 신부 | 국내연학

가끔 홀로 바다에 갑니다. 그 작고 조용한 바닷가 마을에 가면, 해변의 가장자리를 따라 걷거나 한구석에 앉아 높고 푸른 하늘 아래 저 멀리 뻗어있는 바다를 보며 들이치는 파도 소리를 하염없이 듣곤 합니다. 소파에 몸을 깊이 묻고 작은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면서 글을 쓰는 지금도 그 바다를 떠올립니다. 그리고 그 바다에 다녀오는 날이면, 그리고 그 바다가 생각나는 날이면 연필을 들고 일기장에 쓰며 소리내어 읽는 문장 하나가 있습니다.

 

“바다는, 크레파스보다 진한, 푸르고 육중한 비늘을 무겁게 뒤채면서, 숨을 쉰다.”

 

색깔도 소리도 없는 글자로 바다의 검푸른 빛깔과 역동적으로 몰아치는 파도 소리를 담고 있지요. 최인훈의 소설 『광장』의 첫 문장입니다. 이 소설은 남북과 좌우의 이념 대립 가운데 파멸해 가는 젊은이의 이야기입니다. 해방 이후 남쪽에도 북쪽에도 만족하지도 적응하지도 못했던 주인공은 인민군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포로가 됩니다. 전쟁이 끝나자 주인공은 남쪽도 북쪽도 아닌 중립국을 택했고, 중립국을 선택한 포로들이 탄 배에 오릅니다. 그러니까 작가는 소설을 시작하면서 주인공이 배에서 바라보고 있는 바다를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소설의 제목은 『광장』이지만 소설이 바다에서 시작해서 바다에서 끝이 나는 만큼 작가는 첫 문장을 쓰는데 많은 공을 기울였습니다. 최인훈은 이 소설을 1960년에 발표한 이후 약 40년간 소설을 고쳐서 내기를 반복했지요. 그리고 이 첫 문장은 11번의 수정을 거칩니다. 그것도 모자라 병원에 누워서 죽는 순간까지 고민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쩌면, 저 문장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문장은 엄혹하고 혼란했던 시대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무거운 주제에 어울리는 이야기를 찾아 문장을 헤집으며 뒤척였을 작가의 잠 못 드는 밤을, 때로는 무겁게 내쉬었을 한숨을 닮은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게 바다를 그려내는 문장은 주인공이 살았던 시대를, 작가의 마음을 비추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저 문장이 저에게 특별한 것은 ‘그날’의 바다를 닮아있기 때문입니다. 서품을 받고 딱 1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병원에서 뇌암 진단을 받고 돌아와 저녁미사를 봉헌했습니다. 미사를 마치고 돌아서니 사람들은 서품축일을 챙겨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 좋은 마음과는 상관없이 축하한다는 말마디는 가시처럼 마음에 박혔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돌아간 뒤, 앞으로 닥칠 일이 너무도 막막하여 집을 나섰습니다. 가다가다 도착한 어느 한적한 바닷가 마을에서 무심히 들이치는 파도를 보고 또 보았습니다. 문득 ‘저 바다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검푸른 몸을 세웠다가 누이며 달빛을 이리 저리 흩뿌리는 바다를, 거친 숨을 닮은 파도 소리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바다는, 크레파스보다 진한, 푸르고 육중한 비늘을 무겁게 뒤채면서, 숨을 쉬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계획 없이 떠난 길을, 역시나 계획 없이 돌아와 최인훈의 문장을 빌려 일기를 썼습니다. 그리고 작가가 한 생을 바쳐 쓰고 또 고쳐 쓴 문장을 이렇게 쉽게 빌리는 것이 못내 부끄러웠습니다. 하지만 그 세월만큼 살아낸다면 빚진 마음이 조금 옅어질 수 있지 않을까 스스로 물었습니다.

좀처럼 평서문에 어울리지 않는 아프다는 낱말을 쓰는 것이 일상이 되어갈 때에도, 가끔 힘을 내어 그 바다를 찾았습니다. 가서 다짐했습니다. 하루씩만 살자. 딱 오늘 하루만 살고, 내일 해가 뜨면 또 하루를 살아보자. 하루를 시작할 때 다짐하고 하루를 마칠 때 감사하자. 그것을 할 수 있을 때까지 반복하자. 그렇게 바다에 다녀오는 날이면 최인훈의 문장을 빌려 일기를 썼습니다. 바다를 찾을 수 없을 만큼 힘든 날이면 그 문장을 써놓고 바다를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말하자면 저는 최인훈의 문장을 제 마음대로 빌려 썼습니다. 최인훈이 쓴 바다를 닮은 문장에, 저는 저의 바다를 담았습니다. 그렇게 그날의 바다를 닮은 저 문장에 저는 자주 마음을 기대놓곤 했습니다.

 

얼마 전, 새롭게 치료가 시작되기 전에도 그 바다에 다녀왔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즈음 한창인 치료는 아마도 여러분이 제 이야기를 마주할 즈음에도 계속되고 있겠지요. 새해에도 여지없이 일상이 이어져서 하루하루가 벅찰지 모르겠지만 저는 힘을 내어 가끔 그 바다를 찾겠습니다. 때로는 하루가 지리멸렬해서 마음이 부서질 때마다 저는 그날 바다를 떠올리며, 또 연필을 들고 저 문장을 쓰며 나지막히 소리 내어 읽겠습니다. 그렇게 새해에도 다시금 문장에 바다를 담으며 바다를 닮은 문장을 다시 쓰겠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하루하루씩 살아 꼭꼭 이야기를 건네겠습니다. 당신이 부디 포기하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당신도 꼭꼭 살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